제636화: 적색인물(2)
중국에서 북한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핸드폰으로 바꿔 들어갔다.
우리 전화기로 남측에서 북한에 있는 사람과의 통화는 불가능하다.
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전파를 막아 버리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북중 국경근처에서 통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평양을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따로 준비했다.
그리고 권총수는 자신만의 비밀라인을 하나 만들었다.
암호명 백두산.
그를 통해서 칠보호텔로 연락이 가능하다.
암호명 백두산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이 중국과 북한 남한을 잇는 중계소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 비밀라인은 오민철도 모르게 구축해 놓았다.
백두산은 조선족이지만 중국 국적을 갖고 있다.
연길에서 조그만 식당을 운영한다.
오직 권총수만 그를 상대한다.
일이 생겼을 때 채명천이 그 사람에게 전화한다.
그럼 그는 바로 권총수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다.
“결국 백두산이 입을 열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인데.”
“가까운게 아니라 그냥 제로라고 확신해도 돼.”
권총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 술집 여주인이 잔과 얼음, 그리고 로얄 살루트 21년산 한 병을 가져왔다.
“얼음 넣어요?”
권총수에게 묻는다.
나이는 채명천과 오민철이 많아도 이 자리의 주인은 권총수라는 걸 아는 행동이다.
“그냥!”
“웬 스트레이트에요.”
좀체 스트레이트 잔으로 마시지 않기에 놀란다.
잔이 채워지자 권총수는 단번에 마셨다.
“어, 우리 대표님 화난 일 있어요?”
권총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 주인은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라는 걸 느낀 듯 얼른 잔을 채워주고 돌아서 갔다.
“다른 직원들 아는 사람 있습니까?”
“없죠. 그렇지만.”
채명천이 약간 당황한 표정을 했다.
“으음.”
“말해보세요.”
“대표님 칠보산 호텔에 계신다는 말은 했죠.”
“관리실 직원들이 들었겠군요.”
“물론이죠.”
“모두 자리에 있었습니까?”
“아니죠. 으음!”
채명천은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듯 이마를 찡그렸다.
“다섯입니다.
“누구누구요?”
“나와, 관리계장 정영기, 홍나영씨, 그리고 맞다. 김술찬씨가 있었고, 김성곤 계장입니다.”
오민철이 나직한 소리로 채명천이 호명한 사람들 이름을 되뇌인다.
“왜 그러십니까?”
권총수에게 질문을 했지만 시선은 오민철을 향했다.
“칠보호텔에서 공격을 받았습니다.”
“정말입니까?”
“권 대표 아님 난 여기 있지 못합니다. 꼼짝없이 시체가 되어 북한 중앙텔레비젼 방송 화면에 부지런히 나올뻔 했죠.”
꿀꺽!
채명천이 침을 삼켰다.
비밀이 유지되지 않았다는 건 어디선가 흘러나갔기 때문이다.
권총수는 백두산에 대한 신뢰는 흔들림이 없다.
“설마 직원들중?”
채명천은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권총수는 말없이 잔을 비웠다.
일행들과 헤어져 집에 돌아온 권총수는 그다지 표정이 환하지 못했다.
어느 집단이건 내부에서 칼질을 하는 사람은 있다.
그건 인간이란 동물의 피할 수 없는 속성이다.
사람은 철새처럼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단단한 대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목적지까지 날아가지 못 한다.
중간에서 삐져 나가거나 다른 곳으로 방향을 트는 종(種)이 인간이다.
여러 가지 상황은 회사 내 적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살아 나왔기에 망정이지 굉장히 충격적이며 위험한 사태였다.
탁!
시원한 냉수 한 컵을 마시고 텔레비전을 켰다.
텔레비전에서는 정치인들과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나와 우리나라 미래 먹거리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화면이 대학교수라는 사람에게 고정되었는데 다른 채널로 돌리려는 순간 사회자로 화면이 바뀌었다.
멈칫!
사회자는 여자였다.
늘씬한 키에 상당한 미모를 자랑했는데 약간의 미소를 띄우며 조금전까지 발언을 한 교수의 얘길 잘 들었다면서 반대의견을 갖고 있는 맞은편 쪽 패널을 가리켰다.
권총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회를 보는 여자 아나운서의 낯이 익었다.
어디서 몇 번 본 얼굴이 틀림없다.
자신의 기억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분명히 봤다.
여자의 말은 부드러웠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발음이 정확하여 듣는 사람을 전혀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또한 어느 한쪽이 흥분하면 노련하게 진정을 시키고 화제를 잠시 돌리는 등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리드했다.
“설미주!”
권총수는 그제야 여자 이름을 떠올렸다.
“빅토리아.”
가톨릭에서 영세를 받게 되면 신앙의 큰 족적을 남긴 성인들 이름을 빌려온 세례명을 짓는다.
가뜩이나 미사를 싫어했던 권총수는 이른바 그 바닥(가톨릭)에서는 가장 흔한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원했다.
그런데 한 여자 아이가 빅토리아로 해달라고 했다.
물론 권총수는 빅토리아가 누군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한가지 반응을 보였다.
‘네가 여왕이냐?’
학교에서 빅토리아는 영국 여왕으로 배웠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학교1 학년으로 기억된다.
설미주는 놀리는 아이들을 향해 뾰쪽하게 말했다.
‘그리스도교 박해때 순교한 성인이셔, 알지도 못하면서’
그때 지나가던 수녀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미주의 말이 맞다고 해주어 일단락 됐는데, 당차고 거침이 없으며 공부도 잘했던 아이로 기억한다.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인가 입양이 되어 보육원을 나갔다.
입양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핏덩이때 가는 것과, 진짜 부모가 아니라는 걸 알고 가는 청소년기 입양이 있다.
거의가 갓난아이 때 가지만 일부 양친(입양부모)들은 나중 성인이 되어 친부모가 아니라는 것에 갈등과 혼란을 겪게 하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데리고 가는 것이
만일에 있을지도 모를 가정 분란을 막는다고 했다.
설미주는 그런 부모의 선택을 받아 떠났다.
열네살 쯤에 떠났으니 20년이 훌쩍 넘었다.
아무리 봐도 설미주가 틀림 없었다.
같은 보육원 출신 여자아이가 텔레비전 아나운서로 나온다는 것이 놀랍고도 묘한 기분을 불러왔다.
설미주 얼굴을 좀 더 보려고 재미도 없는 토론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권총수가 어제 밤 있었던 미래 먹거리 토론회를 보았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이다.
“진짜로 그런 프로를 네가 봤단 말이야? 그것 겁나 재미 없는데.”
“볼만 하던데.”
“진짜로 봤단 말이지?”
확인해보고 싶은데 자신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꺼낼 말이 없었다.
“지금의 육류를 대체할 다른 단백질원에 대한 토론이었는데 흥미롭더라고.”
“나도 언젠가 한 번 그 프로를 본 적이 있는데 재미 진짜 없어. 사회자도 기분 나쁘게 생긴 놈이야.”
“여자던데, 그것도 아주 예쁜.”
“그 사이 바뀌었나? 내가 볼 땐 뿔테 안경 낀 돼지 같은 친구였지. 걔 있잖아 무슨 대학교 교순가 뭔가 하는 사람.”
권총수는 그 프로를 어제 처음 봤으니 알리없다.
오민철은 혼자 목청을 높이고 흥분했다.
그러던지 말던지 권총수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권총수는 전화를 끊었다.
오민철은 그런 권총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 거렸다.
“채 이사님이야?”
권총수는 사무실 환풍기를 틀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불법인 줄 알면서 혹시나 하고 다섯 명에 대한 계좌를 좀 들여다 볼 수 없느냐고 했는데.”
“안된대?”
“잘못하다간 난리 난다는군.”
“그렇지. 법원에서 발행한 압색 영장 없이는 절대 개인 금융계좌를 들여다 볼 수 없지.”
“내 생각은 그래. 범인은 그 다섯 중에 있어.”
“다섯?”
“그들 중 누군가가 백서그룹에 포섭된 거야. 난 확신해.”
“허면 직원통해서 백서그룹으로 들어갔고, 그들이 평양쪽에 뀌띔했다는 것 아냐?”
“두 말 할 필요 없어.”
근거 없이 단정하는 권총수가 아니다.
저토록 분명하게 말하는 걸 보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했다
“형, 오늘부터 다섯 명 모두 미행자를 붙여.”
“채이사까지?”
“다!”
“알았어.”
오민철은 곧바로 자리를 일어나 사무실을 나갔다.
권총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죽기를 바란다면 죽여줘야지. 상대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 또한 자선일지 모르니.”
권총수가 나직하게 중얼 거렸다.
권혜림은 우두커니 서서 한 사내를 떠올리고 있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다.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나올 수가 있을까.
이번에야말로 무조건 죽었다고 자신했다.
북한은 충분히 그에게 사지(死地)가 될만한 위험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는 살아서 돌아왔다.
더욱 놀라운 건 북한쪽 반응이었다.
칠보호텔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베이징에 있는 백서그룹관계자가 북한대사관 사람을 만나 넌지시 물었지만 평양은 언제나처럼 평화롭고 따뜻했다는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그들의 말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권총수를 죽였으면 좋아할 일이니 필시 떠들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고 여비서 홍미희가 들어섰다.
“회장님 모임 참석하시려면 지금 출발해야 합니다.”
권혜림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여섯 시 반이다.
오늘 CBS(Columbia Business School), 미국 컬럼비아 경영대학원 출신 모임이다.
국내에 자신과 함께 공부했던 동창들이 십여 명 있지만 모임에는 기껏 대여섯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서로가 시간 맞추기가 어려운 것이다.
모임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바로 자신이고 제일 어린 사람이 서른여섯이다.
권혜림은 오늘 참석할 계획이 없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요즘처럼 하루하루 긴장속을 살아가고 있을 때는 가끔 회사와 상관없는 사람들을 만나 술 한 잔 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거울 앞에서 화장을 다시 한 번 다듬고 회장실을 걸어나갔다.
벤츠 승용차 한 대가 어군 앞에 멈췄다.
뒷문이 열리고 권혜림이 내렸다.
차는 그대로 진행하여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십시오. 회장님!”
기다리고 있던 지배인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쪽으로.”
지배인은 권혜림을 데리고 좌측 정원을 가로질렀다.
작년에 새롭게 인근 가정집을 매입하여 가게 터를 넓혔고 한옥으로 단장했다.
지붕과 건물 겉모습은 한옥이지만 실내는 완전한 서양식 인테리어였다.
화려한 천장의 뽀얀 회색 전등과 붉은 벽돌이 그대로 드러난 벽, 그리고 어디선가 한 번은 봤을 것 같은 커다란 그림과 진위를 알 수 없는 남녀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는 로뎅의
‘키스’가 세워져 있다.
권혜림은 안쪽에 자리한 조용한 방으로 들어섰다.
한가운데 탁자가 있고 네 명의 여자들이 이미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권 회장님!”
“언니는 항상 늦어.”
상의 자켓을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설미주가 환하게 웃었다.
“미주도 왔구나.”
나이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은 컬럼비아에서 같이 공부를 했다.
권씨 가문에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을 시기에 잠시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CBS에 입학하여 공부한 것이다.
그곳에서 설미주를 만났다.
설미주는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 MBS방송국에 아나운서로 들어갔다가 사표를 내고 미국 유학에 올랐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가며 콜럼비아 경영대학원을 마친 뒤 이번에는 KBC아나운서로 특채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