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7화: 살육의 시작(1)
정모석은 마른침을 삼킨다.
볼펜 녹음기에서는 계속 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입니다. 이 목소리 누구 것인지 정말 모르죠? 분명히 대답해야 합니다. 지검장님 인생이 끝장날 수도 있으니까.’
이어 최승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 어군이오. 난 중앙지검장 최승재이고, 누군가 날 찾아와 협박을 하는군요. 너무 위협적이어서 저항할 수가 없소.’
탁!
권총수는 녹음을 껐다.
만년필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권총수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양 팔꿈치를 허벅지 위에 올리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세수하듯 쓰다듬는다.
“기사에서는 A의원이라고 했던데 최 지검장과 같이 있던 정치인은 이원성 의원이 있었죠. 난 어군을 나와 평소 알고 지내던 대한신문 기자에게 넘겨 파일을 주었습니다. 다른 건 빼고
어제밤 있었던 일만 말입니다.”
어제밤 일 말고는 넘겨주지 않았다는 건 한 가지를 뜻하고 있었다.
정모석 자신이 지휘 책임을 맡아 진행했던 두 명의 검찰 수사관 살인모의 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는 뜻이다.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자수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이오?”
“자수를 하면 법원은 필시 수직적 상하관계가 엄격한 검찰 체계상 결코 아랫사람으로서 거절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릴 것입니다. 그래서 집행 유예정도.”
질근!
정모석은 어금니를 물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이오. 지검장님은?”
“오더를 내린 당사자이니 그는 구속을 피할 수 없겠죠. 또한 다른 건까지 엮이면 아마 향후 10년 이내에는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건?”
변장한 권총수는 웃음을 지었다.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권총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오늘 하루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셔서 사법고시 패스했고 선배들에게 손바닥 잘 비벼 동기중 가장 빠른 승진을 했으니 자수라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똑똑한 분이시니 내 말을 흘려 들었다가는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그 역시 금방 계산이 나오겠죠.”
권총수는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빈 택시가 오자 손을 들어 세운 뒤 타고 사라진다.
정모석은 벤치에 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담배 한 개비를 더 피우고 난 뒤 핸드폰을 들더니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참 가는데 받지 않는다.
아마 받을까 말까 고민 중일 것이다.
“문 수사관입니다.”
문석도였다.
“권총수씨에게 넘겨준 파일 자네 솜씨인가?”
문석도는 한숨을 내 쉬었다.
“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랬을 거야. 지금까지 그 사람이 해온 일을 보면 절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주지 않지.”
“어디십니까? 그렇잖아도 드릴 말씀이 있는데.”
탁!
정모석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빠져 나갈 수 없다고 해도 그렇지. 완전히 벌거벗겨 놓았잖아’
정모석은 이를 갈았다.
‘제 살길 찾아 보자는 건가’
딸칵!
세 번째 담배를 피워 물었다.
후우우!
속이 탄다.
타는 속을 달래야 하는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정모석은 거칠게 담배를 피웠다.
지이잉!
쥐고 있는 핸드폰이 강하게 울린다.
액정을 보던 정모석의 눈이 커졌다.
지검장 최승재 전화다.
진동하는 핸드폰을 쥐고 있기만 할 뿐 받지 않는다.
이윽고 신호가 꺼지더니 잠시 후 다시 울린다.
이번에도 한참을 기다리다 결국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자네 지금 어디야? 당장 내 방으로 좀 와.”
정모석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
탁!
정모석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잠시 손에 쥐고 있는 전화기를 내려다 보았고, 지잉하는 소리와 함께 최승재의 전화가 걸려온다.
파아악!
인정사정 없이 핸드폰을 바닥에 집어 던져 버렸다.
핸드폰이 일부 깨지긴 했지만 신호가 계속 울리자 다시 주워 재차 바닥에 찍는다.
그것도 모자라 구둣발로 핸드폰을 짓이기자 전화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전화를 완전히 박살 내버린 정모석은 헐떡거리는 호흡을 조절한 뒤 차를 몰고 떠났다.
호텔 앞에 벤츠가 멈춰 섰다.
운전사가 재빨리 내려 뒷문을 열어 주었는데 짙은 남색 정장을 한 장웅철이 내렸다.
장웅철은 곧바로 호텔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엘리베이터는 내려오고 있었는데 문 앞에 선 장웅철은 목을 좌우로 돌리며 기다렸다.
쨍!
문이 열렸는데 단 한 명도 내리지 않았고 장웅철은 안으로 들어갔다.
타는 사람도 없었다.
문을 닫고 올라갈 층을 누른 장웅철은 엘리베이터 벽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가만 바라본다.
“음!”
한숨과 같은 나직한 신음을 흘린다.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피하고 싶은 사람이 만나자는 전화를 해 온 것이다.
그를 한 번씩 만나고 가면 엄청난 피바람이 불어온다.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올라갔고 잠깐 사이에 커피숍이 있는 맨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렸고 밖으로 나간 장웅철은 다시 커피숍 문을 밀고 들어섰다.
북한산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 때문인지 이곳 커피숍은 항상 사람들로 넘쳐난다.
손님들이 넓은 커피숍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고개를 돌려도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오른쪽 창가에 있습니다.’
귓속을 파고드는 권총수의 전음에 장웅철은 화들짝 놀란다.
고개를 돌리자 과연 권총수가 혼자 커피잔을 놓고 신문을 보고 있었다.
장웅철은 천천히 걸어 다가갔다.
권총수는 신문을 접어 한쪽으로 치워 놓고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쭉!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권총수가 잔을 내려 놓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랜만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문을 통해 브라질 사건 잘 봤습니다.”
권총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 이름이 나오지는 않았을텐데요?”
“사막의 흑새가 지구상에 두 명 있습니까?”
“커피 한 잔 하셔야죠.”
“아닙니다. 조금 전 오기전에 마셨죠.”
“바쁘시니 본론만 애기하죠. 장 팀장님, 지검장 최승재에게 얼마를 전달했죠?”
장웅철이 깜짝 놀란다.
“돈을요? 내가?”
권총수 눈이 가늘어졌는데 면도날 같은 섬광이 뿜어나왔다.
장웅철은 속이 뜨끔했는데 마치 자신의 얼굴을 칼로 베는 듯한 느낌이다.
“장 팀장님, 사막의 흑새를 겪어 보셨으면서도 아직도 이런 식으로 상대하려 하십니까?”
“이보시오. 권대표님, 내가 무슨 돈을 최승재 지검장에게 전달했다는 겁니까?”
권총수는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형형색색 꽃이 피어 있는 북한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가져와!”
통화는 간단했다.
그리고 20분이 채 안되어 한 명의 사내가 나타났는데 건장해 보인다.
“도피 및 탈출, 침투와 습격, 자동차를 이용한 표적의 미행에 능숙한 특수부대 출신의 우리 직원입니다. 장 팀장님을 언제부터 감시했죠?”
사내에게 묻는다.
“작년 2월부터이니 1년이 넘었습니다.”
“지검장 차 트렁크에 돈가방 넣는 장면 찍었습니까?”
“물론입니다. 핵심장면만 조금전 대표님 핸드폰으로 보냈습니다. 지금 보시면 됩니다.”
“좋아요. 그만 가보세요.”
사내가 걸어서 커피숍을 나갔다.
권총수는 문자를 찾아 지금 막 전달된 동영상을 발견하고 스위치를 눌렀다.
“이왕이면 같이 보시죠.”
권총수는 핸드폰을 탁자 중앙에 올려놨다.
장웅철이 고개를 빼고 화면에서 나오는 영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하 주차장이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커다란 골프가방을 맨 장웅철이 나타났다.
슥!
잠깐 화면을 멈춘 권총수가 물었다.
“이 사람 법무팀장님 맞으시죠?”
화면이 클로즈업 된 상태인데도 장웅철이 대답을 않는다.
대신 표정이 굳어졌는데 권총수는 재차 물었다.
마치 확답을 받고 다음 장면을 보겠다는 듯했다.
“법무팀장님 아닙니까? 남의 것이면 볼 필요가 없죠?”
장웅철은 지금 뒷장면이 보고 싶을 것이다.
내가 아니라는 시나리오를 짜더라도 일단 내용 전부를 보고 짜야 하는데 달랑 앞 장면 하나 보여주고 묻는다.
“아니면 볼 것 없고.”
핸드폰을 회수하더니 다시 번호를 눌렀다.
“박 대리 동영상 잘못 보낸건 아니지? 당사자가 대답이 없어서 말이야?”
조금전 왔다간 사내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틀림없는 장웅철 팀장입니다.”
시끄러운 커피숍이었지만 내공으로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증폭을 시켰기에 장웅철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핸드폰을 끄고 다시 동영상을 틀었다.
“팀장님 맞다는데, 계속 볼까요?”
“권대표님 왜 이러십니까?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영상속 인물은 자신이 맞다.
그러니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이렇게까지 사람을 조롱하듯 해야겠느냐는 뜻이다.
“난 인정을 하시지 않기에 남의 것을 이 바쁜 시간에 구경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죠?”
권총수는 영상을 다시 돌렸고 장웅철은 골프가방을 끌고 주차장의 좁은 공간을 빠져나가 한 대의 검정색 승용차 앞에서 멈췄다.
넘버를 분명하게 확인하더니 트렁크쪽으로 돌아가 버튼을 누른다.
트렁크가 열리자 그 안으로 끌고 간 골프가방을 싣고 문을 닫았다.
쾅!
탁탁 소리를 내며 양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장웅철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권총수는 다시 핸드폰을 들고 말했다.
“가져와!”
전화기에 대고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렸고 잠시 후 골프가방을 끌고 박대리라는 사내가 다시 나타났다.
“장 팀장님이 조금전 차에 실었던 골프가방과 동일한 모델입니다. 열어 보여드려요.”
말이 끝나자 사내가 지퍼를 내렸다.
움찔!
장웅철이 기겁했다.
골프가방 안에는 오만원권 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
“백장 묶음으로 모두 200개입니다. 강제로 찔러 넣기까지 하여 밀어 넣었더니 200개가 들어가더군요.”
자신도 힘들게 쑤셔 넣었기에 장웅철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진다.
“가 봐요. 박대리 수고했어요.”
박대리는 약간 열린 지퍼를 다시 채우고 돌아서서 커피숍을 걸어나갔다.
“유감입니다만 장팀장님의 모습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김공수씨 아시죠? 법무부 차관, 권악수 회장님 출소에 가장 힘을 많이 써주신 분 말입니다. 그분에게도 조금전 모델과
같은 골프가방이 전달되었더군요.”
장웅철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커피숍 계산대로 다가가 한 잔을 주문하고 돌아왔다.
뜨거운 커피라도 한 모금 마셔야 이 무겁고 답답한 분위기를 견딜 것 같은 모양이었다.
“뭘 원하십니까?”
권총수는 상체를 뒤로 붙여 세웠다.
아무런 말도 않고 장웅철을 바라보았는데 어찌보면 약간 웃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는 분이잖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권총수에 대해 자신 만큼 많이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참을 만큼만 참는다.
그러다 더 이상 안되겠다 싶으면 다음해 봄에 다시 피어나지 못하도록 뿌리채 뽑아 버린다.
완전 삭초제근을 해 버리는 것이다.
“권악수는 교도소에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날 죽이려 했던 어머니 현미정도 당연히 몇 년 고생 좀 해야겠죠.”
예상한 대로였다.
권총수의 표적은 권악수와 현미정 두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