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이름은 코리아 스나이퍼-431화 (431/651)

제431화: 사라진 여자(2)

권총수는 물었다.

“언론에서 아무런 보도가 없던데?”

미국 대통령의 딸이 실종됐다는 건 빅뉴스다.

언론이 떠들고 하루 종일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송을 해도 과하지 않은 대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런 얘긴 듣지 못했다.

“엠바고(embargo)입니다.”

언론사의 취재기자들이 출입처에서 흔히 듣는 자제 요청을 가리켜 엠바고(embargo)라 한다.

‘보도 시점 제한’을 뜻하는 엠바고는 국가이익이나 생명에 끼칠 수 있는 폐해를 막는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맥보란의 얼굴이 어둡다.

그건 CIA에서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CIA에서 조차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에 권총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거짓말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지구상 최고의 정보조직에서도 아무런 실마리를 찾아 내지 못하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까.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권총수는 회사로 돌아왔고 맥보란의 얘기를 전해들은 오민철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다.

그 역시 비밀경호국 요원들의 능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정말이야? 이게 말이 돼?”

오민철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경호국 요원들은 씰 출신들과 또 다르다.

아주 엄격한 과정을 거쳐 선발되는 그야 말로 정예요원들이다.

“그래서 어떡하기로 했는데?”

“CIA 특수작전에 블랙잭의 참여.”

“참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짜리 계약이냐가 중요한 것 아냐?”

“향후 3년간 특수작전 80퍼센트를 우리 블랙잭이 맡는다는 조건이야.”

“80퍼센트?”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CIA의 일 년 예산은 아무도 모른다.

필요에 따라 수백억 달러는 언제든지 지출된다.

관심을 끄는 것은 CIA예산의 약 절반 가까이가 특수작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일 년에 백억 달러씩만 잡아도 3년이면 삼백억 달러?”

어마어마한 계약조건이다.

“사인했어?”

권총수는 빙긋 웃었다.

권총수의 얼굴에 걸린 미소의 의미는 무엇일까.

“장사 처음 해?”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더니 문을 열었다.

칼자루는 자신이 잡았다.

개인적인 친분과 공적 업무는 분명한 구별을 지어야 한다.

맥보란과는 이른바 미운정 고운정이 들었으나 CIA가 발주하는 전쟁사업과는 별개다.

“뭐야? 줄다리기가 필요하다?”

“줄다리기라고 까지 할 수는 없지만 쉽게 덤벼들 일도 아니지. 비밀 경호국 요원들이 눈뜨고 당했다면 위험도가 굉장히 높다는 의미니까.”

권총수는 창틀에 엉덩이를 기댔다.

“서둘 일은 아니야.”

권총수는 돌아서서 어두워 오는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어군의 마석춘은 바짝 긴장했다.

이제 겨우 명사들의 클럽처럼 브랜드화 되어 매출도 성장도 안정적이다.

어떤 불상사도 일어나면 안 된다.

일어나는 순간 애써 쌓아올린 어군이란 이름은 수직으로 추락할 것이다.

한 번 떨어진 가치는 좀체 다시 올릴 수 없다.

그래서 브랜드를 믿고 소비자들이 이용하는 것이다.

지배인들을 비롯해 많은 남녀 직원들 모두 평소와 달리 조금은 경직되어 있었다.

‘그 사람은 체면이고 뭐고 없다. 기분 나쁘면 지 맘대로 하는 저급한 놈이니까 절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고개를 숙이고 죄송합니다로 나갈 것’

마석춘이 내린 특급 밀명이다.

“도착, 모두 긴장할 것.”

문 앞에 있던 지배인이 재빨리 무전을 보낸다.

벤츠가 멎고 권악수와 원출도가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마사장은?”

“예약 손님들 안내중입니다.”

“지금 이 시국에 돈 버는 사람은 마사장뿐이야. 갑시다!”

지배인은 혹시라도 흠 잡힐까 걸음까지도 조심스러웠고 허리도 평소보다 더 숙였다.

별채로 사라지는 지배인을 바라보는 다른 직원들이 투덜거렸다.

“양아치도 아니고, 재벌 회장이라는 분이.”

연이어 고급 승용차들이 멈추면서 정장을 한 손님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별채 문을 열고 들어선 권악수가 멈칫했다.

권총수가 미리 도착해 혼자 참치 회를 먹고 있다.

권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권악수가 손을 내밀었다.

“손 한 번 잡아야죠.”

권총수는 빙긋 웃으며 악수를 했다.

“우리 이사님은 낮에 뵈었고.”

권총수는 원출도에게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자리에 앉은 권총수는 소주병을 들었다.

“한 잔 드리겠습니다.”

권총수는 두 손이다.

하지만 권악수는 한 손으로 술잔을 잡았다.

“회장...님!”

원출도가 그러면 안 된다고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권총수는 잔을 채워주고 소주병을 내렸다.

“드시죠!”

권총수는 자신의 소주잔을 들었다.

쨍!

건배를 하는데도 권악수는 자신의 잔을 더 높였다.

그걸 본 원출도를 순간적으로 눈을 감아 버렸다.

‘다 틀렸다’

한 가닥 희망까지 재가 되어 사라지는 느낌이다.

어떤 성격의 자리인지 오는 순간까지 입이 아프도록 설명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스스로를 낮춰야 하는 자리임을 강조했다.

물론 그런 걸 모르는 권악수가 아니다.

하지만 워낙 종잡을 수 없는데다 조금만 비위에 맞지 않으면 버럭 소릴 지르고 화를 낸다.

대화는 인내다.

그리고 겸손이 더해질 때 그 자리는 빛나는 것이다.

아무리 권총수가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讎)라 할지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

비록 현재는 대한민국 재계서열 1위기업의 총수이지만 자칫하면 갈기갈기 찢어질 위기에 처해있다.

고수일수록 고개를 숙일 줄 아는 법이라고 그토록 말했는데 지금 태도는 오만하기 그지없다.

상대 감정을 오히려 긁는 것이다.

대여섯 잔씩 술이 들어가면서 분위기는 처음보다 확실히 좋아졌다.

금방이라도 상을 엎고 폭발할 것 같던 권악수가 의외로 차분해진 것에 원출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권총수씨.”

뚝!

소주잔을 들어 올리던 권총수는 고개를 들었다.

예상 못한 호칭이다.

“당신과 난 물과 기름이지만 그래도 아버지라는 사람이 같아서 우리가 형제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부담스러우니까.”

권총수는 물끄러미 봤을 뿐이다.

그런데 뭐가 부담스럽다는 건가.

혼자 북치고 장구친다.

즉 자기 연출을 위한 행동인 것이다.

“천왕중공업을 어찌할 생각이오? 내 말은 경영을 할 것인지 회사를 구조조정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주가가 오르면 그때 팔아치워 차익을 챙기는 전형적인 M&A로 끝낼지 묻는 것입니다.”

“생각 중입니다.”

“이미 끝나버린 경기를 갖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해두고 싶습니다. 천왕그룹 절대 안 무너집니다.”

쭉!

권총수는 잔을 비웠다.

“권총수씨 말이 맞습니다. 내가 살인 교사했죠? 물론 그들이 권총수씨와 관련 있다는 생각까지는 미처 못 했습니다.”

권총수는 살며시 웃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 살인교사가 아무리 중범죄자라고 해도 한국 풍토에서 전관예우하는 변호사 십여 명 끼고 있으면 10년이면 맥시멈이죠. 더 밑으로 떨어졌으면 떨어졌지 올라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권총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경제 불안 운운하고, 총수가 공석인 기업이 과연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면서 언론이 집중적으로 여론 호도에 나서고 정치권에 압력을 넣으면 감형도 있고 경축일 특사도 있다.

특히 대한민국 법은 유난히 기업인들에게 약하다.

여론도 그렇다.

잘못을 했으면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국민들이 먼저 봐주자고 떠든다.

어느 정치인은 대한민국 법은 딱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는 말을 하면서 춤추는 법의 잣대를 야유했다.

“당신 똑똑한 줄 압니다. 하지만 명심하셔야 할 거요. 우리의 싸움은 이제 시작입니다. 노름꾼의 실력은 문지방 넘어갈 때 아는 것입니다.”

방안에서 아무리 돈을 따봤자 소용없다.

판을 끝내고 문을 나설 때의 주머니가 그 사람의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 월요일 날 검찰청 출두하고 길어야 일주일 안에 구속영장 떨어질 것입니다.”

권악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일어선 권총수에게 권악수가 손을 내민다.

척!

두 사람은 굳게 악수를 했다.

“십 년 후에 봅시다. 그전에도 볼 수 있으면 보는 것이고.”

권악수는 처음 보는 환한 웃음을 짓고 돌아섰다.

벤츠가 달린다.

조수석에 앉은 원출도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놀라운 행동이었다.

약간의 거친 흥분이 들어가긴 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좋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권악수가 아니었다.

그건 한 번 해보자는 승부사에 가까운 기질을 드러낸 것이다.

처음 두려울 만큼 우려했고 낙담했는데 깜짝 놀라는 반전을 보여 준 것이다.

“원이사!”

“예!”

상체를 뒤로 돌렸다.

“쳐낼 가지는 쳐내고, 버릴 카드는 버리세요. 원이사 말처럼 고름이 살 되는 것 아니니까.”

원출도의 눈이 커졌다.

“소주 한 병 마셨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취하는군.”

권악수는 고개를 뒤로 완전히 눕히며 눈을 감았다.

원출도는 금세 코까지 골며 곯아떨어진 권악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아직 안 늦었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권악수가 나가고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오민철이 들어섰다.

오민철은 같이 방에 있기를 원했으나 권총수가 막았다.

다른 뜻은 없었다.

비록 기우는 석양이라고 하지만 대한민국 재계서열 1위 천왕의 총수다.

어떤 모습이든 제3자가 있으면 불편할 것이라고 보았다.

오민철은 그런 인간은 마주 앉아서 실컷 비웃어 줘야 한다면서 참석을 원했지만 권총수는 여긴 조롱하고 비아냥하기 위해 만들어진 좌석이 아니라면서 막았다.

“어떻게 됐어? 얼이 빠져 나가는 것 같던데.”

숨어 지켜본 모양이었다.

권총수는 소주잔을 비웠다.

젓가락으로 남은 참치 회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이제 가야지.”

권총수가 아무런 대답 없이 일어서자 오민철의 눈이 좁혀졌다.

권총수의 얼굴에서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승자의 여유를 넘치도록 담고 있는 얼굴이 아니다.

눈치 빠른 오민철은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예상과는 빗나간 자리였다는 걸 유추하면서 뒤를 따라 나갔다.

권총수는 일체 말이 없다.

운전을 하는 오민철은 조수석의 권총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권총수가 핸드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채이사님, 긴장하셔야겠습니다. 예전의 권악수가 아닙니다. 대충 공격했다간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할 카운터에 걸릴 수 있겠습니다.”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공격 하는데 좀 더 신중을 기해주세요.”

전화를 끊었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어?”

걔, 그 인간, 그 자식, 대책 없는 놈이라는 것이 권악수에 대한 오민철의 호칭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은 오늘 저녁 두 사람 사이에 예상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나 상황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다.

“뭐라고 한 줄 알아?”

권총수는 권악수가 했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얘기를 들은 오민철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 봐왔던 권악수라면 절대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다.

“변한 모양인데, 그래봤자 말이 십년이지 주인이 영어(囹圄)에 갇힌 몸이 된 회사가 온전하게 굴러갈 수 있을까.”

“작은 배는 흔들려도 워낙 큰 배는 항해하는 데는 문제없다고 봐야지.”

“담금질이 됐단 말인데.”

오민철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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