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느리게, 아주(2)
어떻게 해야 5시간에 목표거리 100미터를 갈 수 있을까.
단순히 전진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적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
권총수는 주위 동기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땅바닥에 엎드리긴 했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갈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움직이면 굼벵이 일지라도 100미터를 돌파하는데 30분이면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팟!
돌연 권총수의 눈이 빛났다.
뭔가 떠올랐다.
주위를 살피던 권총수는 풀과 나뭇가지를 꺾어 위장을 했다.
정글 속이니만큼 일단 주위 색으로 변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이 든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훈련과정을 통제하던 뒤고개 상사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나중 훈련이 끝났을 때 뒤고개 상사는 그날 권총수의 행동을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훈련 4개월 차에 접어들면 그때부터 모든 대원들은 기계가 된다.
교관의 명령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철저히 길들여지다 보니 어떤 응용력을 떠올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오직 시키는 것만 한다.
그런데 권총수 단 한 명만이 주위의 색과 자신을 일치시키기 위해 위장을 했다.
비록 전문가의 눈에는 위장은 엉성했지만 같은 환경인데도 다른 대원들은 그냥 엎드려 100미터를 어떻게 5시간 동안 가야할까 고민만 했을 뿐 위장은 없었다.
난 거기서 그의 타고난 능력을 보았다.
그건 본능이었다.’
후다닥!
그제서야 다른 대원들도 위장을 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위장으로 자신을 감춘 대원들은 100미터를 다섯 시간 동안 전진하기 위한 죽음의 레이스를 시작했다.
습도 78프로, 한낮 기온 섭씨 33도, 열대 우림 속 그늘이라고 하지만 비닐하우스에 들어온 듯 숨이 턱 막힌다.
더구나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섭씨 50도 사막이 숨쉬기 편한 이유는 낮은 습도 때문이라는 말이 이제 이해가 되었다.
금세 목이 타고 입술이 바짝 말라온다.
‘어떻게 가지’
고개를 약간만 들면 100미터 골인 지점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데 무슨 재주로 다섯 시간을 걸려 간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할까.
적은 쌍심지를 켜고 이쪽을 살피고 있을 것이다.
느리게, 그리고 주위 지형이나 지물 속으로 내 자신을 던져 넣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굼벵이.
나무늘보.
달팽이.
불가사리.
나름대로 느린 곤충이나 동물로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백 미터 다섯 시간
무조건 그들보다 더 느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으헉!”
바로 그때 어디선가 비명이 들려왔다.
“억! 어어억!”
“아웃!”
바로 그 순간 교관의 목소리가 정글을 울렸다.
또 한 명의 탈락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로 소릴 질러 탈락한 것일까
50센티쯤 나아갔을 때 권총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느낌이 이상하다.
권총수는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가 소스라쳤다.
‘헐!’
하마터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흰개미’
엄청난 흰개미가 허리에서부터 온몸을 덮기 시작했다.
권총수가 아는 흰개미에 대한 지식이라고는 죽은 나무를 갉아 먹고 산다는 것이었다.
‘설마 독을 품고 있는 건 아니겠지’
몸의 움직임이 클수록 적의 관측병에 발각된다고 볼 때 죽은 나무 역할에 충실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제발!’
이를 깨물었다.
조금 전 비명을 질렀던 대원의 상황이 그려졌다.
‘으으으’
마침내 흰 개미들이 옷 사이를 비집고 몸속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렵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마치 강아지풀로 옆구리를 살살 건드리는 것처럼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아으으으’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맘대로 해라’
흰 개미에게 뜯겨 죽기로 했다.
그런데 살이 뜯기면 아파야 하는데 간지럽기만 했다.
누군가는 고문중에 가장 잔인한 것이 간지럼이라고 했다.
등이 가렵고, 목이 가렵고, 심지어 사타구니로 파고들었는지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두들겨 맞고 어딘가 부러지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았다.
전혀 예상 못 한 사태에 권총수는 이를 악물었다.
고1때 같은 보육원 동생이 맞고 들어왔다.
당연히 다음 날 중학교로 찾아가 때린 놈을 반 죽여 놨는데 사건이 커져 근처 파출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보호자로 원장 수녀가 왔는데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총수야!”
보육원 봉고차로 돌아오는 길에 고희를 앞둔 원장수녀가 잔잔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총수는 왜 그렇게 참을성이 없을꼬.”
“나만큼만 잘 참으라고 해요. 참았으니까 코피 정도로 끝냈지 성질대로 했다면 갠 죽었어요.”
“욕해도 참고, 비웃어도 참고, 놀려도 참고.”
“내가 예수님이에요. 난 못 참아요.”
“참는 것도 습관이란다. 자꾸 참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지 않게 되지.”
권총수는 눈을 빛냈다.
‘그래 어디 한 번 참아보자. 여기까지 왔는데 이판사판’
눈을 감았다.
아무 일 없는 듯 표정과 동작을 태연하게 가져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분도 지나지 않아 얼굴근육을 실룩거렸다.
개미 한 마리가 콧구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잘못하다간 재채기를 할 위험이 있다.
팟!
권총수는 눈을 빛냈다.
재빨리 대력금강심법을 운용했다.
외인부대에서부터 지금까지 몇 번의 탈락 위기가 있었다.
그때마다 대력금강심법은 살얼음 같은 위기를 벗어나게 해주었다.
공공선사는 얻기(得)위해서는 반드시 고통이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합격을 위한 이 아픔, 이 간지러움, 돌아 버릴 것 같은 짜증 역시 때가 되면 지나갈 것이다.
‘파팟!’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간지럼이 조금씩 사라진다’
심법을 운용하자 내공이 전신 삼백예순다섯 곳의 요혈을 지나면서 온몸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한순간 간지럽던 몸이 잠잠해졌다.
생각이 없으면 존재도 없다.
무상무공(無想無空).
심법을 운용하자 마음이 평정을 찾았고 마음이 안정되면서 육신이 고요함을 얻은 것이다.
‘완전대박’
흐뭇한 표정으로 앞을 보던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자기 딴에는 미치도록 느리게 온다고 했는데 어느새 100미터 표식을 알리는 깃발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슬쩍 팔목시계를 보던 권총수의 눈이 커졌다.
이제 겨우 40분 지난 것이다.
목표인 다섯 시간을 채우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거의 가지 않고 있었다는 표현을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머뭇거렸는데 고작 40분 밖에 안 걸렸다는 것에 앞이 캄캄했다.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움직이지 않지만 반드시 가야 한다.
가고 있지만 가지 않는 바위처럼 되어야 한다.
살아 있지만 죽은 듯 보이고, 이동하지만 주위 지형이나 지물로 보여야 한다.
굼벵이는 빠르다.
나무늘보도 빠르다.
달팽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달리기를 잘한다.
인도대륙이 1년에 아시아 대륙 쪽으로 5센티미터씩 움직이는 것보다 더 느려야 한다.
권총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다.
‘코고는 소리. 설마!’
어디선가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느리게 가려다 보니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잠을 불러 온 모양이었다.
“와이티 대원 아웃!‘
숲속을 쩌렁하게 울리는 교관의 외침이 있었다.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엄중한 훈련와중에 잠이 든다는 것, 그만큼 느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대원들은 졸음과도 싸워야 했다.
물론 전쟁 중이라면 조는 저격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실전처럼 마음을 다잡아도 훈련은 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