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이제 나도 제작사 대표(3)
양호민 감독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사이즈가 좀 되는 작품인데 하려고 할까요? 장 감독이 회사를 차린지 얼마 안 됐을거 아닙니까? 장동훈 감독이 제작사를 차린걸 지금 알았을 정도면 아직 첫 작품도 시작하지 않았을 정도로 신생회사인데... 믿고 맡길 수 있겠어요?”
그녀도 양 감독의 말을 인정하는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 감독님의 말을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제가 감독님이라도 불안할 테니까요. 그런데 현실을 보세요. 솔직히 장동훈 감독이 이번에 상당한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를 성공시키면서 투자사들의 분위기가 괜찮아졌다고는 해도 90억은 큰돈이에요. 그리고 심지어 아직 캐스팅도 안 됐다는 거잖아요.”
“제작사도 안 정해졌는데 어떻게 내 마음대로 캐스팅을 합니까? 캐스팅은 제작사가 정해지면...”
“하아... 알겠어요. 솔직하게 제작사로서의 입장을 말씀드릴게요. 솔직히 불안해요. 90억이면 우리처럼 중소형 제작사가 쉽게 달려들 수 없어요. 그 정도 사이즈 영화 한번 잘못되면 중소형 제작사는 그냥 아웃이거든요.”
“그럼 하나 물어봅시다. 도대체 장동훈 감독은 어떻게 영화를 만든 겁니까?”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휴, 그건 그 제작사 대표가 이상한거예요. 코딱지만한 회사가 무슨 깡으로 그랬는지... 이재현이 붙어서 투자는 쉽게 이루어졌지만 그거 망했을 때 이재현이 회사 부채 감당해주나요?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아요. 만들고 나서 성공시키는게 어려워서 그렇지.”
양 감독은 여자의 말이 맞는걸 알고 있으면서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간만 보면서 이리저리 빼니까 좋은 영화가 안 만들어지는 거 아닙니까?”
양 감독의 말이 여자의 귀에 거슬렸나 보다.
여자는 지금까지의 미안했던 태도를 싹 버리고 싸늘한 기운을 풍기며 말했다.
“감독님, 죄송하지만 그건 조금 아닌 것 같네요. 돈 안 되는 작품이라도 어떻게든 만들어 드리려고 이곳저곳에서 돈 끌어와 만들어 드린게 두 작품이나 되는데 벌써 잊으셨어요?”
“그건 알지만...”
“남들은 해외 판매가 좋다 어쩐다 하지만 그거 따낼라고 저 10시 전에 집에 들어가 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언제 저한테 고맙다고 밥이라도 사주셨어요?”
양호민 감독은 부끄러운지 시선을 돌렸다.
“미안합니다. 고마운 걸 알면서도 제대로 표현을 못 했네요. 제가 언제 밥이나...”
“됐어요. 제가 밥 얻어먹을 곳 없어서 그런가요? 성의를 말한 거였어요. 어쨌든 제작사 입장도 고려해 주세요. 감독님은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제작사는 이렇게 큰 프로젝트 한 번 실패하면 그때부터는 채권자들과 지옥을 걷게 된단 말이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말이 없는지라 결국 양 감독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알겠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너무 섭섭하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아까 말씀드렸던거 생각해보세요. 어쩌면 양 감독님 생각과는 다르게 받아 들여질수도 있으니까.”
양호민 감독은 여전히 의구심이 가득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정말 진심으로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저도 몰라요. 단지 거기 제작 피디님이 저랑 친하거든요. 근데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장동훈 감독하고 손잡아서 세운게 그 회사에요. 엄청난 포부와 장대한 미래를 꿈꾸고 있던데 솔직히 가능성이 있어보이진 않지만 걔 능력 하나는 출중하고 헛소리는 안 하는 친구에요. 만약 제가 감독님이라면 그냥 한 번 가보겠어요. 설마 장동훈 감독이 선배를 문전박대야 하겠어요?”
“문전박대보다 실실 웃으면서 거절하는게 더 기분 나쁜 겁니다.”
“뭐, 그거나 그거나... 감독님 좋을대로 하세요. 더이상 못 도와드려서 죄송해요.”
양호민 감독은 깊은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도움 많이 됐습니다.”
“언제 감독님하고 또 작업하게 될 날을 기대할게요.”
양 감독은 다시금 화사한 미소를 보이는 그녀와 악수를 나누곤 쫓기는 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가게를 나가는 그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에는 응원의 빛이 담겨 있었다.
*
파라곤 파트너스의 조윤혁 실장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재작년부터 후배가 진행해왔던 애니메이션 하나를 얼마 전 개봉시켰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흥행부진을 겪었기 때문이다.
아마 후배의 이름만으로도 믿고 보는 팬덤이 아니었다면 크게 손해를 볼 뻔했다.
애니메이션은 수많은 인력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드는 것이기에 한 번 실패하면 타격이 컸다.
그래서 후배는 요즘 식음을 전폐하고 술만 마신다고 하던데 오늘은 아침부터 그것 때문에 위에서 작품 보는 눈이 떨어진 거냐며 한 소리를 듣는 지경에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그때, 포털사이트 대문에 올라온 연예기사 중 한 칼럼이 눈에 띄였다.
[전에 없던 영화 흥행, 한국 영화의 봄은 오는가?]
“흠...”
조윤혁 실장은 천천히 칼럼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과 헐리우드 영화에 밀려있던 한국영화는 일년에 한 두 번,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등장이나 몇몇 스타감독의 영화만 가끔 스크린의 절반 이상의 자리를 침범하곤 했다. 그런데 그 역할을 주로 해왔던 감독들 외에 새로운 감독의 등장으로 영화계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 오르고 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장동훈 감독이다. 장동훈 감독은 6급 공무원으로 영화계에 데뷔를 했는데...]
한참 동안 칼럼을 살펴보던 조윤혁 실장은 다 읽고 나서 의자 등받이에 뒤로 한껏 젖혀 기대곤 상념에 잠겼다.
그렇게 십여분을 넘게 눈을 감고 있는 보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잠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할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 빌어먹을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지 고심하던 그는 책상 서랍에서 서류 하나를 던지듯 꺼내놓았다.
그리고 인터폰으로 직원 한 명을 호출했다.
“경록이 들어와 봐.”
잠시 후 마치 모델처럼 키 크고 늘씬하며 잘 생긴 청년이 들어섰다.
그는 조윤혁 실장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앞에 정자세로 앉았다.
“부르셨습니까?”
“내가 아침에 어디 다녀왔는지 알지?”
“네, 전무님 실에 다녀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 들었을 것 같아?”
경록이라는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투자 실패에 대한 책망을 들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건 당연한거고. 또?”
“손해를 메꿀 방법을 찾으라는 말씀도 들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 사실 혼나고 마는 거면 내가 널 찾을 이유도 없겠지. 네 생각을 말해봐. 어떻게 해야 회사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을까?”
경록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한 다음 입을 열었다.
“단기적인 수익 창출을 목표로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장기적인 수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둘 다 말해봐.”
“음... 전 단기적인 방법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좋은 작품을 잘 골라서 투자하는 방법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데 사실 전 영화를 보는 눈이 없으니까 그런건 저보다 실장님이 훨씬 좋으셔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솔직하군. 그럼 장기적인 방법은?”
“우선 우리 파라곤 파트너스의 주된 투자처는 애니메이션입니다. 애니메이션은 흥행의 기복을 덜 타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서 안정적인 투자처이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죠. 그런데 흥행력이 들쭉날쭉한 상업영화가 스크린을 장악하기 시작하면 회사는 리스크 관리가 상당히 어려워질 겁니다.”
조윤혁 실장은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래서?”
“흥행 감각이 있는 감독을 계속해서 지원해주던가, 아니면 반대로 밟아버려서 다시는 연출봉을 잡을 수 없도록 하는 방법. 이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조 실장은 피식 웃었다.
“야 이새끼야. 우리가 무슨 조폭이냐?”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실제로 밟는다는게 아니라 비유였습니다. 비유... 그러니까 그 감독이 작품을 내놓을때마다 더 압도적인 작품으로 찍어 눌러서 스크린을 확보하지 못하게 하면 흥행에 한계가 있을 것이고 그럼 자연스럽게 투자금을 건지지 못한 투자자가 그 감독의 작품을 투자하기 꺼려할 겁니다.”
“그러니까 투자자들로부터 고립시키자?”
“우리나라가 일본이나 중국, 미국처럼 시장이 크면 모르겠지만 인구수의 한계로 기간당 국내 관객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국내 상업영화의 언어적, 문화적 한계상 타국에서 천만 이상의 대박 흥행을 낸다는 건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일이잖습니까?”
“그렇지. 해외판매가 잘 된다고 해봤자 그 수익분배는 국내 관객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도 하고...”
“그럼 아무리 잘 만든 영화라고 해도 스크린 수만 꽉 잡고 있으면 결국 영화는 제풀에 지쳐 내려갈겁니다. 한 번은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두 번, 세 번이 반복되면 그 감독에게 투자하겠다는 투자자는 줄어들고 감독도 연출의 자신감이 떨어질 겁니다.”
경록을 빤히 바라보던 조윤혁 실장은 급기야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큭... 이거 아주 웃긴 놈이네. 크크크...”
한동안 배를 잡고 웃어대던 조 실장은 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했다.
“넌 어떤게 마음에 드냐?”
“전 아무거나...”
“아무거나 같은 소리하네. 선택해. 뭐가 더 좋아 보이냐고?”
조 실장의 압박에 경록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흥행할 영화를 고르는 건 제가 자신 있는 일이 아닌지라...”
“그럼 흥행할 애니메이션은 잘 고를 수 있고?”
경록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그려졌다.
“그건 제 장기이지 말입니다.”
“새끼... 알았어. 가봐.”
조 실장이 나가라고 하자 그는 벌떡 일어서서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경록이 나간 후 조 실장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도한결 감독이랑 한태주 감독 다음 작품에 대해 알아봐. 어떤 내용이고 현재 어디까지 진행됐으며 캐스팅은 누굴 준비하고 있는지 말이야. 가능하면 개봉 시기를 언제 잡고 있는지도. 아, 장동훈 감독도 빼놓지 말고. 그래, 요즘 장동훈 감독이 제일 유명하잖아. 그래그래. 왜 알아보냐고? 뻔하거잖아. 투자를 위한 거지. 그래.”
*
동훈의 사무실인 DH미디어 현관 앞에는 커다란 개점 화환을 배달온 인부들 때문에 소란스러웠다.
“이건 어디다 둘까요?”
“저기 저쪽 구석에 놔주세요. 꽃 꺾어지지 않게 조심해주시고요. 조심조심...”
유 팀장이 인부들을 지휘(?)하는 걸 보면서 물었다.
“누가 보낸거래요?”
“한국영화협회요. 원래 이렇게 제작사가 오픈하면 거기서 개점화환 보내주거든요.”
“어쩐지... 누가 보낼 사람이 없다 했는데.”
“하하, 그래도 사무실에 이렇게 꽃이 들어오니까 화사하죠?”
“네. 확실히 분위기가 사네요. 그게 들어오고 나니까 그 전 사무실이 칙칙해 보이기까지 한 대요?”
“역시 감독님이라 그런지 감수성이 풍부하시네. 그래서 먹고 싶은것도 많겠어요?”
“점심 먹으러 가잔 소리죠?”
“하하하! 눈치도 빠르셔.”
그렇게 농담을 나누며 식사를 하러 나가려는데 다시금 현관에서 누가 지그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크흠...”
“어? 양 감독님!”
동훈은 순간적으로 상대를 몰라 봤었지만, 유지은 팀장은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제야 동훈도 상대방의 신분을 알았고 얼른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장동훈입니다. 여기 어쩐 일로...”
“어, 그래. 반갑다. 전에 영화인의 밤에서 한 번 봤었지?”
당시 아주 잠깐 스치듯이 인사하면서 지나갔었는데 그걸 기억했나보다.
“네. 감독님 팬입니다.”
팬이라는 소리가 기껍게 들렸는지 굳어있던 그의 표정이 풀어진다.
“일단 들어오세요. 서 있지 마시고.”
“그래.”
그의 옆구리에는 노란 종이 봉투가 끼어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그가 여기 찾아온 목적을 알았다.
역시나 그는 소파에 앉자마자 단호히 자신의 목적을 털어놓았다.
“나 작품 하나 할 건데 좀 도와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