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이제 나도 제작사 대표(2)
그래, 그거였다.
아무리 김영웅 감독이 영화감독이었다지만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지 않는 이상 연예기사를 꾸준히 보며 배우들의 연기력과 이미지를 체크하는 건 당연했다.
또한, 김영웅 감독은 재밌는 드라마는 꾸준히 챙겨볼 만큼 드라마 쪽에도 관심이 많았다.
영화에 비하면 초장편이라고 할 수 있는 드라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영감도 있었지만 순수하게 지루하고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데 그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당대에 많은 화제가 됐거나 인상이 깊었던 작품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 ‘윤비서가 왜 이럴까’는 김영웅 감독도 재밌게 봤었던 작품중에 하나였다.
“아...”
동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 팀장이 물어본다.
“감독님도 아시는 웹툰이에요?”
“아, 네. 본 적 있어요. 재밌던데요?”
사실 다른 로맨스 웹툰은 꽤 봤는데 아직 그 웹툰은 보지 않았다.
“어머, 감독님도 로맨스 웹툰 보시나 봐요?”
“가끔 보죠. 심심할 때. 로맨스 쪽도 봐야 우리도 연출을 할 때 뭘 참고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남자들은 로맨스 부분이 부족하잖아요. 종종 그쪽으로 굉장히 섬세한 남자 감독들이 있긴 한데 그건 정말 축복받은 능력인 것 같아요.”
“하긴... 아무리 예술가라고 해도 그쪽으로 잘 그려내는 남자감독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어쨌든 그래서 그 제작사는 지금 영화 아예 엎어질까봐 노심초사하는 중이에요.”
“안 됐네요. 잘 됐으면 좋겠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다양한 작품활동을 하는게 회사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제작해야 소속 직원들과 촬영 스태프들이 노하우가 쌓이고 급여가 올라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동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혹시...”
“네?”
“이건 정말 혹시나 해서 말하는건데요.”
“네. 말씀하세요.”
“혹시 그 웹툰 기반 드라마가 제작이 안 되고 이후에 2차 저작품 판권 계약이 체결 안 되면 그때 우리가 판권 사는 걸 한번 알아보세요.”
“어? 드라마 제작도 생각하세요?”
“꼭 드라마가 아니라고 해도 영화도 생각할 수 있고... 드라마는 만들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렇긴 하죠. 아니, 드라마도 같이 만들면 회사 입장에서는 현금 유동성도 그렇고 훨씬 많은 도움이 될걸요? 그리고 더 많은 촬영 스탭이 몰려들거예요. 안정적인 일거리가 꾸준히 생기니까.”
“그래서요. 그리고 꼭 그 작품이 아니라고 해도 괜찮은 웹툰이나 웹소설이 있으면 2차 판권 사는걸 생각해보자구요.”
“오오... 저희도 이제 대형 제작사 준비를 해나가는 건가요?”
“아니 뭐 천천히 생각해보자는거죠.”
“그런데 전 작품 보는 안목은 전혀 없어요. 대신 요즘 핫하다거나 제가 봤을 때 재밌는 작품이 있으면 추천해 드릴테니까 한번 보세요. 아참, 오늘내로 영화 세상에서 러닝게런티 입금 될 거예요.”
“정산 다 끝났대요? 회사 나왔으면서 잘 아시네?”
“일정이 그렇게 잡혀 있었으니까요. 7백만을 넘긴 것치곤 아마 감독님 성에는 안 차게 들어올 거라는 거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후... 알고 있습니다. 흥행수익 대비 0.5%인데 천만이 넘는다고 해도 아주 큰 돈이 되진 않겠죠.”
“앞으로 영화 제작한 걸로 돈 많이 버시면 되죠.”
“그래야죠.”
*
박만구 대표는 회의실에서 담배를 뻑뻑 피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얼마라고?”
앞에 있던 오 상무가 박 대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러닝게런티와 특별수당 보너스까지해서 2천7백만 원입니다.”
“하... 졸라 아깝네. 내가 진짜 안 챙겨주려고 했는데 다음 작품도 같이 하려고 넣어 줬더니 뒤통수를 때려? 아후... 그리고 유지은 걔는 뭐야?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뛴다더니 딱 그짝 아니야?”
“머리가 어떻게 된 거죠. 지가 거기 가면 대박이라도 날 줄 알았나 봅니다. 꼴랑 제작 피디 주제에 지가 감독이라도 되는 줄 아나...”
“하여튼 걔 없으니까 누구 빨리 들여놔야 할 거 아니야? 지금 걔가 나간지 언젠데 아직까지 자리를 비워놔?”
“아, 네. 지금 공고 내고 계속 면접을 보고 있는데 유 팀장 만큼 경력있는 애가 없어서요.”
“유 팀장은 얼어죽을... 유지은이라고 해!”
“아, 네. 알겠습니다. 유지은 정도 경력 가지고 있는 애가 많지 않아서 조금 시간은 걸리는데 금방 찾을 겁니다. 150 준다고 해도 계속 면접 문의가 오는데 유지은이가 받았던 연봉으로해서 170 정도로 올려놓으면 경력 있는 친구들이 떼로 몰려올 겁니다.”
“170이나 줘야해? 유지은이도 여기서 3년만에 170을 받았잖아? 그냥 160으로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 앞으로 사이즈가 좀 있는 작품으로 진행을 해야겠어. 아따, 내가 이번에 사이즈가 큰 작품 한다고 얼마나 후달렸는지 알지?”
“그럼요. 대표님께서 얼마나 노심초사 하셨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모르면 바보게요?”
“내가 증말 힘들었어. 그런데 이렇게 영화가 크게 히트를 치니까 돈 들어오는게 달라. 돌멩이 백날 천날 굴려봐야 코앞인데 바위 한번 굴리니까 그냥 산 밑에 와 있는거지. 배급사에서 정산 들어온거 보니까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간다. 다들 이렇게 해서 돈 버는 거야.”
“맞습니다. 지금까지 대표님이랑 저랑 얼마나 고생이 심했습니까? 이제 대작 가능한 걸로 몇 개 추려보겠습니다.”
박만구 대표는 흡족한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어느 감독이 괜찮아?”
“아무래도 양호민 감독이나 민경욱 감독이 괜찮지 않겠습니까? 양호민 감독 같은 경우는 얼마 전에 시나리오 가지고 충무로를 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너도 봤어? 그거?”
“우리 회사로 오질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유지은이면 온갖 시나리오 다 찾아다녔었기 때문에 좀 알텐데... 한번 물어볼까요?”
“에이 씨, 거기에 왜 또 유지은이가 나와? 나 걔랑 엮이는거 싫어.”
박만구 대표는 질색을 했지만 오 상무는 쉽게 물러서지 않고 그를 설득했다.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아직 우리 회사가 다른 대형 제작사들에 비해 조금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막상 양호민 감독 불러놓고 시나리오가 우리랑 생각했던거와 다르니 할 수 없다고 하면 앞으로 양호민 감독이랑 같이 하기가 조금 거시기하지 않을까요?”
박 대표도 그건 수긍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양호민 감독이 신인 감독도 아닌데 불러놓고 지지부진하면 실망하겠지.”
“맞습니다. 아무리 유명 감독이고 스타라고 하지만 다 사람 아닙니까. 속이 밴댕이보다 더 조그만 사람도 천지인데 양호민 감독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죠.”
“하긴... 장동훈이 봐봐. 내가 간이고 쓸게고 다 빼줬는데 어떻게 나왔어? 나처럼 대범한 사람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아? 사람 다룰때는 살얼음 걷듯 조심스러운게 맞아. 그래. 우리가 연락한다고 지가 어쩔거야? 연락해봐서 시나리오 어땠고 주변 반응이 어땠는지 한번 물어봐. 그래서 괜찮으면 양 감독에게 컨택하고.”
“네. 아무리 우리 회사에서 나갔기로서니 회사에 받은게 얼만데 모른척하진 않을 겁니다.”
“그래, 얼른 물어보고, 음... 저기 뭐시냐, 오 상무도 이제 차 좀 바꾸자. 법인명의로 끌고 다니는데 소나타가 뭐야. 내가 체면이 안 서.”
오 상무는 이게 웬 떡이냐는 듯 화색이 되며 물었다.
“그럼 어떤걸로...”
“지방도 다니고 해야 하니까 중후하면서도 좀 날렵한게 좋잖아? 그랜져로 해.”
박 대표는 자신이 통 큰 결정을 했다는 듯 큰소리를 쳤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어, 그래. 나가봐.”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온 오 상무는 표정을 일그러뜨리고는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쫌생이 같으니라고... 지는 벤츠 S클래스를 리스해놓고 난 그랜져? 중후하면서 날렵해? 아우...”
*
한참 트리트먼트를 수정하던 그때 유 팀장이 후다닥 달려왔다.
“감독님, 감독님!”
“왜요?”
“아하하하! 아, 웃겨. 방금 누구한테 전화왔는지 아세요?”
“누군데요?”
“오 상무요. 영화 세상 오상진 상무.”
“오상진 상무가 왜 유 팀장한테 전화했대요?”
“아니 글쎄... 요즘 양호민 감독이 충무로에 시나리오를 가지고 제안을 하러 다니거든요. 그걸 알고는 나한테 물어보더라구요. 시나리오가 어떻고 주변 반응이 어땠냐구요.”
“양호민 감독이면 거의 준 스타급 감독님인데... 거의 공포영화만 만들지 않나요?”
“그렇죠. 그러다 말아드신게 몇 개 있으신데 그래도 손익분기점을 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국내 흥행은 그렇게 좋지 않은데 공포영화는 해외판매가 좋은 것들이 대부분이라 거의 손해를 보진 않아서 투자자들도 양 감독님을 괜찮게 생각하고 있어요. 항상 제작비를 조금씩 넘긴 수준이라고 해야 하나? 그와 상관없이 인지도는 상당한 감독님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래서요?”
“제가 그 시나리오를 봐도 잘 모르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 애매했어요. 시나리오는 나쁘지 않은데 항상 하던 공포영화도 아니고 스케일도 커서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판단하기 애매하다? 뭐 그런 정도?”
“그렇게 말하니까 뭐래요?”
“그게 웃기는거예요. 반응을 보니까 말로는 그냥 알겠다고 하는데 느낌이 그걸 건드려보겠다는 것 같아요. 들리는 말로는 제작비가 최소 90억 정도라고 하던데 백억 다음에 90억 작품이라니 진짜 회사가 대범해진 것 같긴 해요.”
“전화로 대화해놓고 그걸 알아요?”
유 팀장은 너무 재미있는지 핸드폰으로 입을 가리며 실실 쪼갰다.
“흐흐흐... 오상진 상무 버릇이 있거든요. 거짓말할땐 큼큼 거리면서 코를 훔쳐요. 아까 딱 그랬어.”
그녀는 영화세상이 폭탄을 떠안는 것 같아 좋아했지만 동훈은 그 영화가 잘 되기를 바랐다.
박 대표와 싸우긴 했어도 사실 이곳에서 자신의 의견에 동의해주기란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성공할수록 영화 시장이 더 커질 것을 알기에 박 대표가 제작하는 영화라고 해도 성공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잘 됐으면 좋겠네요.”
“어? 정말요?”
“네. 양호민 감독님도 해외판매만 잘되지 말고 한국내에서도 잘 됐으면 좋겠어요.”
“에이... 그럼 재미 없는데... 뭐, 감독님 말씀도 일리가 있네요. 내가 너무 속좁게 굴었나 봐.”
“하하하, 아니에요.”
“에효, 속좁은 전 일이나 하러 가렵니다.”
*
한적한 커피숍, 짙은 뿔테 안경에 바짝 마르고 어딘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초조하게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혹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서도 다시금 자신의 시계를 보고 있어 누가 보더라도 사람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오래 기다리셨죠?”
그의 앞에 이십대 후반의 정장을 입은 여자가 털썩 자리에 앉았다.
“아닙니다. 어떻게 됐나요?”
여자는 미안한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우리회사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아...”
실망하는 남자.
여자는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양호민 감독님, 그러지 말고 다른 제작사를 찾아가보는게 어때요? 솔직히 우린 블록버스터 취급 잘 안하는거 알잖아요. 우리 대표님 스타일이 그래요. 돈 많이 드는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사를 찾아 정처없이 배회하는 이 남자가 바로 양호민 감독이었다.
“대형 제작사는 다 들러봤습니다.”
양호민 감독은 실망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여자는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장동훈 감독님 아시죠?”
“네? 당연히 알죠.”
“그 감독님이 제작사 차렸대요. 감독과 스탭을 위한 회사라나 뭐라나? 따지고 보면 감독님보다 한참 후배긴 한데 한번 찾아가보는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