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장동훈 사단(1)
황정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배가 남산만하게 부풀어 오른 그의 아내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빨래를 개며 물었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그녀는 언제나처럼 드라마 재방을 보며 시간을 보냈고 오늘처럼 간간히 남편이 들어온 날에는 같이 TV를 보는 게 삶의 낙이었다.
“어? 어... 내가 얼마 전에 오디션 하나 본다고 했잖아?”
“그랬지. 장... 뭐더라? 장 뭐시기 감독 작품 본다고 했었나? 왜? 혹시 거기서 전화 온 거야?”
드라마를 보며 무심결에 대답하던 그녀가 퍼뜩 상황을 파악하곤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어, 나 합격했다네?”
“정말? 정말 합격이래?”
“그렇다네? 허허허...”
정훈은 본인도 믿기지 않는지 전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웃고만 있었다.
아내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정훈을 와락 껴안았다.
“잘됐다! 너무 잘됐다!”
“그래, 잘됐어. 그런데 어떻게 날 뽑았지?”
“오빠가 연기를 잘했나 보지. 잘했어.”
정훈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아내의 등을 쓸어내리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슬기야, 잘 안 돼?”
고은숙 대표는 엄마처럼 자상한 얼굴로 슬기의 옆에 앉아 있었다.
“노력하고 있는데...”
“노력하는데 왜 안될까?”
“죄송합니다.”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 슬기의 눈에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고 대표는 그런 슬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슬기야, 울기만 해서는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어. 세상엔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이 없단다. 사람은 꼭 한계 상황에 부딪쳐야 겉으로 보이는 노력이 아닌 진짜 노력을 해서 난관을 타계하는 나쁜 버릇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난 우리 슬기가 그런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내 말이 틀렸니?”
“아, 아니요.”
“내가 너 꺼내준다고 들어간 돈이 얼만줄 알지?”
“네.”
“그럼 밥값을 해야지. 다시 걸그룹 할래? 가서 오타쿠들이랑 사진찍고 행사 뺑뺑이 돌다가 술자리 불려 다닐 거야?”
슬기는 황급히 고개를 들고는 절대 안 된다는 듯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닙니다.”
고 대표의 자상한 목소리는 어느새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럼 연기자가 돼야지. 내가 너 미니 주연 넣고 얼마나 기대했는데, 그걸 망쳤으면 이번이라도 잘해야 되는거 아니야? 언제까지 모기처럼 앵앵대고만 있을 거야!”
서릿발처럼 무서운 고 대표의 눈빛에 슬기는 얼어붙어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
“가서 네 몸값을 증명하고 와. 그렇지 않으면 난 너와 계약을 유지할 수 없어. 알겠니?”
“잘 아, 알겠습니다.”
“그래야지. 난 너 믿어. 부디 내 눈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게 만들지 마.”
고 대표는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슬기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쓸어내려준 후 자리를 떴다.
윤슬기는 작고 고운 두 손으로 치마를 꼭 쥐었다.
파르르 떨리는 두 주먹이 얼마나 그녀가 분노하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
세연은 기뻐서 방안을 방방 뛰고 있는 은정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좋아?”
“언니는 처음 연기하게 됐을 때 안 좋았어?”
“솔직히 기쁘다기보다 어떻게 하면 욕먹지 않을지 걱정했지. 촬영장에 가면 날 잡아먹을 듯 바라보는 임현주에게 어떻게 잡혀 먹히지 않을지 고민해야 했고. 잘 끝나고 나서는 조금 기쁘긴 했어.”
은정은 그런 세연을 보며 콧방귀를 끼었다.
“흥! 웃기고 있네. 내가 언니를 몰라? 좋으면서도 티를 안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눈에 훤한데? 그리고 임현주한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아니아니, 언니는 임현주를 어떻게 하면 잡아먹을까 궁리했을걸? 언니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이거 왜 이래?”
“이제 머리 컸다고 꼬박꼬박 말대꾸 하는 거 봐.”
“나 이제 돈 벌게 됐잖아. 이제는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거야.”
“언제는 못 하고 살았니?”
“조금... 그랬던 면이 있기야 하지. 아, 소속사에서 일거리는 잡아 줬어?”
신세연은 침대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말했다.
“드라마 조연으로 캐스팅 될 것 같아.”
“오오! 어느 드라마? 작가가 누군데?”
“박현영 작가.”
“대박! 박현영 작가면... 어? 그거 임현주가 여주 아니야?”
은정이 눈을 크게 뜨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
“소속사에 얘기 안 했어?”
“했지. 어쩔 수 없었어. 오빠가 투자한 드라마라서 꼭 들어가자고 했거든.”
“하아... 그 남친 정말 답이 없네.”
“너,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할래?”
“아냐, 이제 말 안 할게. 나 이제 언니 일에 신경 안 쓰기로 했어. 그리고 나 이번 주부터 연기학원 가.”
“잘 알아보고 다니는 거야?”
“응, 장동훈 감독님이 연기학원 연락처 문자로 보내주셨어.”
“싸게 해주신데?”
“아니, 그냥 여기가 괜찮대.”
은정은 굳은 얼굴로 바라보는 세연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이제 행복하자. 난 언니 응원할 테니까 언니도 나 응원해줘. 걱정은 그만하고. 알겠지?”
“그래. 알았어. 그럴게.”
그렇게 자매는 오랜만에 웃는 얼굴로 서로를 안았다.
*
주연배우인 이현재까지 무사히 캐스팅이 마무리되자 투자는 순식간에 끌어모을 수 있었다.
오로지 이현재 하나 만으로 80억에 달하는 제작비를 투자받는데 성공했고 윤슬기를 통해 약 20억원 정도의 제작비를 추가로 투자받을 수 있었다.
투자를 받고 나서 동훈은 연출부 외 촬영, 조명, 미술 등 각 스태프를 자신의 손으로 꾸려야 했다.
“현재 여러 스태프들을 알아봤는데 딱 스케줄이 되는 촬영감독이 바로 전에 같이 하셨던 오동철 촬영감독님이세요. 마침 바로 앞 카페에 계시기도 하셔서 일단 사무실로 불렀...”
동훈은 유지은 팀장의 말을 끊었다.
“아뇨, 전 오 감독님과 같이 할 생각이 없는데요?”
“네? 아니 왜... 오동철 감독님과 전에 의견다툼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는데 그래도 오 감독님처럼 실력있는 분 많지 않아요. 그리고 나중에 두 분 화해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화해는 개뿔... 촬영이 끝난 이후에 전화 연락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유지은 팀장한테는 전화로 자신과 다 화해하고 묵은 감정이 없다는 식으로 썰을 풀었나 보다.
“화해 했다고 하던가요? 전 촬영 끝나고 본 적도 없는데?”
“어머, 죄송해요. 전 그런 줄 알고...”
지금쯤 후회를 하고 있을까?
당시 현장에서 그렇게 욕을 했는데 결과가 너무 좋으니 결과적으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자존심상 지금까지 미안하다고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미안하다고 할 생각이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웃긴게 사무실 근처 카페에 있으면서 언제 자기를 불러줄까 기다리고 있다고 잽싸게 달려온다는 것도 참...
“그리고 화해를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오동철 감독님은 저랑 맞지 않아요. 자존심이 쎄고 본인의 스타일을 고집하시거든요. 그렇다고 색감이나 카메라워크가 좋은 것도 아니고...”
남들은 ‘6급 공무원’이 너무 잘 나와서 칭찬들을 많이 했지만 사실 동훈은 영상미가 부족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원작에 비해 어느 부분이 부족한 가를 생각했는데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원작에 비해 부족했던 게 아니라 자신의 수준에 비해 부족했던 것임을 알았다.
실제 원작은 김영웅 감독이 죽기 10년도 더 전에 나온 작품이었으니 이 작품을 똑같이 부활시켜놨을 때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던 거다.
그 부족한 영상미를 조금이라도 보완해줄 수 있는 촬영감독을 찾아야 했다.
“그럼 누구를 생각하고 계세요?”
“강현수 감독님 요즘 일 있대요?”
“강현수 촬영감독님이요? 강현수... 아! 얼마 전에 촬영 끝냈다던 ‘사랑하는 그대와’라는 작품 했던 그 촬영감독 말하는 거죠?”
“맞아요.”
강현수 촬영감독에 대해 처음 알게 된건 한범석 감독과 일을 하고 난 뒤 두 번째로 상업영화인 ‘그녀의 왕자님’이라는 로맨틱 코메디 영화를 할 때였다.
영화계 엘리트 코스를 밟고 올라온 그는 항상 어딘가 표정이 어두웠고 대화도 많지 않았는데 유독 감독과 다툼이 잦았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 작품을 많이 하지 않았고 아웃사이더 같은 성향 탓에 이 바닥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글쎄요. 일단 한 번 알아볼게요. 그런데 제가 잘 모른다는 건 경력이 많지 않다는 건데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흠... 일단 알았어요. 그리고...”
임지은 팀장이 대화를 이어가려는데 바깥에서 웅성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 오동철 촬영감독이다.
유 팀장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고 동훈도 뒤따라 나갔다.
“아이고, 유 팀장님. 오랜만이네요.”
만면에 웃음을 띄며 반가워하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너무 미안한지 유 팀장이 평소보다 더 움츠러들며 고개를 숙였다.
“네. 반가워요. 감독님. 그런데 어떻하죠? 너무 죄송한데, 저희가 다른 스태프와 같이 하게 될 것 같아요.”
오동철 감독은 당황해서 표정이 굳어졌다.
“어... 유 팀장님 이건...”
“너무 죄송해요. 다음에 같이 하기로 해요. 정말 죄송해요.”
표정은 정말 미안하게 보였지만 설득의 여지가 없을 만큼 단호하게 말하니 그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오동철 감독은 씁쓸한 얼굴로 물러나려다가 동훈을 발견하고는 멈칫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때는 내가 실수한 것 같네. 잘 돼서 축하하고... 그 때는 미안했어.”
수양이 덜 됐었는지 안 그런척 했지만 그에 대한 미움이 많았나 보다.
그리고 그의 진심어린 사과를 듣고 나니 그를 향한 미움이 싹 내려갔다.
“아닙니다. 그때 일은 잊어버리세요. 전 잊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