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오디션(4)
“넵, 잠시 물 좀 마셔도 될까요?”
“그렇게 해요.”
은정이 물을 마시며 긴장을 누르는 사이 동훈은 유 팀장에게만 들릴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윤슬기랑 계약하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당연하죠. 전 합격이라고 했지, 선우 역이어야만 한다고는 안 했어요.”
“아...”
그제야 유지은 팀장의 말이 이해가 갔다.
본래 선우 역은 비밀경찰이었는데 정신과 의사로 바꾸게 되자 기존에 주인공 와이프 역할을 없앨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새로 넣은 배역이 나중에 죽게 되는 중국인 조폭 두목의 비서 역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흠흠... 아아...”
잠시 목을 가다듬은 은정은 감정을 잡고 연기를 시작했다.
“잠을 못 자나요? 왜 잠이 들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냥 잠이 오지 않아요. 답답하고 가슴이 조여와서 잠을 들수가 없어요.”
“고민이 있다면 털어놔 보세요. 비밀을 털어놓는 건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데 굉장히 큰 도움을 주거든요.”
한 페이지 분량의 대사를 끝낸 은정은 반짝이는 눈으로 동훈을 바라보았다.
분위기 상 꼭 칭찬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짝짝짝!
“잘했어요.”
“감사합니다.”
박수를 치며 칭찬해주니 그제야 환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그녀.
“그럼 결과는 사흘 뒤에 통보해드릴게요.”
은정을 내보내고 난 뒤 동훈은 경수에게 다음 지원자가 들어오지 못하게끔 멈추게 했다.
“연기가 애매하네? 그쵸?”
유 팀장도 동의한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포스는 장난 아닌데... 연기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럴지도 몰라요. 아까 손 떠는 거 보셨죠?”
“그럼요. 물컵이라도 들고 있었으면 아마 다 흘렸을 거야.”
“그렇게 떨면서도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생각보다 잘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언니가 너무 잘한 게 탈이지.”
“그건 그래요.”
세연은 연기를 배우지 못하고 연습 한번 못해본 상태에서 상대 배우인 대호를 놀라게 했다.
그런 연기를 봐서 그런지 은정의 연기는 조금 부족해 보이긴 했다.
타고난 연기 재능은 확실히 언니가 더 낫다고 봐야 할 거다.
다만 은정은 언니가 가지지 못한 능력이 한가지 있었다.
“근데 묘하게 사람을 집중시키네?”
유 팀장이 동훈의 말을 듣고 손뼉을 쳤다.
“내가 바로 그 말이 하고 싶었다니까요. 연기는 언니에 비해 부족한데 묘하게 계속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어요.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예쁜 게 아니라 보는 사람도 기분 좋게 해주는 그런 기운이 있다고 해야 하나?”
“걸그룹하면 더 어울리지 않아요?”
“아! 그래요. 은정 씨가 걸그룹이었으면 진짜 대박이었겠다.”
“왜 여태 연예계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분명 어릴 때부터 시선을 끌었을텐데...”
“의식적으로 피했을 수 있어요. 간혹 정말 예뻐서 어릴 때부터 권유를 많이 받는 친구들중에 이쪽 업계 소문을 듣고 부모가 말리거나 자기가 싫다고 극구 거부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흐음... 어쨌든 좋네.”
저런 인재가 자신과 함께 작업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일이다.
“자, 계속 들어오라고 해.”
경수가 동훈의 싸인을 받고 다음 지원자를 들여보냈다.
사실 다음 지원자는 누가 들어올지 알고 있었다.
명단에 빨간 형광펜으로 덧칠된 윤슬기라는 이름.
“안녕하세요. 48번 윤슬기입니다.”
사실상 이미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할 수 있는 오디션인데 그렇다고 해도 동훈에게나 슬기에게나 무척 중요한 순간이었다.
“반가워요, 준비한 연기 볼게요.”
“네. 후우...”
심호흡을 하며 잠시 숨을 고르던 슬기가 입을 열었다.
“자, 잠을 못 자나요? 왜 잠이 들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오?”
순간 조감독인 경수가 대사를 쳐주지 못하고 동훈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떨려서 말을 더듬은 것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저 특유의 귀여운 목소리에서 얼이 빠져버린 거다.
“윤슬기 씨?”
“네네?”
그녀도 자신이 잘못한 걸 아는지 잔뜩 얼어 있었다.
“연기가 나쁘지 않아요.”
“네?”
나쁘지 않다는 말에 눈을 똥그랗게 뜨며 되물어본다.
“정말로요. 그런데 발성이 잘못됐어요. 애니메이션 성우를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 같은데, 목소리가 본인 목소리가 아니에요. 방금 만화 캐릭터가 튀어나와서 연기하는 것 같았다구요.”
“아... 네.”
“혹시 어디서 연기 배웠어요?”
“어... 소속사에서 연결시켜 준 학원이요.”
WAS엔터 정도면 실력 없는 학원을 연결시켜 주지도 않았을 거다.
이 바닥에서 존경받는 대선배와 연결된 학원일 것이 분명하고 거기서 연기를 배우며 실력과 인맥을 다지려고 했을 텐데 아직도 발성조차 안 된다면 둘 중 하나다.
배우려는 의지가 없거나 스스로 절대 고칠 수 없는 경우.
“애니메이션에서 어린 여자역을 맡을 땐 그 목소리가 문제없을지 몰라도 이런 무거운 장르에선 그런 목소리로 대사 치면 몰입도 다 깨집니다. 고칠려고 노력 안 했어요?”
“...”
그녀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일단 알겠어요. 연기 더 볼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내일 낮까지 소속사로 연락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윤슬기가 나가자 동훈이 경수에게 말했다.
“녹화해놓은 거 오디션 끝나고 WAS에 보내. 많이 실망했다고 덧붙이면서.”
“그렇게 해도 됩니까?”
“그럼 저 상태로 카메라 돌릴 거야?”
“그, 그건 아니죠.”
“아니면 녹화영상 보내. 아, 그렇다고 대표한테 그대로 전하진 말아라. 담당 실장한테 보내.”
“하하, 알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회사 대표한테 직접 쪽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귀에 들어가기는 하겠지만...
“오디션 계속 진행해.”
그렇게 계속된 오디션은 끝도 없이 계속돼 당일 봐야 할 지원자들을 다 보는데 밤 10시를 넘겨야 했다.
그리고 이어진 오디션 2일차.
캐스팅이 거의 확정된 이현재와 대등한, 아니 존재감으로 보면 그 이상인 역할인 중국인 조폭 두목 역할을 지원할 사람들만 남았다.
당연하게도 각 소속사에서 보낸 연기자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제작사나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애매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주연급이라기엔 조금 모자라고 연기파 조연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정말 확실하게 연기만으로 극을 씹어먹을 수 있는 배우라면 ‘이 사람이다’ 생각하고 뽑겠는데 다들 어느 작품에서 본 사람이긴 한데 뭔가가 부족했다.
“다음 지원자 들어오세요.”
그가 들어왔을 때는 동훈도 유 팀장도 많이 지쳐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357번 황정훈입니다.”
그가 걸어들어온 순간 동훈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설마 그를 여기에서 볼 줄이야...
술을 좋아하는 그 특유의 벌건 피부와 재기 넘치는 눈빛은 잊을 수 없었다.
마치 김영웅 감독이 황정훈을 직접 본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과연 그의 연기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유지은 팀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경수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나종명 극단 출신이시네요? 연극에 발을 디딘지는 십년도 더 넘으셨고... 주로 소극장에서 활동하셨나 봐요?”
“네, 꼭 소극장에서 하려고해서 그런게 아니라 상황이 그렇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아... 그렇구나. 연기 경력이 많으셔서 기대가 되네요. 준비해 온 연기 보여주세요. 상대역은 제가 해드릴게요.”
황정훈은 강단 저 구석에 놓인 의자 하나를 들고오더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잠깐 감정을 잡더니 앉은 상태에서 발을 냅다 질렀다.
“야이 개이쉐끼야! 티 난다잖아! 안 난다매!”
유 팀장은 대사를 치려다 말고 동훈을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은데요?”
“합격시키죠.”
더 볼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