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15화 (15/116)

# 15

영화 개봉(1)

모든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도 동훈은 다른 스태프들과는 다르게 휴가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주어지지 않았다기보단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동훈은 편집실에 촬영본을 넘기고 나서도 직접 편집실로 가 하나하나 조율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직접 손봤다.

그러던 어느날 세연이 잠깐 만나자며 연락을 해왔다.

편집실로 오라고 하니 수수한 노메이크업에 모자를 눌러쓰고 세연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계속 일하는 중이었죠. 세연 씨는요?”

“저야 모 그냥저냥...”

“세연 씨는 후시 녹음할 게 없어서 그냥 영화 개봉하는 거 보시면 되는데, 혹시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때 연기해본 기억이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있어요. 너무 좋은 경험이었고 그래서인지 일도 손에 잘 안 잡혀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니 현재 스튜어디스로 일하는 모든 것들이 조금씩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을 거다.

남성보다 여성 비율이 극도로 높은 회사는 의외로 기강이 굉장히 세며 업무 강도도 높다.

특히 퍼스트나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을 이용하는 사람들 중에 스타들도 많았을 테고 한 번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러워했던 적도 있을 거다.

자신이 그런 스타들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테니 지금 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세연의 말이 너무도 당연하게 들렸다.

“전 세연 씨의 말이 나쁘게 들리지 않는데... 소속사 소개라도 시켜드려요?”

그날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 세연에게 가장 먼저 드러내놓고 호기심을 표한 건 은근히 세연을 마음에 들어하던 대호가 아닌 제작피디 유지은 팀장이었다.

당시 유 팀장은 그녀에게 아직 소속사가 없다면 다음 작품을 미리 계약해두자며 은근히 동훈을 채근했을 정도였다.

아직 이 바닥에서 명성이 없다시피한 자신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정산도 깨끗하고 매니지먼트도 잘하는 곳을 알아봐서 연결시켜 줄 순 있었다.

“아뇨, 아직 그것까지는... 사실 지금도 마음을 잡지 못했어요.”

“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사실 제 남자친구가 싫어해요.”

순간 너무 당황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그녀가 남자친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저렇게 예쁜데 남자친구가 있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왜 남자친구가 싫어합니까? 연예인이 되는게 싫다고 하던가요?”

“네.”

직설적인 대답에 이번에도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음... 난감하네요. 그런데 가족도 아니고 남자친구가 반대한다고 고민하는게 저는 조금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렇죠? 바보같을 거라는 거 알고 있어요. 그런데 남자친구도 사정이 있거든요.”

“사정이요?”

“사실 남자친구가 들으면 다들 아는 기업의 자제에요.”

“아, 속칭 재벌 2세나 3세?”

“맞아요. 그래서 여자친구가 연예계에 있으면 곤란하다고...”

어째 이유가 맞지 않는다.

그렇게 따지면 재벌들과 결혼한 연예인들은 뭐란 말인가?

“이상하네요. 재벌 3세들하고 멀쩡히 연애하고 결혼도 잘 하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정확히 싫어하는 이유가 뭐랍니까?”

세연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항공사 승무원이라면 모르지만 삼류배우면 곤란하다고...”

“그런 이유래요? 하하하.”

세연은 웃음을 터뜨리는 동훈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감독님, 저는 심각한데 웃으시는 건...”

“미안해요. 그런데 남자친구분 이유가 말이 안 되네요. 어쨌건 삼류배우는 안 될 거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그 남자친구 분 안목이 별로 안 좋네. 자기 여자친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르고.”

동훈은 그렇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아직 작업해야 할 게 많아서 먼저 일어날게요. 그리고 세연 씨는 그런 걱정할 시간에 연기 학원을 다녀보는 게 어떨까 싶네요. 이번 작품은 얼떨결에 했지만, 연기력만 더 높이면 더 좋은 배역으로 캐스팅 될 수 있으니까요.”

나가려는 동훈에게 세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정말, 정말 제가 배우로 성공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쌓아왔던 경력을 다 던질 수 있을 만큼? 이래도 되는 걸까요? 전 확신이 없어요.”

“지금까지 쌓아올린 경험을 포기한다는 건 엄청난 모험을 하는 거라는 거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제 권유가 세연 씨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는 확답을 드릴 수도 없어요. 배우로 전향하셔서 스타로 대성한다고 해도 본인이 불행함을 느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제가 세연 씨라면 배우로 올인할 겁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그럼 다음에 봅시다.”

더 이상 충고 아닌 충고는 의미 없다고 생각해 자리를 나왔다.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 뿐이지 그녀가 그걸 마다한다면 억지로 안겨줄 생각까진 없었다.

그녀의 인생이고 그녀의 선택이니 말이다.

촬영 후 후반작업은 전반 작업과는 달리 감독의 머릿속에 모든 걸 다 완벽하게 그려놓았다고 해도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진 않는다.

특히 CG 같은 건 인력을 갈아넣어야 하는 작업인데다가 OST를 비롯한 음악 역시 계속해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야 한다.

그러니 지루한 일의 반복이었지만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가까스로 추석에 맞춰 개봉시기를 잡을 수 있었다.

“포스터도 좋고 예고편도 잘 뽑았어요. 오늘 언론시사회에서 반응만 좋으면 의외로 선전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제작피디인 유지은 팀장은 긴장되는지 춥지도 않은데 손을 비비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편집본 괜찮았어요. 반응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어제 박 대표님 잠 한 숨도 못 주무시고 지금 관악산 연주암 올라간 거 아세요?”

“관악산 연주암이요? 거기 꽤 높을 건데...”

“대표님 아내분이랑 기도한다고 올라가셨어요. 오늘 반응 안 좋으면 자기 연주암에서 안 내려올거라고... 아이고... 오 상무님도 차마 기자들 얼굴 못 보겠다고 회사에서 인터넷만 보고 계시는데 정말 진빠져 죽겠다니까요.”

“이 영화 하나에 회사의 명운이 달린 겁니까?”

“안타깝게도 그렇답니다. 무조건 손익분기점 이상은 넘어야 해요.”

“손익분기점이 대략 150만 정도 됩니까?”

“정확히 180만이요.”

“아... 확실히 제작비를 덜 쓰긴 했네.”

유 팀장은 동훈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님께 진짜 감사드립니다. 전 감독님 바뀌고 각본이 싹 바뀌는 바람에 제작비 오버되는 줄 알고 얼마나 간 졸였는데요.”

“이거 잘 되면 진짜 저한테 잘해야 합니다.”

“그럼요. 이거 잘 되면 바로 감독님 작품 들어갑니다. 바로요.”

유 팀장은 긴장된 얼굴로 들어오는 기자들을 살폈지만, 동훈은 담담한 얼굴로 단상에 앉아 있는 배우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영화가 생각보다 잘 나왔다는 내부 이야기 때문에 배우들은 전날 제작보고회 때부터 얼굴이 좋았는데 오늘은 그 결과를 직접 보는 자리이기에 조금 긴장해서 굳어 있는게 눈에 보였다.

그 중 임현주 정도만이 느긋하게 마이크를 잡고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임현주 씨, 관객수 백만 돌파 공약 없으신가요?”

한 기자의 질문에 현주의 미간이 아주 살포시 찡그려졌다.

“아, 백만이요? 글쎄요. 제가 지금까지 찍은 영화 중에 백만을 못 넘긴 적이 없어서... 하하.”

“죄송합니다. 그럼 2백만? 아니면 3백만?”

“4백만 돌파하면 제가 걸그룹 안무 동영상 하나 찍어서 올릴게요. 하하하! 너무 이상한가?”

평소 절대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오버 안 하기로 유명한 그녀였기에 기자단이 전부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이 모습을 본 유 팀장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안 하겠다는거네. 약아 빠져가지고는...”

동훈도 유 팀장의 의견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별다른 언급은 하지 않았다.

왠지 그녀가 공약 이행을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자단의 질문이 이어졌다.

“괜찮은데요? 그럼 이번에 같은 시기에 개봉하는 ‘역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어... ‘역적’ 좋은 영화죠. 제가 존경하는 감독님, 선배님들이 참여하셨고 시나리오도 상당히 좋다고 들었거든요. 그래도 우리 영화도 나쁘진 않으니까 좋은 승부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건 나쁘지 않은 멘트였다.

아직 그녀조차도 영화를 본적 없는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최상의 멘트였으니 이번에는 유 팀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후 몇 가지 의미없는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고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진 후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그리고 2시간 뒤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동훈은 기자들보다 배우들의 표정을 먼저 살폈다.

배우들도 안다.

영화를 찍을 땐 모르지만 일단 결과물을 보면 이 영화가 망할 건지, 아닌지 정도는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

“영화 재밌던데요? 축하드립니다.”

“현주 씨, 2백만 돌파 때 저와 단독 인터뷰 해주시면 안될까요?”

“강대호 씨, 이번에 흥행 부진을 좀 씻겠는데요?”

영화가 끝나자마자 배우들에게 들러붙어 축하의 인사말을 건네는 기자들.

강대호는 생각보다 잘 나왔다는 걸 확인하곤 입이 귀에 걸려 기자들과 악수를 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다만 임현주만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묘한 얼굴로 인사를 받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나온 여자 누구야? 아는 사람 있어? 처음 보는 얼굴인데?”

흘리듯 지나가며 혼잣말을 하는 어떤 기자의 말이 바로 현주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어쨌든 이제 첫 스타트를 끊었다.

결과를 기다릴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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