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준비된 스타(1)
촬영에 배우가 부족할 때 주연 배우 소속사 측에서 도움을 주는 경우가 간혹 있다.
특별히 문제 되는 건 아니었기에 도움을 받을까 하다 마음을 바꿨다.
왠지 현주의 눈빛에는 순수한 호의로 도움을 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어머, 정말요? 이미 준비해 둔 배우가 있어요? 생각해보니 그렇겠다. 그랬으니 이렇게 면전에서 깠겠죠?”
뻔히 은채가 대본을 받고 빡쳐 나갔음을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기를 살려주려는 의도였는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지 딴소리를 한다.
“어차피 시간 여유는 많아서요. 문제 될 건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전 촬영에 지장 생길까 봐 가슴이 철렁했지 뭐에요?”
“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촬영장에 뒤집어지는 소동을 눈앞에 두고서 한껏 여유를 부리던 그녀였는데 고작 단역배우 하나 날아간 걸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니?
“사실 이번 7월에 몰디브에 화보 촬영 일정이 있거든요.”
‘하... 시팔...’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동훈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물었다.
“정말요? 제가 그 부분은 들은 적이 없는데?”
보통 촬영기간을 계약서에 명시하기는 하지만 그 기간을 넘겼다고 매정하게 딱 잘라 그만두지는 않는다.
다만 해당 기간 이후에 스케줄이 있을 경우가 문제가 되는데 그때는 제작사에서 배우에게 스케줄을 강요할 수 없기에 어떡해서든 기간 안에 촬영을 종료해주어야만 한다.
“굳이 이야기 할 필요가 없었어요. 원래 이 작품이랑 저랑 계약이 딱 6월 말 까지거든요.”
동훈은 속으로 유지은 팀장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6월 말까지만이라면 분명 촬영일정을 빡빡하게 잡을 경우 문제 없이 종료할 수 있는 기간이긴 했다.
하지만 영화촬영이란게 아무 문제없이 순조롭게 찍는 경우가 얼마나 된단 말인가?
알고서 말을 안 해줬다면 정말 욕먹어도 할 말이 없을 문제다.
“그렇군요. 그럼 촬영일정 부분을 조금 조정해서 현주 씨 분량을 최대한 앞으로 당겨봐야겠네요.”
“에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전 6월 말까지만 끝내주면 되니까. 어쨌든 문제 없이 진행될거라고 알고 있을게요.”
그렇게 새침하게 당부 아닌 당부를 남긴 그녀는 완벽한 뒤태를 뽐내며 멀어져갔다.
인터넷에 여신이라고 한창 떠돌아다니는 그녀의 몸매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다는 건 정말 축복이나 다름 없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니 감흥이 없었다.
동훈이 화난 눈길로 시선을 돌리자 유 팀장이 똥그랗게 뜬 눈을 꿈뻑여대며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다.
“절대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저 표정이 연기라면 그녀는 임현주보다 연기를 더 잘 하는 것이리라.
“진짜 몰랐어요?”
“당연하죠. 알았다면 말씀 드렸을거예요. 아니, 장 감독님을 부르기 전에 안 감독님을 납치라도 해와서 이거 끝내게 했을 거라구요.”
그 말이 일리가 있다.
현주의 스케줄을 알고 있었다면 신인감독에게 작품을 맡기는 똥배짱을 부리진 못했을 거다.
“스케줄 조정은 안 되겠죠?”
“임현주 성격에 감독님한테 와서 미리 말했으면 스케줄 절대 엄수해달라는 건데, 하... 가능하시겠어요?”
질문은 무의미했다.
가능하지 않더라도 가능하게 해야 할 판이니까.
“가능은 하죠. 아니, 가능합니다. 일정상 특별한 문제만 없다면...”
“세상에 스케줄에 맞춰서 끝까지 무사히 찍는 영화가 어디 있나요? 그것도 이 영화는 프리 프로덕션 기간도 없이 바로 들어간건데.”
“어쩔 수 없죠. 촬영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팀장님은 지원만 잘 해주세요.”
유 팀장은 이번에 처음 감독으로 데뷔하면서도 시종일관 침착함을 잃지 않는 동훈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촬영장의 변수는 한 두 개로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갑작스럽게 배우의 컨디션이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액션장면을 촬영하다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촬영장 주변에서 주민들의 항의 때문에 촬영을 중단해야 하는 경우도 상당하며 하다못해 주차 문제 때문에 말썽을 겪는 경우도 많다.
그런 수많은 문제중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문제라면 감독이 촬영 스케줄을 어겨가면서 더 좋은 장면을 뽑으려고 드는 경우다.
감독의 재량으로 조절할 수 있는 건 이것 뿐이니 다른 변수를 생각하면 최소 지금 짜놓은 촬영 일정 이상 더 찍을 생각은 말아야 한다.
문제는 그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
특히 경험이 일천한 신인 감독이라면 불가능에 가깝건만 동훈은 유 팀장의 눈앞에서 무심히 자리에 앉아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오디션 한번 준비할까요? 아니면 단역 배우 섭외해볼까요? 회사에 각 소속사 프로필 사진이랑 영상 있으니까 원하시는 스타일이랑 연기력을 말씀해주시면 저희가 뽑아드릴 수 있어요. 셋 정도 추려서 보여드리면 대부분 만족...”
“됐습니다. 일단 이번달 말까지는 그대로 가죠.”
“정말 그렇게 해도 되겠어요? 안 그래도 시간이 없는데.”
“그건 맡겨주세요.”
“후... 알겠어요. 문제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결국 유 팀장은 머리를 흔들며 촬영 현장을 떠났다.
“10분 뒤 스탠바이 합니다!”
정확히 10시부터 시작한 촬영은 단 1분의 오차 없이 정확하게 시작됐다.
“현주 정면에서 한 컷 따고 옆에서 한 컷 딸거야. 그리고 바로 이동해서 회의장면 촬영한다.”
동훈은 이경수 조감독에게 촬영계획을 주지시키고 스탭들에게 일러두도록 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해도 될까 하는 고민이 있었지만 김영웅 감독의 지식을 믿어보자고 생각했다.
그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영화 장면, 장면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들어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두 컷만으로 괜찮을까요?”
“임현주 7월에 스케줄 있단다. 괜찮게 해야지. 이제부터 NG 없으면 컷 여러개 안 따고 바로바로 이동할거니까 땡겨 찍을 씬 있으면 바로바로 추려서 줘야 해. 이제부터 시간 싸움이야. 알겠지?”
경수는 동훈과는 달리 동원대 영화학과와 영화아카데미를 나온 속칭 엘리트였다.
특히 안철호 감독의 직계라인이라고 할 만큼 그의 애정을 듬뿍 받았다고 들었는데 밑에 둬보니 눈치가 빠르고 센스가 있었다.
그래서 동훈도 경수를 괜찮게 보고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에도 경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심스러워했다.
아무리 NG가 없다고 해도 한 컷 딴 것만으로 바로 넘어간다는 건 도무지 들어본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역시나 조감독인 경수의 말을 들은 대부분의 스태프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촬영감독인 오동철은 대놓고 동훈을 비난했다.
“미쳤구나. 이래서 겉멋든 신인감독이 독불장군이면 수십억 날리는 거 일도 아니라니까. 지가 무슨 희대의 천재감독이야? 한 컷 찍어서 바로 오케이하고 다음컷 찍고... 아주 대~단한 천재 나셨네.”
그래도 전에 한번 호되게 부딪쳤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동훈 앞에서 불만을 내보이진 않았다.
그들 입장에서 영화가 망하든 흥하든 무사히 촬영만 종료하면 잔금을 받는 건 똑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좋아한 사람도 있었다.
“확실히 얘기가 통하는 사람이네, 장 감독이. 한번 말했는데 단박에 알아듣잖아?”
현주는 조감독인 이경수가 전달한 내용을 듣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반명 석태는 현주에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다 영화가 이상하게 나오면 어떡합니까?”
“뭘 어떡해? 이상하게 나오는 거지.”
“네?”
당황하는 석태에게 현주는 그녀가 들고 있던 돌돌 말린 대본을 그의 머리에 톡톡 두들겼다.
“넌 생각 좀 해라. 그렇게 안 찍고 7월 전에 이 영화가 끝나겠니? 그리고 그렇게 많이 찍어댄다고 안 될 영화가 잘 되겠어?”
“저번에 영화 괜찮을 것 같다고 좋아하셨잕아요?”
“좋아했지. 시나리오 좋아서 나쁠 것 없으니까. 근데 이 영화가 뭐 천만 나오겠니? 석태야. 내 매니저로써 내가 지금 가장 바라는 게 뭐겠어?”
석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촬영이 빨리 끝나서 몰디브 다녀오고 박현영 작가 작품 들어가는거요?”
“그렇지. 빙고!”
그렇게 각각 다른 생각을 하며 촬영에 들어간지 30분여...
“컷! 수고했어. 경수야 빠르게 준비시켜.”
“수고하셨습니다! 현장 정리하고 바로 이동할게요! 세트장 5번 회의실로 이동합니다!”
“점심 전에 씬 16-5 마무리 하겠습니다. 빠르게 움직일게요.”
이경수 조감독이 외치고 돌아다니자 설마하던 스탭들이 황당한 얼굴로 장비를 챙기며 하나 둘씩 이동하기 시작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방금 꼴랑 두컷이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안 나오면 어쩌려고 그러지?”
“몰라, 괜찮다잖아.”
“아 씨, 불안한데...”
불안한 목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걸 알면서도 동훈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날 밤 11시까지 배우가 NG낸 걸 빼곤 동훈은 모든 장면을 단 한 컷만으로 촬영을 끝냈다.
그리고 이날부터 무한야근과 잔업에 시달리던 스탭들의 눈빛이 동훈을 향해 호의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정시출근과 정시퇴근.
모든 스태프들의 공통적인 꿈과 희망이니까.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흘렀을 때 동훈의 핸드폰으로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