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사공이 되고 싶은 사람들(2)
동훈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앞으로 발전적인 대화를 통해 좋은 작품을 만들어가자는 뜻의 아군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만 굳이 적과 아군으로 팀을 가르고 싶지는 않네요.”
“감독님은 싫어도 이미 그렇게 됐어요. 촬영, 조명, 미술팀 각 수장들이 감독님한테 개쪽을 당했는데 그냥 넘어가겠어요? 뒷말이 무성할 거예요. 순진한 건가요? 아님 모른 척 하시는 거예요?”
“둘 다입니다.”
동훈의 대답이 예상외였는지 그녀는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어떤 뒷말이 나오든 상관하지 않아요. 없는 곳에서는 나랏님도 욕한다잖습니까? 현장에서 내가 지시하는데로 따라오기만 하면 내 조상 10대를 욕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와... 나도 어디가서 특이한 성격이라는 말 듣고 사는 사람인데 감독님도 정말 만만치 않네요?”
“어차피 그런 말들은 사라질 것이니까요.”
아주 조금씩 성격이 변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학연, 지연 없이 영화판에 들어왔기에 어딜가나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아 무슨 말을 하든 자신감있게 뱉지 못했고 회피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른 내가 들어선 것처럼 생각지도 못한 어투가 나와 버린다.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김영웅 감독이 지휘하는 현장을 체험하는 느낌이랄까?
“으흥... 지금까지 그런 말들을 해온 사람은 전부 사기꾼밖에 없었는데... 어쨌든 잘 알겠어요.”
현주는 눈을 살짝 내리깔며 인사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멀리서 보고 있던 석태가 그녀의 전용의자를 재빨리 챙겨갔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 성격 참 특이하네.”
동훈은 자신의 자리에서 대본을 보고 상념에 빠져드는 현주를 보곤 고개를 흔들며 다시 모니터에 눈길을 돌렸다.
*
“분위기 어때?”
석태는 대본을 보다가 뜬금없이 물어보는 현주의 물음에 긴장하며 그녀가 물어본 의도를 생각했다.
하지만 석태가 생각을 다 끝나기도 전에 현주의 뾰족한 음성이 재차 석태의 귀를 찔렀다.
“분위기 어떠냐고?”
“아, 현장 분위기 말이죠?”
“그럼 내가 너희 집안 분위기 물어봤겠니? 아니다. 말 나온김에... 부모님 잘 계시고?”
석태는 땀을 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네, 전에 누님이 보내주신 전복 너무 잘 먹었다고...”
“잘 드셨다니 다행이네. 그리고?”
“아, 현장 분위기는 누님도 예상하다시피 별로 좋지 않습니다. 특히 촬영팀 분위기는 거의 초상집인데요? 스탭들 당장 짐싸고 가야 하는거 아니냐고...”
“말은 그렇게 하겠지. 보스가 눈앞에서 그 쪽을 당했는데 입 싹 다물고 쥐죽은 듯이 일하자고 할 수는 없잖아?”
“그렇긴 한데...”
“어쨌든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는 그렇다 이거지?”
“네. 그런데 왜...?”
“뭘 왜야? 치고 받고 싸운다고 촬영 딜레이 되면 나 몰디브 못 갈 거 아냐?”
석태는 그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는지 특유의 바보같은 웃음을 지었다.
“아... 하하. 누나가 장 감독님 도와주려는 이유가 있었던거네요.”
“도와주긴 누굴 도와줘? 나 살기도 바쁜데, 이 바닥이 누가 누굴 도와주면서 커가는 그런 화기애애한 곳이니? 넌 보면 생긴 건 어디 조폭하다 온 것 같은데 말하는 건 우리 조카보다 더 순진한 거 같애.”
“죄송합니다. 그럼 장 감독님한테 왜 그런 겁니까?”
“내가 싼 똥 내가 치워야지, 그 벤뎅이 소갈딱이 영감탱이 때문에 스케줄 다 꼬였잖아. 이러다 팔자에 없는 보모노릇하는 거 아닌가 몰라.”
“장 감독님 생긴 건 샌님 같은데 의외로 깡다구 있던데요?”
“저 정도 깡다구 없으면 영화감독 하겠니?”
“누나 연출자가 너무 기 센거 안 좋아하잖아요?”
“쓰읍...”
석태는 현주의 서릿발 같은 눈매에 눈을 피했다.
“자꾸 말대꾸 하지?”
“죄송합니다.”
“아, 그리고 박현영 작가 시놉 돌아다닌다는데 알아?”
석태는 또다시 얼굴이 굳어졌다.
들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박현영 작가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될 건데...”
“그럼 가서 해성 오빠... 아니다, 해성 오빠가 알았으면 너한테 이야기해줬겠지. 해성 오빠한테 연락해서 알아보라고 해. 이번에도 박 작가 작품 못 잡으면 올해가 오빠와 나의 인연이 끝이라고 꼭. 꼭 전해주고.”
현주가 ‘꼭’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강조하며 석태에게 주의를 줬다.
석태는 바짝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전하겠습니다.”
*
다시 재개된 촬영은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 진행됐다.
스탭들 어느 누구도 동현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지만. 반대로 짧은 단답으로 일관하며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드러냈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시킬 때 딱 그 모습들이었다.
보통 이런 분위기라면 다른 현장에서는 분위기 전환을 위해 좋은 말로 격려한다든지 할 텐데 동훈은 쓸데없는 디렉팅을 줄이고 모니터에 집중하며 그런 분위기를 방조했다.
사람들은 불안해했지만 동훈은 오히려 이런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다.
원하는 장면이 머릿 속에 들어가 있으니 다른 사람들의 조언이 필요 없었고 현주는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는 성격이 아니라서 연기도 큰 문제가 없었다.
이러니 조용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마음이 안 들리 없었다.
그렇게 밤 10시에 촬영이 끝나고 다음 촬영 날,
제작피디인 유지은 팀장이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을 데리고 현장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여기 강은채 씨에요. 오늘 쿠키영상 각본 주신다고 하셔서 미리 인사 드릴겸해서 데리고 왔는데 괜찮죠?”
“안녕하세요. 강은채에요.”
커다란 눈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지닌 그녀는 동훈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간 크게 제작사를 상대로 큰소리쳤다고 들었는지라 기세 셀 것 같다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막상 보니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은채 씨... 반갑네요. 이야기는 들었어요.”
“네.”
대답을 단답으로 하는 거야 낯설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물론 배우를 하겠다는 사람이 낯설어 하는 것도 웃기지만...
사람을 봤으면 눈을 마주보고 웃으며 인사해야 하는데 시선을 내리깔고 회피하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황당해서 유 팀장에게 시선을 돌리니 그녀가 동훈의 팔을 잡아 끌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잠시 저랑 이야기 좀...”
강은채를 그대로 둔 채 그녀를 데리고 스탭들이나 배우들이 오가지 않는 세트장 뒤편으로 돌아갔다.
“쟤 왜 저래요? 원래 성격이 저래요?”
“미안해요, 감독님. 그런데 그것보다 일단 어제 촬영장 뒤집어졌다면서요?”
“조금 문제가 있긴 했지만 신경쓰지 마세요. 그리고 촬영 중에 종종 문제 있다고 계속 이렇게 엄마처럼 물어보실 거 아니죠?”
“촬영, 조명, 미술 감독님들 셋 다 부딪쳤다면서요? 제작사 입장에서 걱정되지 않겠어요?”
“걱정 안 될거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감독이 현장 지휘를 제대로 통제 못하면 그 영화 개판됩니다. 지금 팀장님이 나 도와주겠다고 저들 한번더 흔들면 그때는 정말 개판되는 거예요. 모른척 지나가주시는게 도움되는 겁니다.”
유지은 팀장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하... 알겠어요.”
“그럼 그 얘기는 그만하고 저 여자 좀 물어봅시다. 누가 저 여자한테 내가 뭐 문제 있는 놈이라고 했어요?”
“그건 아니구요.”
유 팀장은 잠깐 주저하다가 동훈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자꾸 무슨 역이냐고 물어보길래 쿠키 영상에 들어갈 역이라고...”
“아... 혹시 임현주한테 줘 터질 역이라고도 말했어요?”
“네.”
미안한지 쥐구멍 기어 들어가듯 목소리가 작아진다.
돌아가는 상황이 대충 어떤지 알게 되면서 황당함에 뭐라 대응해야 할지 잠시 대꾸를 하지 못했다.
안철호 감독님은 중요 배역을 맡기려고 오디션까지 봤겠지만 안 감독님은 나갔고 영화는 바뀌었으며 이 영화는 그 정도 중요 배역은 이미 다른 조연 배우들이 맡고 있었다.
껴주고 싶어도 껴줄 자리가 없는데 자신이 원한 배역이 아니라고 처음 보는 감독을 뉘집 개보듯 하다니...
“알겠습니다. 가죠.”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강은채가 뚱한 얼굴로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동훈은 그녀에게 아침에 들고 온 한 페이지 짜리 대본을 건네주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죠? 쿠키영상에 등장하는 역할이에요. 짧기는 해도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어서 나쁘지 않을 겁니다. 잘 보고 캐릭터 잡아보세요. 촬영은 6월 14일에서 16일 사이에 할 예정이고 자세한 일정 잡히면 우리 조감독이 연락할겁니다.”
대본을 받아든 강은채는 역시나 뚱한 표정을 유지한 채 한 페이지짜리 대본을 선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한 페이지 대본이라도 대사가 아주 적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읽기 시작하면 금방이다.
단숨에 훑어 내려간 강은채는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한다는 거죠? 중요한 배역은 주기 싫고 노동청에 당하는 건 싫으니 이렇게...”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그런게 아니라...”
강은채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아... 정말 대한민국 영화판 완전 개같아! 사기꾼들!”
빽 소리지른 그녀는 몸을 휙 돌려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뭐여 저거? 뭐 이런 경우가...”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사라져가는 은채를 바라보는데 언제 다가왔는지 옆에서 현주가 놀리듯 은근하게 말했다.
“놀라셨겠어요. 그런데 어쩌나? 배우 하나 펑크나버렸네? 근데 안타깝다. 미모가 상당하던데... 소속사에 말해서 배우 하나 구해달라고 할까요?”
현주는 실제로 보니 강은채의 미모가 자신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며칠 전과는 다르게 여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수없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