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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그 전에 도움을 받고 싶은 것이 있다. 가능하겠는가?"
"어떤 도움이 필요합니까?"
지완의 말에 하얀 늑대의 벗은 땀에 찌든 옷의 냄새를 살짝 맡았다. 쉬지 않고 앉아서 운전하는 바람에 땀 냄새가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정말 오랜만에. 그리고 강하게 부탁했다.
"샤워를 하고 싶다. 내 옆에 있는 이 친구도 같이."
# 아메리칸 챔피언십
뉴욕 양키즈의 디비전 시리즈는 2승 3패로 끝났다.
첫 경기에서 동팔이 통한의 홈런을 맞지 않았다면, 챔피언십에 진출할 수 있었을 거란 기사가 각종 스포츠 신문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팬들 중 상당수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작 동료들이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팬들은 반대로 생각했다.
"마음 쓰지 마."
"어차피 동팔이 아니라면 다른 누가 설 수 있겠어."
당시 동팔의 투구 내용은 완벽했다. 동료들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 6번 타자가 우연히 휘두른 배트에 동팔의 투구가 맞았을 거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들이라고 왜 아쉽지 않겠는가.
오히려 팬들보다 더 많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팔을 원망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있다면 방심을 한 자신을 자책하는 동팔 뿐이었다.
'어차피 데뷔 시즌에서 월드시리즈에 우승하는 것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이상 챔피언십까진 가고 싶었는데…….'
자신의 실수로 결국 진출하지 못하게 된 거란 생각은 지역 스포츠 언론이나 팬들만이 아니었다. 그 또한 자책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방심에 매몰되진 않았다.
'자, 자. 힘내자. 이번 시즌은 이렇게 끝났지만, 다음 시즌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돼!!'
아직 동팔에게는 두 시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잘 하면 다음 시즌을 넘어 그 다음 시즌에선 강력한 우군이 함께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건 바로 남궁지완의 합류.
이미 하얀 늑대의 벗과 통화하면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완의 계약은 사기(詐欺)였다. 그는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지 않아도 영혼을 강탈당하지 않는다.
그 사실에 동팔은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안도했다. 그리고 더 좋은 소식은 지완이 동팔을 도와주기로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필요한 과정이 있었다.
바로 지완이 뉴욕 양키즈로 영입되는 것. 그러기 위해서 민희가 자신이 운영하는 에이전트 회사에 등록을 시켰다.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캔자스시티와 뉴욕 양키즈 사이에서 민희가 얼마나 균형을 맞추며 조율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이미 캔자스시티에선 지완이를 붙잡을 이유가 없어. 그러면 최대한 숨기려 할 것이고, 반대로 양키즈는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역시 시간을 필요로 하겠지…….'
엄밀히 말해 캔자스시티가 더 불리한 입장이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부축을 받고 나온 투수를 뭘 믿고 비싼 값에 영입하려 할까.
거기에 거의 1선발 급인 선수를 갑자기 내놓으면 어느 구단이라도 의심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부상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는데 상당한 정보력을 쏟아 부어야 한다.
하지만 이적시장이 형성되기 전에 물밑 작업을 해야 하니 시간이 많지 않다. 그리고 영입대상이 단순히 투수에만 있는 것도 아니니 다른 것도 신경을 써야 한다.
결국 그동안 구축해 놓은 인적 정보망과 분석 자료가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이후에 어떤 활약을 하게 되어 잭팟을 터트릴지에 대한 운의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는 거래를 하는 두 구단 사이의 치열한 첩보전도 중요하지만, 그 사이에서 오가는 에이전트도 역시 중요한 변수.
그나마 민희는 모든 정보를 알고 있으니 그들보다 더 유리한 고지에 있다. 하지만 결국 최종 결정을 내리는 쪽은 두 구단이니 끝까지 방심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것은 민희에게 맡겼다. 그러니 이번 시즌이 끝난 동팔이 해야 할 일은 다음 시즌의 준비. 그리고 강력한 방해가 될 헤럴드의 능력 분석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상대할 수 없는 동팔. 그러니 이제 그를 상대할 또 다른 선수에게 이미 정보를 넘겨주었다.
"동욱이는 머리가 좋으니 분석이 가능할지도."
***
한편, 디비전 시리즈가 끝나면 거의 바로 챔피언십이 시작된다.
이번에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에선 뉴욕 양키즈를 누르고 올라 온 시애틀 매리너스. 그리고 와일드카드로 올라온 텍사스 레인저스를 누르고 올라온 클리블랜드였다.
클리블랜드의 4번 타자인 한동욱은 챔피언십 첫 경기의 선발 투수인 헤럴드를 살펴보고 있었다.
'저런 공으로 어떻게 1선발이 된 거지?'
그가 분석한 것은 다른 구단은 물론 같은 팀의 코치와 감독의 분석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정보가 한동욱에게 있었다.
그건 바로 악마 계약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능력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개인의 능력과 경험에 따라 달린 일.
그래서 동욱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다음으로 분석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확실한 것 하나. 정말로 계약자라면 공에 직접 힘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신체의 강화 및 변화에 제한된다. 자신처럼 신경 속도가 빨라지던가, 아니면 동팔처럼 회복능력이 뛰어나던가.'
이미 동팔을 통해 어느 정도 정보를 들었다. 또한 경계를 해야 할 타자가 있다는 것 또한.
지금은 다른 구단에 있어 경쟁자였지만, 협력이 필요하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이라 가능한 연대였다.
'이미 제리스라는 투수를 통해 능력에 다른 정보를 얻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의 확인은 끝. 그럼 헤럴드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를 추측해야 하는 건데…….'
동욱은 헤럴드가 어떤 유형의 능력을 가졌는지 추측했다.
'아마도 상대하는 타자가 어떤 공을 노리고 오는지 아는 능력.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그의 기록은 설명할 수 없어. 그럼 문제는 그걸 어떻게 아느냐인 것인데… 타자가 알아내는 것이라면 글러브 안에 쥔 그립을 투시하는 것. 하지만 타자를 상대하는 투수의 입장에서 배트를 쥔 그립은 뻔히 보이니 그건 아닐 거야.'
동욱은 투수가 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동욱은 계속 생각과 추측을 하지 않는다.
"한 번 붙어보면 알겠지. 내 상태와 상대방의 반응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면 꼬리를 발견할 지도 모르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욱은 단순히 분석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기억력도 좋았다.
지금은 스쳐지나간 사실이라도, 다시 떠올리며 분석에 박차를 가할 능력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첫 이닝은 서로 공격이 막혀 점수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클리블랜드의 두 번째 공격.
그 공격의 선봉이 바로 한동욱이다.
타석에 선 동욱은 배트를 가볍게 휘두르며 헤럴드를 본다. 그러자 먹잇감을 바라보는 공허한 눈빛과 마주쳤다.
'동팔의 말대로 섬찟한 눈빛이잖아. 사람이 어떻게 저런 눈빛을 할 수 있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다리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하체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일반사람이었다면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듣기는 했지만, 직접 상대하니 느낌이 달랐다. 물론 정규 시즌 중에 마주치긴 했다. 그런데 오늘은 분위기가 달랐다.
헤럴드 입장에선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 정규시즌은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일정이 반복되는 지루한 시간. 마치 온라인 게임에서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무의미한 경험치 노가다를 하는 기분이었다.
어쨌건 지역 우승을 한 이후, 이제는 고대하던 사냥과 유린의 즐거움을 느낄 시간.
그러니 정규시즌에서 보던 시선과 포스트시즌에서 보내는 시선이 달랐다.
정규시즌에선 멍하니, 지루함을 표현했다. 그러나 지금은 악마와 계약을 한 선수들의 목숨을 노리는 사냥꾼. 그리고 감히 악마와 계약을 한 죄를 물어 처단하는 집행자였다.
지금 헤럴드가 보는 동욱은 동팔과 마찬가지로 좌절로 밀어 넣어야 할 상대. 그리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여 뉴욕 메츠에 있는 두 사람의 영혼이 강탈당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미 동욱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어 더 유리한 입장에서 시작하는 헤럴드.
'동욱의 능력은 신경 전달 속도의 강화. 그러니 강속구를 던져도 맞는 거지. 그리고 변화구 또한 마찬가지.'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여 자신이 원하는 곳에 배트를 휘두를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좋은 눈을 가지고 있어도 무용지물이 되니까.
'어떻게 보면 상대하는 것이 조금 짜증날 수 있어. 공을 보고 치면, 미리 알고 던지는 나에게는 상극이 될 테니까….'
그동안 대부분의 타자들은 강한 힘, 재빠른 민첩을 요구했다. 그것도 아니면 정교한 타격이 가능하도록 몸을 제어하는 것.
하지만 동욱이 원하고 받은 능력은 힘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또한 힘 자체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 올릴 수 있는 것이니 사실상 타자로서 완전체에 가까웠다.
그러니 5할에 아주 조금 못 미치는, 정말로 미친 타율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어차피 보고 친들, 최소한 예상을 하고 타석에 들어서.'
습관과 버릇은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미세한 틈을 이용하면 그만.
투수 대 투수의 대결에선 상대하는 타선만 잡으면 그만이라 전력을 다할 필요가 없었다. 이건 동팔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
뉴욕 양키즈 타선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미리 알고 던지는 자신의 공을 칠 타자는 없다.
그런데 이번에 상대하는 동욱은 능력적으로 상성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헤럴드는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번 챔피언십에선… 간만에 전력을 다 해야겠어.'
서로의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동욱은 먼저 온 몸에 힘을 분산시켰다.
'어떤 공이 올지 알 수 없지만, 갑자기 100마일의 공이 날아오진 않아. 상대의 의도를 미리 알고 던지는 투수에게 강속구는 크게 필요하지 않으니까.'
강속구를 던질 수 있다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기량을 유지하는 것이다.
힘이 중요한 강속구인 만큼 항상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여 힘을 강하게 하거나, 최소한 유지시켜야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노화가 진행되고, 자연스럽게 운동하는 양에 비해 효율이 점점 떨어지기 마련.
거기에 강속구가 아니더라도 타자를 충분히 요리할 수 있는 투수라면 굳이 힘든 웨이트 트레이닝을 감수하며 강속구를 던져야 할 이유가 없다.
사람은 원래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어 한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하지 못할 뿐이지 수도나 고행을 하는 사람이라도 편해지고 싶은 것이 기본적인 욕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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