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오력의 투수-100화 (100/325)

[100]

'집에서 아빠랑 싸울 때처럼 소리 질렀는데… 괜찮을까? 내가 싫어서 헤어지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목숨까지 버리면서 나왔는데 이러면 책임감 때문에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밀듯이 밀려 왔다.

그렇다고 동팔의 얼굴을 안 볼 수는 없었다.

분명히 자신이 무사한지 걱정할 것이 뻔했으니까.

처음에는 바람처럼 달려갔던 민희였지만 경기장에 도착한 이후론 쭈삣거리며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을 보자마자 안아주며 안심하는 동팔을 보자 대부분의 걱정은 사라졌다.

하지만 대부분일 뿐, 전부는 아니었다.

민희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기… 오빠… 죄송해요… 아까 소리쳐서……."

먼저 따지고 들어오기 전에 먼저 석고대죄를 자청한 민희였다.

하지만 동팔은 민희의 말에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미안하긴… 내가 더 미안하지. 내가 그때 더 조심하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이렇게 말은 했지만 동팔은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민희한테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 그동안 사근사근한 것만 봤는데… 역시 사람은 끝까지 봐야 알 수 있는 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신의 누나를 떠올리면 됐다.

그의 누나 또한 집 안에선 고집을 피우며 부모님과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정작 밖에서 보면 예쁘고 착하고 성실한 학생이자 직장인이었고, 애인한테도 역시나 세상에 둘도 없는 천사였다.

동팔에겐 둘도 없는 악마같이 느껴지던(그래도 동팔은 누나가 동생인 자신을 많이 챙겨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나가 너무 어색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니 민희의 또 다른 모습을 보더라도 놀라긴 했지만 이해도 되었기에 그녀를 다독이며 안심시켰다.

동팔의 달라지지 않은 행동에 민희는 안도하며 서서히 잠이 들기 시작했다.

동팔은 깊게 잠이 든 민희를 눕혀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했다.

그러자 동팔의 앞에 중년의 영국 신사의 모습을 한 악마, 스크레이치가 나타났다.

"안 본 사이 안 좋은 일이 있었더군. 내가 직접 나설 상황은 아니라 어쩌지 못했지만… 괜찮은가?"

본인이 직접 작당을 모의하고 계획한 장본인이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기 전까지 동팔이 알아차릴 방법은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민희가 다쳐서 그렇지……."

동팔은 그렇게 말하며 민희의 부어오른 얼굴 부분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동팔의 말에 스크레이치가 말했다.

"분명히 지금은 도움이 되는 여자더군. 하지만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고 나면 거리를 두는 것이 더 나을 거라 생각한다네."

그의 말에 동팔이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그러자 스크레이치가 답했다.

"협상 능력이 좋은 여자야. 분명히 너에게 유리하도록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을 하겠지. 하지만 메이저리그에 가면 오히려 짐이 될 것이 뻔해. 도와준다고 같이 미국에 가겠다고 하겠지만… 그건 네가 다른 여자와 만나는 건 아닌가? 감시하기 위해서일 뿐. 오늘 봤다면 알겠지만 그동안 가면을 쓰고 행동해서 너의 환심을 사왔어."

그의 말에 동팔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분명히 놀랐습니다. 민희한테 이런 모습을 있는 줄 몰랐죠. 하지만 이 정도 가면은 누구나 쓰면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고작 그걸로 거리를 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동팔의 말에 스크레이치가 다시 말했다.

"그것만이 아니야. 앞으로 더욱 야구에 전념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자네의 위상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이 여자는 부담감을 느끼겠지. 결국 혜진이란 여인과 같이 헤어지게 될 걸세. 나중에 그때가 되면 힘들어하며 좌절하다 한 시즌을 날려버릴 수 있어. 또… 그때가 되면 이 여자보다 더 좋은 여자와 만날 수 있겠지. 오히려 자네에게 몸을 밀면서 달려들걸?"

스크레이치는 그 말을 하고 손바닥을 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위로 미인들의 모습이 나왔고, 전부 매력적인 미모와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스크레이치의 말에 동팔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자 스크레이치가 물었다.

"설마… 의무감 때문인가?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건 것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목숨이나 신경 써야 할 때야."

그의 물음과 제안에 동팔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의무감 때문이 아닙니다. 이건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일 뿐입니다. 헤어질 때가 온다면 그때 생각하면 될 일이죠. 지금 생각할 일은 나에게 모든 것을 던진 사랑스러운 사람과 어떻게든 함께할 생각을 할 때입니다.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걱정하는 바람에 소중한 현재를 잃어버릴 수 없어요."

동팔의 말에 스크레이치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스크레이치는 동팔이 만나지도 않은 미녀들의 모습을 지웠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굳이 강요할 수 없겠지. 하지만 나중에 필요하면 말하게. 계약에 대한 서비스로 좋은 사람을 알아봐줄 테니까."

스크레이치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동팔은 여전히 잠든 민희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이걸로… 괜찮을 거겠지?'

악마의 말이라 무조건 믿을 수 없어 일단 거절을 했다.

하지만 동팔은 생각했다.

'그런데… 악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방금 그 말을 했다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악마가 한 말임을 알기에 일단 거부하는 말을 했지만 다시 생각하면 솔깃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솔깃하기만 했을 뿐, 마음이 기울지는 않았다.

'됐어. 다른 사람은 생각할 필요 없잖아. 의무감이 아니라 지금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고, 좋은 거니까…….'

민희가 납치되면서 동팔은 그녀가 없는 세상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이 죽는다면 모를까. 민희가 죽는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민희에게 의외의 모습을 보긴 했지. 하지만…….'

동팔은 혜진이와 사귀었을 때의 경험을 떠올렸다.

미인에 차분할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강인하고 굳센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다.

민희처럼 소리를 지르는 경우는 없었지만 때론 말없이 있는 때가 더 무섭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때도 혜진의 의외의 모습을 봤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때만이 아니라 만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점점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됐다.

그러면 그때마다 서로는 결정을 해야 했다.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른 모습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게 싫어서 헤어지든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까지 사랑하든가.

그동안 혜진 헤어지자고 말하기 전까지 그녀도, 동팔도 한 선택은 단 하나였다.

"사랑하면 되잖아. 상냥한 모습도, 드센 모습도. 민희는 민희니까……."

동팔은 그 말을 하고, 민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한편, 웜우드는 저 멀리 어딘가에서 동팔이 있는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동팔… 그리고 한동욱……."

웜우드는 눈을 감고, 저 멀리 광주에 있는 한동욱을 판단하고 분석했다.

"한동욱… 뛰어난 분석력으로 삼촌의 계략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유능한 사람이지. 스스로를 절제할 줄도 알고,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정성. 좋은 녀석이야."

그리고 눈을 돌려 다시 강동팔을 봤다.

자신의 입맞춤에 깨어난 민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좋다는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민희는 민망해하며 동팔에게 투닥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동팔은 몰랐지만 의무실 밖에서 투닥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 선수들과 코치들, 감독이 있었다.

그들은 문에 귀를 대고 있다가 한 사람이 실수로 문고리를 누르는 바람에 우르르 밀려 쏟아졌다.

덕분에 더 민망해진 동팔과 민희였지만 그들은 웃으며 넘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웜우드 또한 작게 미소를 지었다.

"강동팔… 타고난 재능과 노력… 근성을 가진 사람. 그리고 자신 못지않게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돌보고 배려하는 사람. 또… 자신도 모르게 삼촌의 계략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는 중이고……."

웜우드가 말을 하며 자신의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검은 기운이 뭉쳐진 작은 물건이었다.

모양은 만년필의 펜촉과 같이 생겼다.

웜우드는 물건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누구를 선택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어. 삼촌의 계략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만… 어떤 방법으로 하게 될지 알 수 없는 것도 문제야. 그걸 알면 누구한테 이걸 써야 할지 판단할 수 있을 텐데……."

무언가 깊은 고민을 하는 그는 피식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

"꼭 지금 선택할 필요는 없겠지. 아직 시간은 있으니 천천히 생각하고 판단하면 될 일이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나면서 마저 말했다.

"그럼… 누구의 계약을 수정해 능력을 더 강화시킬지… 두고 보자고. 한 번밖에 없는 기회이고, 누가 얻을지는 알 수 없겠지만……."

그리고 웜우드는 바다 위로 배가 지나간 흔적처럼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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