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허억, 허억…….”
잠에서 깨어난 미카엘라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세웠다.
그녀의 온몸은 땀으로 젖어있었으며, 그녀의 금발 역시 땀에 젖은 채로 형편없이 헝클어져 있었다. 악몽에서 이제 막 깨어난 탓인지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불안해보였다.
“꿈, 꿈…인가.”
그녀는 호흡도 제대로 가다듬지 못한 상태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방금 전 기억이 꿈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 그녀의 감정이 격해져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그런 목소리였다.
“헉, 허억…….”
그녀는 문득 침대 주변이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서서히 땀이 식어가는 느낌은 시원한 기분이 들었기에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축축한 침대 위에 누워있는 건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또 이 꿈이다.
누군가의 기억을 엿보는 것 같은 꿈.
다만 꿈속의 그 누군가는 언제나 자신이었으며, 그 때문인지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당시의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지기에 상당히 곤란했다.
그 감정은 때로는 기쁨이나 행복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슬픔이나 절망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남아있는 감정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의 공포였다.
“후우… 히익?!”
겨우 호흡을 진정한 그녀는, 땀으로 헝클어져 눈앞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물이라도 마시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자기 눈앞에 있는 뭔가를 발견하고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물러나봤자 침대 머리 쪽으로 올라가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 …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의 눈앞에는 검은빛의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가 서있었다. 그는 침대 정면에 선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그 주변으로는 음산한 검은 기운들이 마치 안개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아니, 기사가 아니다.
미카엘라는 반사적으로 기사의 눈을 마주 바라봤지만, 그녀가 헬름 사이의 틈으로 볼 수 있던 것은 텅 비어있는 공허함뿐이었다.
저 갑옷 안에는 아무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텅 빈 갑옷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을 뿐.
굳이 저것을 기사라고 부른다면, 텅 빈 기사(Hollow Knight)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다만 기괴하게도 미카엘라는 그 할로우 나이트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모습이었다.
악몽을 꾸고 일어났더니 난데없이 방 안에 이상한 갑옷이 나타난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미카엘라는 그 할로우 나이트를 바라보며 데자뷰라 할 수 있을 기시감을 느꼈다.
‘그래, 마치… 꿈에서 봤었던…….’
할로우 나이트에게서는 꿈속에서 봤었던 그 뒤틀려있는 괴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그 괴수와 완전히 같았다.
비록 그 괴수와 비교하자면 눈앞에 서있는 할로우 나이트의 모습은 정상의 범주에 속하는 모습이었지만, 저 눈앞에 있는 검은 갑옷과 그 괴수가 동일인물이라는 걸 미카엘라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허억… 후욱, 학.”
그리고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미카엘라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압도적인 공포감을 느꼈다. 호흡조차도 제대로 하기 힘든, 마치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공포감이었다.
목숨을 떠나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위협받는 듯한, 전혀 느껴본 적이 없었던 미지의 공포감.
그녀는 지금 냉정하게 상황을 풀어가기는커녕 정상적인 사고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꿈은 잘 꾸었는가.
할로우 나이트는 제자리에 선 채로 말했다. 그 시선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비록 텅 빈 헬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다, 다, 당신은 대체…?”
미세하기는 했지만 미카엘라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침대 시트를 쥐고 있는 오른손 역시 떨리고 있었다.
자신보다도 몇 배는 강력한 몬스터를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던 모습은, 지금 그녀에게서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말을 더듬어가면서라도 질문을 던진 게 그나마 대견한 일이었다.
― 내가 누군지는, 너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을 텐데.
그 말대로 였다.
미카엘라는 꿈속에서 보았던 괴수의 정체를 눈치 채고 있었고, 눈앞의 할로우 나이트는 꿈속의 괴수와 동일 인물이었다.
“당신은, 당신은…….”
‘나’인건가?
미카엘라는 자신이 내린 해답에 대하여 확인을 구해보려 했지만, 차마 그 질문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과 완전히 동일한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공포.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릴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공포.
자신에게 지금 그 사실을 확인할 용기가 있는 건지, 그 사실을 직시하게 됐을 때 그 공포를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그녀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 …
하지만 할로우 나이트는 그런 미카엘라를 내려다보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거림이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감췄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걸, 미카엘라는 어렴풋이 눈치 챌 수 있었다.
― 네가 꿈에서 본 것은, 나의 돌이킬 수 없는 과오이자 그 결말이었다. …최악의 결말이었지.
할로우 나이트는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의, 아니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 따위는 눈곱만큼도 느낄 수가 없는 금속음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미카엘라는 그녀의 목소리에 착잡함이라는 게 담겨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최악의… 결말?’
그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미카엘라는 알 수가 없었다.
할로우 나이트가 꿈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방금 꿨었던 꿈의 내용과 연관이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봐도 미카엘라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정보가 너무나도 제한적이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러다 문득, 미카엘라는 꿈속에서 조원호가 검을 뽑아들면서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습니다.’
꿈을 꾸던 중에는 꿈속의 자신과 뒤틀린 갑옷의 괴수에게 시선이 팔려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으며, 동시에 비장했다.
‘최악의 결말이라는 건, 어쩌면…….’
어쩌면 조원호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미카엘라는 대략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 사족이 길었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중요한 건, 그 광경은 얼마든지 너의 미래가 될 수 있고, 우리는 그 최악의 결말을 피해야한다는 것이다.
할로우 나이트는 덤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으며, 그와 동시에 검을 꺼내들었다.
그 검에는 화염처럼 타오르는 검은 기운이 불길한 모습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
그리고 그 검은 곧바로 미카엘라의 목을 겨누고서 앞으로 찌르고 들어왔다.
찰나의 순간 만에 이뤄진 날카로운 기습이었고, 미카엘라는 공포에 질려있는 상태였지만, 그녀는 이 공격을 직감적으로 눈치챌 수가 있었다.
미카엘라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틀어서 상반신을 움직였고, 검은 그녀의 목에 닿지 못한 채 무의미하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크윽…!!”
― 호오, 나쁘지는 않군.
존재 자체를 위협받는다는 그 낯선 공포에 미카엘라의 다리는 아직 후들거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침대를 빠져나와서 검을 잡아드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곧바로 검을 뽑아들었고, 눈앞의 할로우 나이트를 겨냥한 채로 자세를 취했다.
헌터학과의 기숙사 방은 기숙사치고는 넓은 편에 속했지만, 그래봤자 기숙사였기에 검을 휘두르기에는 공간이 지나치게 협소했다.
“갑자기 무슨…!!”
미카엘라는 날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외치듯이 말했다. 두려움과 불만이 반쯤씩 섞여있는 목소리였다.
― 다짜고짜 침실까지 찾아온 녀석이 우호적인 녀석일 리는 없지 않겠나. 그대도 참 멍청… 아니, 이건 자기혐오인가.
할로우 나이트는 미카엘라에게 뭐라고 지적을 하려다 말을 멈췄고,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곤란하다는 듯 이마를 감싸 쥐었다.
반면, 미카엘라는 검을 쥔 채로 할로우 나이트를 경계하는 게 고작이었다. 대놓고 빈틈을 보이고 있는 중이었음에도 말이다.
공포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저 빈틈을 노리고 들어가면, 오히려 자신이 제압당할 거라는 직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일단 본론을 말하도록 하지. 그러니 잘 새겨들어줬으면 해.
할로우 나이트가 검을 거두면서 말했다.
― 너는, 나를 죽여야 한다.
“…뭐라고?”
갑작스러운 그 말에, 미카엘라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할로우 나이트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이어나갔다.
― 미안하지만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거나, 너에게 죽어준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왜냐하면…
지금 이렇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찬 일이었으니까.
언데드로서 가지고 있는 증오심을 억누르는 것도.
루시퍼가 남겨놓은 명령을 외면하는 것도.
그리고 자신과 같은 영혼을 가진 존재에 대한 살의를 참는 것도.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어리광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는 걸 깨닫고 할로우 나이트는 말을 줄였다.
― 어찌됐거나 너는 너의 실력으로 나를 이기고, 나를 죽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큽…….”
그 순간 할로우 나이트는 여태동안 억누르고 있었던 살기를 한순간에 터트려냈다.
억누르고 있는 중에 새어나오던 살기만으로도 터무니없는 공포를 느끼고 있던 미카엘라는 무력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무너지지 않은 채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 내가 너를 죽일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할로우 나이트는 검은 기운과 함께 안개처럼 사라졌다.
“…흐억.”
미카엘라는 그녀가 사라진 후에도 검을 쥔 상태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가,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검은 기운이 사라지는 걸 보고나서야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여태동안 참아왔던 다리는 사정없이 후들거렸고, 손은 검집에 검을 도저히 집어넣지 못할 정도로 흔들렸다.
결국 그녀는 무력하게 그 자리에 천천히 무너져 내렸고, 힘없이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갑자기, 대체…….”
미카엘라는 천장을 올려다본 채, 무기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