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민주주의의 꽃은?
마황제.
그것은 마계의 황제.
휘하에 네 명의 마왕을 거느린 최고의 권력자.
그의 존재는 마계의 최고 권력을 의미하며,
따라서 모든 국가에 통솔권을 가지는 절대 권력이다.
마물들의 질서를 정립하고
그릇된 질서를 교정하는 권위자다.
그야말로 대통령과 국왕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
천계에 옥황상제가 있다면 마계에는 마황제가 있다.
마황제로 등극하기 위해서는 4마왕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마왕들의 힘을 모아 초대 마황제의 금고 안에 봉인되어있는 ‘에테르’를 취하여야만 마황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황제.
누구나 탐내는 절대 권력이지만,
반대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 마황제의 자리에
강철남의 이름이 올라간 것은 가이아의 추천 때문이다.
카오스가 일으킨 전쟁이 끝나고 크레톤 복구 작업이 마무리 될 무렵,
가이아의 주도하에 강철남을 마황제로 등극시키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여기에 카르텔까지 합세하여 사실상 마왕들의 동의는 모두 받은 상태다.
하나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 마왕이 없다는 것은 부재로 처리하면 될 일이나,
강철남 본인의 의사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거 안 해도 된다니까 그러네.”
“철남. 마계에는 그대와 같은 위대한 권력자가 필요하다. 마계란 인간계와 달리 힘의 논리가 앞서는 곳이다. 그런 마계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만한 권위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게 나라고?”
“그대는 이미 명실상부 마계의 최강자. 게다가 성품까지 선하니 혼탁해진 마계의 질서를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그대보다 마황제로 어울리는 자는 없네.”
지나치게 띄워주는 가이아의 칭찬을 들으면서도 강철남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격이건 뭐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게 얼마나 귀찮고 부질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안 내켜.”
“철남. 이 마계의 안정을 위해서다.”
가이아가 강철남의 두 손을 꼭 잡고 호소했다.
그녀는 개인적인 바람에서가 아니라 마계에 살아가는 마물들을 위해서 간절히 바랐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가이아, 네가 하는 건 어떤가?”
“나에겐 자격이 없다. 이번 전투로 아직 내 힘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만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이아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자였다.
이야기는 돌고 돌아 다시 강철남에게 마황제의 감투를 씌우려는 가이아.
이렇게 된 이상 자기에겐 자격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
“소국가 대표들을 모아서 얘기해보자.”
“좋다.”
크레톤 전쟁에 이어 카오스 전쟁에서도 악에 대항해서 함께 칼을 들고 일어난 소국가.
그들에게도 마계의 중대사를 결정 하는데 있어 충분한 발언권이 있다.
“모두 모인 것 같군. 그렇다면 시작하겠네. 오늘 각국의 대표를 모은 이유는 철남을 마계의 마황제로 추대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모으고자 함이네.”
그러자 웅성웅성 소란이 일었다.
가이아는 그들의 잡담을 잠재웠다.
“물론 할 말이 많겠지. 잘 안다. 하지만 이대로는 정리가 안 되오니 순서대로 말해보도록 하겠다.”
가이아의 정리에 먼저 카르텔의 발언이 시작되었다.
“저는 찬성입니다. 강철남님은 압도적인 힘으로 첫 번째 마왕의 음모를 저지했습니다. 자칫하면 마계 전체를 세뇌라는 비겁한 수단으로 지배할 뻔한 비극을 막은 장본인이죠. 이번 사건뿐만이 아니라 그를 마황제로 추천하는 이유는 아주 많습니다. 그중 하나로 그는 기술 지식도 보유한데다 복지와 정치에도 그 발상력이 뛰어납니다. 이미 유명한 일화라 다들 아실겁니다. 저는 그의 조언에 따라 구들장이라는 신기한 발명품을 시민들에게 무상복지라는 명목하에 나눠주었더니 큰 호평과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결과로 알 수 있듯이 지도자로서의 능력과 성품, 통솔력까지 빠지는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는 카르텔의 일장 연설이 끝났다.
그 뒤로 소국가의 지도자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마족이 아닌 인간이 마계의 최대 권력자가 된다는 것에 이의를 품는 자들이 많을 것 같군요.”
“너무 성급합니다. 족히 1,000년은 행보를 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굳이 마황제가 없더라도 괜찮지 않습니까?”
“또 첫 번째 마왕놈처럼 반란 분자가 나타나면 어떡할 겁니까? 마계의 질서를 잡을만한 권력자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 하필 인간이어서…”
강철남의 자질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가 인간이라는 것.
명색이 마계의 최고 권력자가 마족이 아니라는 것이 몹시도 걸리는 모양이다.
“자, 그럼.”
그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강철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는 생각했다.
쐐기를 박자고.
모두가 인정할만한,
자신이 마황제 감이 아니라는 이유를 증명하자고.
“이럴 때 필요한 게 민주주의의 꽃 아니겠어?”
“네? 민주… 뭐요?”
민주주의란 말 자체가 없는 마계.
강철남은 초등학생을 가르치듯 설명을 이어간다.
“민주주의의 꽃. 바로 투표야. 투표가 뭐냐면 모든 마물들이 똑같이 한 장의 종이를 받게 되는데 그 종이에 찬성 혹은 반대를 적어 내는 거지. 그 표를 모아서 절반 이상이 동의하는 결정에 따르는 거야.”
마족들의 과반수에 따른 결정.
강철남은 이 결정에서 반드시 패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간 인간이라서 은근히 무시 받던 태도들을 떠올리면 반대는 따 논 당상이었다.
그쯤 되면 가이아도 아무 말 못 하겠지.
“그렇게 중요한 일을 각국 정상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맡긴다고? 제정신인가?”
“그 오만방자한 주둥아리가 함부로 설치는 걸 보니 너야말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을 함부로한는 도르의 국왕에게 멍구가 비난을 퍼붓는다.
“이놈의 개가! 내가 누군지 아느냐?”
“몰라, 지금부터 몸의 대화로 통성명을 나눠볼까?”
“좋다. 덤벼라!”
회의 분위기는 개판 오분 전이었다.
“거참, 국왕이라는 자가 모양 빠지게 개가 도발 좀 했다고 바로 칼 빼 드는 건 뭡니까? 추하게.”
강철남이 은근슬쩍 돌려깐다.
무안해진 국왕은 칼을 집어넣고 씩씩대며 자리에 앉는다.
“이야기를 계속 해보자고. 무튼 그렇게 민주주의로 결정하는 게 좋겠소.”
“그건 아니 될 일이오!”
소국가의 지도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럴 만도 하다.
철저한 철인 정치가 상식인 마계에서 대뜸 민주주의라니.
“하나 물어보지. 왕은 왜 존재하나?”
“그거야, 국가를 위해서지.”
길라의 왕이 답한다.
“그렇다면 국가는 왜 존재하지?”
“흥. 마족들의 생활을 위해 존재하지.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가?”
“그렇다면 왕은 국가를 위해,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면 결국 왕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논리가 성립되겠군. 결국 국민을 위한 최고 권력자를 선출하겠다는데 국민의 의견이 중요하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니겠나?”
그러자 말문이 막히는 길라의 왕.
이번에는 세틸의 왕이 따진다.
“왕은 절대적이네. 그 하나를 위해 국민들이 존재하는 것이지. 자네 말은 이치에 맞지 않네.”
“하나를 위해 모두가 존재한다라. 지극히 첫 번째 마왕 같은 가치관이로군.”
“녀석은 엇나간 것뿐이야.”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 이를 악물고 반박한다.
논리에서 밀릴 때 가장 드러나는 첫 번째 반응이 바로 거칠어지는 호흡이다.
녀석은 씩씩 대며 따지고 들었다.
“그것이야말로 이치에 안 맞지 않나? 이토록 수많은 생명이 존재하는데 오로지 한 명을 위해 모든 존재의 삶이 이용당한다는 게.”
“궤변이다. 왕의 권한을 지나치게 폄하하고 있어.”
“생각해봐. 당신들은 운이 좋아 왕으로 태어났지, 만약에 평범한 마족으로 태어났더라면 억울하지 않겠어? 생판 모르는 타인의 삶을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해야 한다니.”
“희생이라니, 그건 고결한 봉사다.”
“그건 니 생각이고.”
“니… 니라니…”
“모든 마물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왕이랍시고 독단적인 생각을 주입하는 것, 그게 바로 카오스가 하던 세뇌와 다를 바 뭐가 있나.”
강철남의 발언에 아무도 대들고 나서는 자들이 없었다.
말문이 막힌 것이다.
힘의 논리로 이끌어가는 마계에 새로운 바람이 분다.
강철남에게 있어선 초등학교 슬기로운 생활 따위의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지만
마물들에게는 신선한 이론이었던 것이다.
“모든 마물들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선택하게 하자.”
결국 각국의 정상들은 그의 말대로 각자의 나라에 투표를 진행했다.
마물들은 ‘투표’라는 말이 생소했고 그 행위조차 이해를 못 했다.
귀찮게 무얼 하느냐며 평소처럼 국왕이 알아서 결정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었고,
어떤 혁명가가 나타나 이건 중대한 변화의 바람이라며 여러분들의 권리를 회복하자며 적극 투표에 동참하자는 반응도 일었다.
가이아는 마족들의 권리와 그 권리의 힘에 관하여 설명함으로써 국민을 설득했다.
그 결과 가이아는 90%라는 말도 안 되는 투표율을 거두었다.
카르텔은 투표 후 소정의 상품을 나눠준다는 유혹으로 낚싯줄을 던졌고
결과적으로 86%라는, 가이아에는 못 미치지만 대단한 투표율을 기록했다.
소국가에서는 국왕들보다 혁명가들의 활약으로 대부분 투표율이 50%를 넘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마계 역사상 첫 번째 투표가 이루어졌다.
개표와 그 결과만이 남았다.
강철남은 설악산 황토집 마루에 누워 투표 따윈 잊은 채 빈둥거리고 있었다.
당연히 반대가 많겠지, 하며 놀고 있는데 팀장들이 찾아온 것이다.
강냉이를 씹으며 조선주를 홀짝이다 보니 어느새 길어진 이야기를 마쳤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팀장들은 또 한 번 황당함에 빠졌다.
“마황제라니… 강철남씨 당신은 매번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요.”
“나도 놀랍소. 평생 편하게 발 뻗고 살 팔자는 못 되나 보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강철남은 조선주를 한잔 더 따른다.
“제가 따라드릴게요.”
한지영이 잽싸게 술병을 빼앗아 들고 강철남의 빈잔에 술을 따라준다.
“고맙소.”
“헤헤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던 그 순간,
왠지 또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낀다.
“강철남!”
산 아래에서 김성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 판 붙자! 나는 이제 S급 몬스터도 혼자 무찌를 수 있는 최강자가 되었다. 어서 내 칼을 받아라!”
[초신속]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김성남.
좋은 분위기가 깨지게 생겼다.
마침 술이 얼큰하게 들어간 멍구가 이런 개민폐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개밥그릇을 들고 마중을 나간다.
“받아라!”
“좀 닥쳐!”
까앙-
개밥그릇이 김성남의 정수리를 강타한다.
눈에 흰자위를 보이며 휘청하는 김성남.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진다.
뒤따라오던 황기민이 한심한 듯 바라보다가 질질 끌고 올라온다.
“홍팀장님. 퇴근하고 왔수다.”
“그래, 고생했어.”
“혼자 S급을 무찌를 수 있는 최강자가 되었다라, 김팀장이 무슨 반응을 보일까요? 방금 들은 이야기를 알게 되면.”
“한 걸음 다가가면 백 걸음 멀어지는 기분 아니겠어?”
팀장들은 웃었고 황기민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그때, 산 위에서 스산한 기운이 불어왔다.
산 중턱으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키켈이 나타난다.
“마왕님.”
“어, 키켈 왔나? 한잔 하지.”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음에 마셔야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데?”
“투표 결과가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