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어둠을 삼키는 빛의 장막
어둠.
그것은 본질적으로 시야를 가리고 빛을 차단하는 것.
어둠이 강력할수록 빛은 잡아먹히고
어둠은 더 넓은 영역으로 힘을 뻗어나간다.
카오스의 검은 장막 속 어둠은 우주와도 같았다.
무한히 넓어지는 어둠.
그것을 내쫓을 수 있는 빛은 없었다.
광활한 어둠이 존재하는 검은 장막 속에서
빛의 구원은 없는 법이다.
“시바꺼, 존나 시커멓네.”
검은 장막 속으로 들어온 강철남.
깜깜한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고요하고 눈에 뵈는 게 없으니 오히려 집중하기 좋았다.
[탐색]
주변의 공간을 탐색해본다.
아무것도 없다.
마치 자신이 이곳의 유일한 방문자가 된 기분이다.
[관찰]
이 어둠의 끝 지점을 확인해본다.
하지만 찾을 수 없다.
끝이 없다.
한없이 넓어지는 어둠.
그 끝은 없다.
[화염탄]
푸른 불꽃을 쏘아 날려본다.
날아가던 불꽃은 멀어지다가 결국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야, 박장혁!!”
강철남은 큰 소리로 카오스를 불러본다.
잠시 뒤,
“크크크. 생각보다 항복이 빠른데?”
“그런 거 아니니까 설레발 치지마.”
“목숨을 구걸하면 살려는 주마. 마침 내 심복 자리가 비었거든.”
“잣 까는 소리 작작하고. 지금부터 여기를 나갈 건데 아마 너 너덜너덜해질 거야. 각오해두라고.”
“들어주기 괴롭군. 안쓰러워. 허세를 빼고는 대화가 불가능한 녀석 같으니라구.”
“야, 근데 있지.”
“뭐.”
“내가 부린 허세 중에 이제껏 안 지킨 약속은 없거든.”
강철남은 곧은 자세를 취하고 온몸의 마력과 도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어떤 학자가 그랬지. 우주의 공간은 무한히 팽창한다고.”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그런데 말이야 우주가 넓어지는 속도보다 더 빨리 날아가 그 앞을 따라잡는다면 어떨까?”
붉은빛과 푸른 빛이 어우러지며 솟구친다.
강철남의 머리 위에는 청홍의 오로라가 생성된다.
“그렇게 해서 팽창하는 우주의 뒷면으로 넘어간다면 무한히 밝은 빛의 세계도 존재하지 않을까?”
“푸하하. 그래서 네가 내 어둠을 따라잡겠다는 거냐?”
[마력 최대 출력]
유례없이 강한 마력이 뿜어져 나온다.
만약 이곳이 마계의 땅이었다면 모든 마물들이 공포에 질려 기절했을 것이다.
이 어둠 속에서 강철남은 눈치 보지 않고 마력을 최대로 끌어올린다.
“크하하. 쥐어 짜내봐라. 그럴수록 내 배만 더 부를 거다.”
[도력 최대 출력]
분홍빛 영롱한 안개가 강철남을 감싼다.
향긋한 향기와 하얀 나비 모양의 도력의 띠가 주변을 감싼다.
옥황상제조차 처음 보는 수준의 도력이 어둠 속에서 요동친다.
“크흠. 원래 빈수레가 요란한 법이지. 이대로 얌전히 삼켜져라.”
[방출]
강철남은 극한으로 끌어모은 마력과 도력을 방출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도력은 굽이치며 퍼져나갔고
어둠이 팽창하는 속도를 빛의 속도로 추격하고 있었다.
“젠장, 이 빌어먹을 새끼가!”
어둠이 빛에 삼켜질수록 멘탈이 흔들리는 카오스.
휘몰아치는 빛의 파도를 막아낼 수가 없다.
“네까짓 게 내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다!”
“몰아내는 것이 아니다. 집어삼키는 것이다.”
빛은 빠르게 퍼져나가더니 이윽고 어둠의 꼬리를 붙잡았다.
한계를 모르고 퍼져나가는 강철남의 마력과 도력이 자아내는 빛은
결국 검은 장막 속의 어둠을 완전히 삼키고 만다.
[빛의 장막]
검은 장막을 완전히 제압한 강철남은 빛으로 검은 장막을 흡수한다.
위이잉-
검은 장막에서 눈부신 빛줄기가 뻗어 나온다.
“뭐여, 씨부럴. 철남이가 나왔어!”
멍구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을 뜨니 어둠에 익은 눈이 시리다.
신선한 공기와 불어오는 바람이 뺨에 닿는다.
바깥의 기운이다.
“세상에, 이게 대체 인간 맞아?”
멍구는 ‘눈’으로 강철남의 상태창을 확인한다.
그 결과는,
【강철남】
레벨: 1,214
도력: Z
마력: Z
힘: Z
맷집: Z
속도: Z
더 이상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강철남.
그의 위용 앞에 카오스는 힘을 유지할 수조차 없다.
“어째서… 어째서 내 어둠이…”
“말했지? 내가 부린 허세 중에 지키지 못한 약속 따윈 없다고.”
멍구는 강철남이 빠져나온 검은 장막을 챙겼다.
나중에 차양막으로 쓰려고.
“흐흐흐. 내가 인간 따위에게…”
“마지막으로 딱 한 대만 맞자.”
“내가 죽어도 내가 실행한 계획들은 계속될 것이다.”
“상관없어. 딱히 인간계가 어떻게 되건 말건 상관없으니까.”
“너도 인간이잖나?”
겁에 질린데다 황당한 카오스.
검은 어둠이 파랗게 질렸다.
그 물음에 강철남이 대답한다.
“나는 산만 있으면 되는 자연인 강철남이다.”
번쩍-
하늘을 향해 빛을 발하는 강철 숟가락.
[필살! 뚝배기 파괴술]
있는 힘껏 내리친 강철 숟가락이 카오스의 본체를 두드린다.
마력과 도력이 카오스를 휘감으며 빠르게 일그러뜨리기 시작한다.
“크아아아악!!!”
찌부러지는 카오스라는 어둠은 그렇게,
파앗-
한 줌 바람이 되어 흩날려버렸다.
피와 어둠으로 점철된 전투의 막이 내린 것이다.
전쟁은 끝났다.
강철남의 승리다.
* * *
크레톤은 빠르게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리저드맨에게 당한 헬창들이 단련이 부족하다 여겨 벽돌을 들고 뛰어다니면서 빡빡하게 일한 덕분에 재건이 빨랐다.
가이아와 카르텔도 적극 협력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준 가이아와 달리 카르텔은 비용을 청구하긴 했지만 말이다.
세뇌 당했던 몬스터들은 각자 살던 곳으로 돌아가거나
크레톤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강철남의 무용담을 떠벌리길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진짜 무지막지 했다니까.”
“숟가락으로 내려치는데 빛이 번쩍, 와우!”
“Z 랭크라고 들어는 봤냐? 마계 최초 아니냐?”
“아마 당해낼 자가 없을걸? 마계 최강이야.”
전투의 목격자들이 그날의 이야기를 마계 전역에 퍼뜨렸고
강철남의 전설은 금방 유명해졌다.
마계 최강자, 다섯 번째 마왕 강철남.
유일무이 Z 랭크의 신과 같은 남자.
그리고
마황제에 가장 가까운 자.
“철남. 내일 인간계로 돌아간다고 했나?”
“그래, 집을 제법 오래 비운 것 같군. 키켈도 몸을 회복했으니 이제 맡기고 떠나려고.”
가이아는 또다시 찾아온 이별의 순간을 아쉬워했다.
“그대는 익숙해질 무렵이면 떠나는구나.”
“그건 부정할 수 없군.”
가이아는 강철남을 뒤에서 슬며시 안았다.
“철남. 그대가 이 마계에 가져다 준 안정과 평화의 가치를 알고 있는가?”
“내 뜻과는 상관 없었지만 말이야.”
“의도하지 않았어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그대의 올곧은 삶의 태도가 그런 결과를 이끈 것이겠지.”
“확대 해석이야. 나는 제멋대로인 놈인걸.”
“후훗. 항상 그렇게 행동하지만 그 안에는 따뜻함이 담겨 있더구나.”
머쓱한 강철남은 머리를 긁적인다.
“철남. 그대에게 할 말이 있다.”
“뭐야, 왜 그래. 진지하게.”
가이아는 진지한 얼굴로 강철남을 마주한다.
“이 마계의 마황제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 * *
설악산으로 돌아온 강철남은 간만에 찾아온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여름날의 뜨거운 햇빛을 차양막이 막아주고 있으니 마루에서 낮잠을 자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멍구.”
“왜.”
“물 좀.”
“네가 떠다 마셔.”
“아, 한 번만.”
“어이구.”
멍구가 마지못해 물을 떠다 준다.
아주 시원하게 벌컥벌컥 들이켜는 강철남.
“멍구.”
“또 왜!”
“화장실 가고 싶어.”
“싸! 싸서 말려.”
“그럴까?”
“뭐가 그럴까야, 드러운 새끼.”
한적한 오후의 낮잠 시간.
그 시간 속에 누군가 비집고 들어온다.
“철남씨.”
산 아래서 한지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암. 왜 왔소?”
“보고 싶어서요!”
배시시 웃는 한지영.
“그나저나 약속 지키셔야죠!”
“무슨 약속?”
“지영씨라고 불러주기로 했잖아요!”
“아, 그랬었나?”
“그랬었나가 아니죠!”
강철남은 졸음에 겨워 꾸벅꾸벅 존다.
“그래, 그래. 지영씨.”
“헤헤헤.”
한지영은 헤벌쭉 웃는다.
“볕이 좋군. 적당한데 누워서 낮잠이나 주무쇼.”
“정말! 이 좋은 날 낮잠이나 자게요?”
금방 한지영의 표정이 변하더니 입술이 뾰루퉁 나와 삐진다.
“어이, 인간. 이것이 바로 풍류라는 것이다.”
“넌 조용히 해.”
멍구와 한지영이 아옹다옹하는 사이 다른 팀장들도 산을 올라온다.
“철남씨, 안녕하셨습니까?”
백진섭과 홍태진이 함께 올라왔다.
김성남과 황기민은 파견일 때문에 함께 오지 못했다.
“또 우르르 몰려오다니. 무슨 일이오?”
“오늘은 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닙니다. 그저…”
“그저?”
“죄송합니다!”
홍태진은 무릎을 꿇었다.
“갑자기 웬 사과? 어이, 인간. 절 박기 전에 설명부터 박아야지.”
“이번 박장혁 사건의 원인은 헌터 협회 전체의 잘못입니다. 강철남씨의 피가 그런 식으로 악용될 줄도 모르고.”
“이미 다 끝난 일이오.”
“그래도 저희는 죄책감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이 주도한 일도 아니지 않소.”
“협회장이라는 존재에 관해서 잘 알아보지도 않고 그의 음모를 밝혀내는 것 역시 강철남씨에게 의존했습니다. 결국 그자를 쓰러뜨린 것도 강철남씨였고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도움만 받았습니다.”
홍태진은 눈물을 흘렸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헌터로서,
파견팀장으로서,
인류의 평화를 약속한 자로서.
“마왕이 작정하고 수작을 부리는 걸 어떻게 막아.”
“그래도 강철남씨는 막으셨지 않습니까.”
“나는 왜 빼냐?”
발라당 드러누운 멍구가 혀를 축 내밀고 띠겁게 틱틱댄다.
“물론 멍구도.”
“에효, 지지부진하게 굴지 말고 일어나쇼. 오늘 시간 비시오?”
“네. 연차 내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한잔 합시다. 좋은 술이 있으니까.”
강철남은 계곡물에 담가 둔 소하 선생의 조선주를 한 병 가져온다.
옥수수로 강냉이를 만들어 안주거리도 뚝딱 내온다.
[정화]
정화의 빛이 마력을 제거하여 인간들도 먹고 마실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자, 한잔들 합시다.”
“짠!”
한지영은 강철남과 술을 마신다는 생각에 잔뜩 들떠있다.
술을 한모금 마시는데 그 맛이 이 세상맛이 아니다.
“우와! 이거 뭐에요. 엄청 맛있어요!”
술에서 나는 고풍스러운 향기.
달달 하면서도 살짝 씁쓸한 술맛.
창호지에 스며드는 먹물처럼 혓바닥에 스미는 효모의 맛.
팀장들 인생에서 맛본 술 중 완벽한 술이었다.
“정말 놀랍군요. 이게 마계의 술이라니.”
“무려 전설의 술 장인이라 불리는 도깨비가 만든 술이야. 철남이는 마왕이라 이런 걸 마음껏 마실 수 있지.”
멍구가 으스댔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아 참, 이제는 마황제라고 해야 하나.”
…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마황제라뇨?”
“멍구야.”
“어흠, 술이 코로 들어갔나 켈록 켈록.”
급히 자리를 뜨는 멍구.
“철남씨, 마황제가 된다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그게 제안을 받은 것뿐이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정사실처럼 떠벌리긴 싫었다.
하지만 워낙 화제가 화제인지라 팀장들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래, 이야기할게.”
강철남은 썰을 풀기 시작했다.
마황제로 등극하게 될지도 모르는 그의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