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한지영의 각성
* * *
강철남은 오늘도 평화롭게 하루를 시작한다.
쏴아아—
황금색 물줄기가 무지개를 그리며 밭에 스며든다.
매일 아침 이렇게 비료를 뿌려 주니 콩이 무럭무럭 자랐다.
강철남은 그렇게 재배한 콩으로 메주를 만들었다.
황토집 천장에 주렁주렁 매단 메주는 맛이 잘 들었고 그것으로 된장을 담그니 깊은 맛이 났다.
마침 카르텔로부터 정기적으로 배송되어 오는 간장도 도착했다.
된장, 간장, 조선간장, 고추장을 담은 장독들이 햇살을 맞으며 마당에 늘어서 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군.”
장독 컬렉션을 보고 있자니 흐뭇하기 그지없다,
좋은 장도 들어왔으니 된장찌개나 끓여 먹을까.
고기도 구워 간장 소스에 푹 찍어 먹으면 좋을 것 같다.
“멍구야, 찬거리 잡으러 가자.”
“하음. 고블린 같은 놈들만 있는 거 아냐?”
멍구가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일어난다.
“스읍, 재수 없는 소리.”
이 멋진 설악산에 소나 돼지는 안 나오고 고블린만 나온다고?
멍구가 농담이 지나쳤다.
한데,
“키케케케.”
‘그게 이렇게 현실이 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X불.’
“인간이다! 이걸로 나도 요괴가 될 수 있어. 키케케케.”
“어휴, 한심한 등신 새끼들.”
멍구는 딱밤을 날려 고블린들의 머리를 터뜨린다.
“이 건방진 개새끼가!!”
멍구는 주제도 모르고 달려드는 고블린들의 뚝배기를 깨 버린다.
지금까지는 설악산에서 깡패 노릇을 했을지는 몰라도 이제는 그렇게 안 될 것이다.
“정상으로 가 보자. 거기엔 먹을 만한 게 있겠지.”
설악산 꼭대기로 향하는 멍구와 강철남.
단백질, 단백질 노래를 부르며 고기 감을 찾는다.
하지만 오늘따라 나오는 놈들이라곤,
“우오오!”
“X바, 스톤 골렘.”
“오늘 몬스터 가챠 왜 이러냐.”
살짝 열받은 강철남이 녀석의 발목을 잡아다가 땅에 패대기친다.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버리는 스톤 골렘.
“히익! 인간 맞아?”
“돔황챠!!”
몬스터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친다.
어차피 홉고블린, 오우거, 스켈레톤 같이 맛도 없는 녀석들이라 추격할 가치도 없었다.
“철남이, 여기도 글렀어.”
“어쩔 수 없군. 거기로 가 보는 수밖에.”
“오오. 어디 좋은 곳이 있나?”
발걸음을 옮기는 강철남.
멍구는 철석같이 믿고 따른다.
그가 도착한 곳은,
“어라, 여긴?”
어이가 없는 멍구.
어딘가 했더니 설악 신령이 사는 연못이다.
“여기서 뭐 하려고?”
“지난번에 봤어. 여기에 잉어가 살더라고.”
“미친! 그거 산신령 거 아냐?”
“야생 동물에 니 거 내 거가 어딨어.”
뿌연 안개 너머로 강철남은 연못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러자 정말로 황금색 잉어 한 마리가 폴짝 뛰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오옷! 잉어다!”
“예로부터 잉어는 뼈에 좋다고 골다공증 환자나 산모들에게 많이 먹이곤 했지.”
“꾸울꺽.”
살이 토실토실 오른 잉어를 보자 침이 절로 넘어가는 멍구.
신령이건 뭐건 이미 안중에도 없다.
먹고 보자.
“지금!”
강철남은 강철 숟가락을 연못 속으로 푸욱 찔러 넣어 물고기를 촤악, 끄집어낸다.
“키야! 월척이다!”
털 뭉치 앞발로 박수를 착착, 치는 멍구.
그때,
퍼엉!
“야 이 미친놈들아! 또 뭔 개짓거리야?”
설악 신령이 욕을 하며 나타났다.
지팡이가 없으니 허전해진 손.
뒷짐을 지고 둘을 노려본다.
“안녕하시오.”
“안녕 못 하다 이놈들아.”
“거, 사람이 인사를 하면 좀 웃으면서 받아 줘야 하는 거 아냐?”
“네가 사람이냐?”
“개라고 무시하냐?”
“스읍, 멍구야. 신령 양반도 왜 개하고 싸우고 그러쇼?”
“크흠.”
자연스럽게 둘 사이의 설전으로 주의를 돌리는 강철남.
“자, 화해하고 사이좋게 지내쇼.”
“그래, 신령 양반. 내가 잘못했어. 이웃사촌인데 웃으면서 지내야지.”
가스라이팅을 시전하는 멍구.
여기서 사과를 안 받아 주면 옹졸한 늙은이로 보일 것이다.
“알았네. 사이좋게 지내봄세.”
“잘 됐구만. 그럼 다음에 또 보자구.”
멍구와 강철남은 후다닥 연못을 벗어난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뭔가 싸한 것을 느낀 설악 신령.
아뿔싸!
“이 X불롬들. 내 잉어…….”
치이익—
설악산 중턱.
강철남의 황토집 마당에서 맛있는 소리가 난다.
메뉴는 잉어즙을 우려 만든 잉어탕.
먼저 들기름에 잉어를 볶는다.
대추와 약재를 넣고 찬물을 넣어 푹 고아 주면 완성이다.
“냄새 죽인다.”
“워매, 죽은 놈도 벌떡 일어나겠네.”
자연인 강철남.
자연견 멍구.
완벽하게 익은 잉어탕을 보자 정신을 못 차린다.
“미칠 것 같아. 빨리 한 입 줘.”
숟가락으로 살을 찢어 헤친 뒤 한 입 크게 떠먹으려는 찰나,
쌔앵—
거친 바람 소리다.
방향은 숲속.
빠르고 강렬한 기세다.
마치 살의가 담겨 있는 바람.
파앙—
강철남은 날아오는 주먹을 강철 숟가락으로 막는다.
“뭐야? X벌. 밥 먹는 거 안 보여?”
“이, 인간이 어떻게?”
회심의 일격이 너무도 간단히 막혀 버리자 당황하는 요괴.
구울의 모습을 한 요괴의 정체는 바로 풍속귀(風速鬼).
18요괴 중 하나다.
바람의 흐름을 타고 빠른 속도를 내는 요괴로 보통 요괴들과는 차원이 다른 스피드를 낼 수 있다.
만약 상대가 강철남이 아니었더라면 순식간에 목이 썰렸을 것이다.
“철남이, 안 먹으면 나 혼자 다 먹는다?”
“기다려!”
풍속귀를 냅다 집어 던지고 냄비에 숟가락을 들이대는 강철남.
우당탕!
그러자 풍속귀는 바닥에 얼굴부터 처박히고 데굴데굴 굴렀다.
명색이 18요괴다.
이런 취급을 받고 그냥 물러설 수 없다.
“바보 취급하지 마라, 인간. 네놈 목덜미를 뼈째로 씹어 먹어 주마.”
[바람칼]
풍속귀의 손에 날카로운 바람이 모여들더니 날카로운 칼날이 만들어진다.
그걸로 강철남의 목을 따기 위해 무섭게 노려본다.
“죽어라.”
땅을 차고 달려들려는 순간,
스윽—
강철남이 뒤돌아서 풍속귀를 노려봤다.
그 순간,
풍속귀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그 어떤 도사나 신령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살기였다.
본능이 소리치는 멈추라는 절규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타닷—
겁에 질린 풍속귀는 그대로 뒤돌아서 정상을 향해 달렸다.
마계의 구멍으로 넘어가 최대한 강철남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내달렸다.
“대체 어디서 저런 인간이…….”
달리고 또 달려도 그 눈빛이 등 뒤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공포.
요괴로서 처음 느껴 보는 공포의 감정.
심장이 굳어 버릴 것 같은 기분에 미친 듯이 달렸다.
한참을 바람에 실려 달려 나갔을 때, 구멍 하나를 발견한다.
앞뒤 안 가리고 구멍을 넘는다.
그러자 도착한 곳은 어느 산.
그곳은 북한산이었다.
한편 북한산 중턱에는 두 여자 탓에 서리가 내리고 있다.
“이봐, 한 팀장. 무슨 일이야?”
뒤이어 올라온 홍태진.
가이아와 한지영이 서로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걸 보고 한지영에게 물었다.
“누구시죠?”
순간 가이아의 미모에 압도당할 뻔했다.
팀장의 가오를 생각하며 정신을 바짝 차리며 버티는 홍태진.
“나는 가이아, 두 번째 마왕이다. 다섯 번째 마왕 강철남을 찾으러 왔다.”
“강철남 씨를요?”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데 이 아가씨는 대답을 안 하는구나.”
그러면서 한지영을 노려보는데,
“갑자기 나타나 자기를 마왕이라고 하는 ‘아줌마’한테 어째서 철남 씨 있는 데를 알려 줘야 하죠?”
홍태진은 아뿔싸 싶었다.
저 단어가 나온 이상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질 것이다.
만약 저 여자가 정말 마왕이라면 상대를 잘못 건드린 것이다.
“재밌네, 아가씨한테는 묻지 않을게.”
그러고는 황기민에게 다가가서는,
“목숨을 구해 준 값으로 강철남이 있는 곳을 말해 주거라.”
황기민은 난감한 입장에 처했다.
말해 줘도 되는 걸까?
그때,
쌔앵—
돌풍이 분다.
거친 바람이다.
마치 날카롭고 무거운 바람이.
가이아가 황기민을 밀어내고 몸을 돌린다.
손을 가슴에 모아 집중한다.
[나무벽]
타앙—
가이아가 나무줄기가 배배 꼬인 벽을 소환하자 무언가가 총알처럼 날아와 나무벽에 부딪쳤다.
그 정체는 바로 설악산에서 넘어온 풍속귀다.
“예의가 없구나. 대화 중에 끼어들다니.”
“인간, 인간이 이렇게나 잔뜩 있다니.”
가이아는 풍속귀의 상태를 보더니 보통 몬스터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요괴인 모양이구나.”
“요괴? 요괴가 뭡니까?”
몬스터에 관한 정보라면 흘려들을 수 없는 홍태진.
다급히 묻는다.
“인간을 먹은 마물이 요력을 얻게 되어 요괴가 되는 것이지.”
“그런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 줘도 돼요?”
강철남에 관한 말을 아꼈던 한지영.
그런 자기에게 정보를 술술 알려 주는 가이아가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그대들은 강철남을 위해 침묵했다. 강철남의 친구이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조력을 아낄 이유가 있나.”
말을 마치자 곧바로 풍속귀를 향해 공격을 날린다.
[속박]
풍속귀의 발아래 넝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하지만 바람을 타고 허공을 달리는 풍속귀에겐 통하지 않았다.
[나무 감옥]
무수한 나뭇가지들이 숲에서 돋아 나와 풍속귀의 전방위를 덮친다.
완전히 제압했다 생각이 들었을 때,
푸쉬이—
풍속귀는 한 줄기 바람으로 둔갑하여 나무 감옥 사이를 빠져나왔다.
“미친 새끼! 완전히 사기잖아!”
녀석의 움직임을 눈으로 간신히 좇던 황기민.
불합리한 녀석의 능력에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너무 빨라서 어떻게 할 수도 없잖아.”
창을 꼬나쥔 홍태진.
그저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 답답해한다.
“내가 녀석의 발목을 노릴게요.”
한지영이 두 개의 단도를 뽑아 든다.
“한 팀장, 네 속도로는 무리야.”
“심장이 터질 각오로 달려 봐야죠.”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가이아.
“아가씨, 잠깐 여기 좀 볼래?”
“네? 지금 바쁜데…….”
가이아는 한지영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축복]
가이아의 손에서 푸른 빛이 나와 한지영을 감싼다.
“이건……?”
“엘프의 마법이야. 내 힘을 너에게 나눠 줬어. 속도에 자신 있다면 한 번 보여 줘 봐.”
“고맙다는 말은 안 할게요. 원래도 빨랐으니까요.”
귀엽게 웃는 한지영.
가이아도 옅은 미소로 답한다.
“좋아, 여기서 실패하면 망신이지.”
한지영은 집중하고 상대를 노린다.
[초신속]
엄청난 힘으로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는 한지영.
그러나 풍속귀를 따라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느려, 느려, 느려! 인간, 느려터졌다고!”
한지영을 조롱하며 요리조리 뛰어다니는 풍속귀.
“젠장, 해 보자 이거지? 그렇다면.”
[한계돌파]
[초신속]
출력을 더 올리는 한지영.
급격히 스피드가 올라갔다.
“키키키. 폐와 심장이 터져 버릴 거다, 인간!”
하지만 속력을 더 낼 수 있는 건 풍속귀도 마찬가지.
바람이 되어 날아가며 한지영을 가뿐히 따돌려 도망친다.
정면 승부를 피해 다니면서 이대로 한지영을 좀 더 가지고 놀 셈이다.
“더 빨리, 더 빨리, 더 빨리!”
풍속귀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한지영.
‘따라잡아야 해.’
북한산에서 강철남을 따라잡으려던 그 간절함을 다시 한번!
순간 한지영의 몸에서 푸른빛이 솟는다.
그리고
[광속]
폭발적으로 가속도가 붙는 한지영의 다리.
방심하며 여유를 부리던 풍속귀와 한 뼘 거리로 좁혀진다.
[강화]
[연타]
한지영의 단도가 미친 듯이 풍속귀의 발목을 마구 저민다.
“끼에에!!”
그대로 풀숲으로 낙하하는 풍속귀.
[가시 지옥]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이이가 최후의 공격을 날린다.
땅에서 솟구친 가시나무가 풍속귀의 몸을 꿰뚫고 마구 찌른다.
도력 대신 압도적인 마력으로 밀어붙이는 가이아.
결국 풍속귀는 숨을 거둔다.
“하아, 하아.”
“잘했어. 제법인데?”
탈진해 쓰러져 있는 한지영을 향해 다가가는 가이아.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