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가이아 인간계에 오시다
* * *
북한산.
강철남이 떠난 뒤 서울 헌터 연합이 관리 중이다.
써걱—
“끄어어억!”
레벨 50의 B랭크 몬스터가 김성남의 단칼에 쓰러진다.
[김성남
레벨: 61
힘: AA
맷집: BB
속도: A]
인류 최강의 헌터로 알려진 김성남.
그의 상태창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학술지에 실려 헌터 학회의 연구 대상으로 지목받으며,
헌터 지망생들에겐 꿈의 목표이자 이상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더 강함을 갈구했고 보다 높은 레벨과 랭크를 추구했다.
“다음은 누구냐?”
“히이익!”
김성남은 레드 드래곤의 이빨로 만든 검을 휘둘렀다.
북한산의 몬스터들은 그의 광기 어린 눈빛을 보자 달아나 버린다.
그의 실력은 북한산을 제패할 만큼 강했다.
대적할 만한 몬스터가 없었다.
“김성남이! 혼자 나대지 말랬지?”
같이 파견을 나온 황기민이 헉헉대며 산을 올라온다.
흥분해서 무작정 달려 나가는 김성남은 도무지 쫓아갈 수가 없다.
“망설일 시간이 없어. 지금 이 순간에도 녀석은 한계를 모르고 강해질 거다.”
“누구? 강철남이? 이 또라이야. 그 인간은 미쳤어. 마왕이라고. 네가 무슨 수로 따라잡게?”
“몬스터를 쳐 죽이고 강해진다. 그게 다야.”
“잊었나 본데, 오늘 우리 임무는 무기 소재 확보야. 다짜고짜 다 찢어 죽이면 챙길 게 뭐가 남냐.”
임무는 제쳐 놓고 레벨업에만 혈안이 된 김성남.
덕분에 성격에 맞지 않게 황기민이 그를 진정시켜야 했다.
“이렇게 약한 놈들에게선 어차피 제대로 된 소재도 안 나와.”
“그건 네 기준이고. 견습생들에게는 고블린의 손톱조차 유용하게 쓰이는 거 몰라?”
“그런 소꿉놀이 장난감으로는 강해질 수 없어. 우리가 더 대단한 소재를 가져다주도록 하지.”
“대단한 소재?”
“예를 들면…….”
쿵— 쿵—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엄청난 녀석이 나타났다.
[스톤 골렘
레벨: 50
힘: S
맷집: SS
속도: A]
스톤 골렘이 나타났다.
키는 4m에 육박하며 전신이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괴물.
“X바, 실화냐? 스톤 골렘이라고?”
황기민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흘렸다.
반면 김성남은 진지하게 스톤 골렘을 노려본다.
녀석을 무찌를 셈이다.
“김성남이, 싸우려고? 우리 둘뿐인데?”
“둘? 훗, 혼자서도 충분해.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
[강화]
[검압]
김성남의 검이 빛에 휩싸이며 힘을 뿜어낸다.
카앙!
이내 재빠르게 움직여 스톤 골렘의 다리 이음새 부위에 강한 검압을 내려친다.
그 위력에 주변의 땅이 움푹 파인다.
“끄어어.”
묵직한 신음을 내는 스톤 골렘.
거대한 다리를 휘둘러 김성남을 떼어 낸다.
“느려 터졌군.”
가뿐히 피한 김성남.
스톤 골렘은 이어서 무지막지한 팔을 휘둘러 땅에 내다 꽂는다.
쿠쾅!
포탄이 떨어지는 굉음과 함께 산이 울린다.
녀석의 주먹이 땅을 내려치자 깨진 바닥의 파편이 휘날린다.
그 파편의 틈새를 노려 김성남이 기습을 감행한다.
[신속]
[강화]
잽싸게 스톤 골렘의 목을 노린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목의 틈새를 빗맞았다.
조준은 정확했으나 녀석은 본능적으로 살짝 목을 젖혀 회피한 것이다.
괜히 랭크가 높은 게 아니었다.
“돌대가리 주제에 전투 센스가 있는 녀석이로군.”
[강철검]
새로 익힌 김성남의 필살 스킬.
검에 강철의 가호가 둘러진다.
위협을 느낀 스톤 골렘이 주먹을 휘두른다.
가볍게 피하며 인사이드로 파고드는 김성남.
있는 힘껏 세차게 검을 내려치자 스톤 골렘의 무릎이 살짝 깨진다.
“우오오!”
인간의 공격에 부상을 입자 당황한 스톤 골렘.
왼팔과 오른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김성남을 몰아낸다.
김성남이 백스텝으로 뒤로 물러서자 녀석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그 순간,
“오케이! 사정거리로 들어왔어!”
나무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기민.
이때를 노렸다는 듯 공격 태세를 취한다.
[일격]
빈틈이 많이 생기지만 그 대가로 적에게 먹이는 대미지를 극단적으로 끌어올리는 강화 스킬.
그는 5m 높이의 나무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며 편곤 추를 힘껏 휘둘렀다.
“받아랏!!”
쿠아아아앙!!
“끄어억!!”
강렬한 파열음과 비명이 산에 메아리쳤다.
편곤 추에 맞은 스톤 골렘의 머리통이 그대로 작살난다.
대가리가 한 줌의 부스러기가 되어 와르르 쓰러지는 스톤 골렘.
황기민은 편곤 추를 휘두르며 의기양양한 세리머니를 펼친다.
“어때? 이게 바로 편곤의 위력이야.”
“내가 다 잡은 걸 막타로 뺏어 먹으니 좋냐?”
“이거 또 왜 이래. 이게 바로 팀플레이 아니겠어? 홍 팀장님도 이런 티키타카가 잘 어우러진 그림을 원하셔서 우리를 세트로 묶으신 거야.”
“누가 너랑 세트 한대?”
“에헤이, 츤데레 김성남이 또 까칠하게 군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 알지? 그거 요즘 같은 시대에서는 미덕이야.”
황기민은 스톤 골렘의 소재를 주워 들고는 싱글벙글 웃는다.
스톤 골렘의 소재는 워낙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다.
초보 헌터들의 몸을 지켜 주는 갑옷과 방패에 조금 섞으면 생존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또 화살촉과 검에 섞으면 자기 랭크보다 한 단계 높은 몬스터의 가죽을 뚫을 수도 있다.
기적의 ‘템빨’을 가능케 하는 팔방미인 소재다.
“득템.”
신이 나서 소재를 가방에 마구 주워 담는 황기민.
김성남은 칼날을 확인하며 이가 나간 부분을 손보고 있다.
칼끝은 아직 살아 있다.
그러나 옆면에 이가 나갔다.
‘아직 수련이 부족하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
“야, 뭐 못 느꼈냐?”
“뭐가?”
김성남이 불길한 느낌에 신경이 곤두선다.
전에도 있었다.
이런 비슷한 느낌.
언제였더라.
“끼이이…….”
이 울음소리.
그래, 명동이다!
명동을 휩쓸었던 박준범.
지금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괴한 울음소리는 박준범과 대치할 때와 똑같이 소름을 일으켰다.
이건 생존 본능이 보내오는 위험 신호다.
“무기 들고 주위 잘 살펴. 까딱하면 모가지 날아간다.”
그제야 무언가를 느낀 황기민도 편곤을 들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하지만 이 불온한 기운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온다!”
[강화]
김성남이 가드를 굳혔다.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 힘껏 버틴다.
퍼어억!!
그러나 몬스터의 강한 박치기가 그를 종잇장처럼 날려 버린다.
“야, 김성남이!”
날아가면서 흘긋 적의 모습을 관찰한다.
거대한 멧돼지다.
몬스터?
아니, 보통 몬스터가 아니다.
뭔가 다른 존재다.
무척 위험한 느낌.
어떻게 저런 위압감을 풍길 수가 있는 거지?
[초신속]
황기민은 김성남을 들쳐 매고 재빨리 달아난다.
도망가야 한다.
상대가 안 된다.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지원군을 불러야 한다.
자존심 상하지만 본능이 그러라고 외치고 있다.
“내려!”
“안 돼. 이대로 도망간다.”
“젠장!”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김성남은 이만 빠득빠득 갈 뿐이었다.
* * *
“왔어, 왔어! 내가 드디어 북한산에 들어왔어!”
북한산은 이미 너무나 유명한 몬스터 스팟이 되었다.
너튜브에서 개인 방송 채널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라면 벼르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야 북한산을 촬영한다면 해외 이용자들까지 끌어들여 조회수 1억은 가뿐히 찍을 테니까 말이다.
“후원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궁금증을 낱낱이 파헤쳐 드리겠습니다.”
한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싱글벙글 해맑게 웃고 있다.
이 남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뻔하지.
“으아악!!”
우걱우걱—
거대한 멧돼지가 이 무모한 남자를 들이박은 후 맛있게 씹어 삼킨다.
인간을 먹어 치운 녀석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솟기 시작한다.
요력이 상승하는 것이다.
북한산에 잠입한 인간들을 틈틈이 잡아먹길 세 명째.
멧돼지는 더 이상 저급한 수준의 요괴가 아니다.
“으윽. 으으윽.”
충만한 요력이 차오른다.
몸이 부풀어 오르고 엄니가 거대해진다.
끓어 넘치는 힘에 취한 멧돼지.
더 많은 요력을 갈구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살이 더 고프군.”
등 근육을 씰룩대며 산을 어슬렁대는 멧돼지.
산속의 몬스터들도 녀석이 두려워 몸을 숨기고 잠자코 찌그러진다.
“피, 피 냄새가 난다.”
인간의 피를 제법 마시면 그 냄새를 추적할 수 있게 되는 법.
어딘가에서 멧돼지의 코끝을 유혹하는 달달한 피의 향기가 난다.
“꾸에엑!”
녀석은 그쪽을 향해 로켓처럼 달려간다.
* * *
김성남과 황기민은 풀숲에 몸을 숨겼다.
빌어먹을 멧돼지 새끼.
코끼리만 한 덩치에 힘은 골렘보다 더 셌다.
이 멧돼지 새끼도 보통 몬스터와 다르다.
박준범과 같은 꺼림칙한 느낌.
인간을 먹은 게 틀림없었다.
“일단 지원 요청부터…….”
황기민은 지원 요청을 보냈다.
요청을 보고 곧 다른 팀장들이 지원을 해 주러 올 것이다.
쿠웅!
황기민은 생각을 뚝 멈췄다.
숨이 멎으면서 머리도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제발 조용히 지나가라.
그렇게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여기 숨어 있었구나?”
멧돼지 녀석의 바위만 한 얼굴이 풀숲을 헤치며 스윽 다가왔다.
얼어붙었다.
소리 지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싸워야 한다.
하지만 몸이 굳었다.
김성남은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X발. 여기서…….”
“꾸에.”
멧돼지가 입을 쩍 벌려 황기민을 한입에 베어 먹으려 한다.
그때,
[성장]
갑자기 바닥에서 거대한 나무줄기가 솟아오른다.
나무줄기는 춤을 추듯 멧돼지의 온몸을 꼼꼼히 휘감기 시작한다.
“꾸에에엑!”
“뭐, 뭐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멧돼지의 허리와 목을 감싼 나무줄기는 강렬하게 살을 파고들었다.
숨통이 막혀 켁켁 대던 멧돼지는 결국,
추우욱—
혀를 길게 빼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세상에.”
황기민은 맥이 탁 풀려 버린다.
나무줄기는 마치 제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 다시 땅속으로 들어갔다.
“귀신에 홀린 것 같군.”
혹시나 싶어 멧돼지에게 다가가 확인 사살을 시도하려는 황기민.
그 순간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다.
저벅저벅—
“누구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편곤을 겨누는 황기민.
그 방향에서 나온 존재에 또 한 번 호흡이 멈춰 버린다.
너무나도 눈이 부시고 아름다운,
세상 그 어느 존재보다도 고결한 엘프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다, 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요?”
볼품없이 말을 더듬는 황기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압도되는 미모였으니까.
“나는 풍작의 땅 가이아의 마왕 가이아다.”
엘프는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목소리마저 고왔다.
게다가 특이한 힘이 서린 신비로운 목소리였다.
그나저나 마왕이라니!
“마, 마왕? 강철남과 같은 마왕?”
황기민은 놀라서 아무 말이나 튀어나와 버렸다.
그런데 그때,
“그대! 강철남을 아는가?”
좀 전까지 고귀한 표정으로 서 있던 그녀가 대뜸 텐션이 올라 묻는다.
“알다마다. 그런데 당신은 그 녀석을 어떻게 알지?”
“…친구다.”
엄청난 미모에 한계가 가늠이 안 되는 실력.
대체 강철남은 마계에서 무얼 하였기에 이런 친구를 사귄 거지.
“그대. 강철남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거라. 이 북한산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 강철남은 지금 여기에 없어.”
“무어라?”
“최근에 이사를 갔거든.”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서 부드러움이 사라졌다.
어지간히 재회를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어디서 그를 만날 수 있지?”
그렇게 묻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그때,
“철남 씨는 다른 산에 있어요.”
산 아래에서 올라오며 대화에 끼어든 사람은 다름 아닌 한지영.
지원 요청을 받고 뒤늦게 도착한 모양이다.
“그래? 어느 산이지?”
“그걸 왜 묻는 거죠?”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