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제 꿈이거든요
100.
선유가 헐리우드 진출을 위해 출국한다는 소식에 국내 언론은 뜨겁게 반응했다. 아마 백사장의 입김이 컸으리라는 건 자명했다.
하지만 여태껏 그의 이미지 탓에 사람들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오죽하면 어떤 댓글들은 헐리우드에 여자를 꼬시러 가서 역사에 남을 국제 카사노바가 될 거라는 둥, 나라망신을 시킬까 조마조마하다는 댓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네티즌들의 반응조차 잠식시킬만한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오자 분위기는 삽시간에 반전됐다.
“헐. 저 인간 뭐야? 혀에 버터라도 바르고 오디션 영상 찍은 거 아니야? 백치미 어디 갔어?”
얼마나 대단한 영상인지 어디 한 번 보자던 민규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고 곧이어 딱! 하는 매운 소리가 찰지게 울렸다.
“악! 왜 때려!!”
정통으로 뒤통수를 맞고는 짜증을 내는 민규를 소민이 째려보고 있었다. 여전히 한 손은 든 채로.
“너는 너보다 나이도 많은데 저 인간이 뭐야?”
“얼씨구? 이제 그렇고 그런 사이라 이거야?”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 예의에 문제잖아.”
뻔뻔한 얼굴로 그렇게 응수하는 소민을 보며 민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자 팔불출.”
“뭐? 그리고 솔직히 너 저 정도로 영어 잘 할 수 있어? 영어로 연기할 수 있냐고!”
“내가 배우냐? 쟤...”
쟤라고 하던 민규가 순간 움찔하며 자라목을 하고는 소민의 눈치를 살폈다. 금방이라도 다시 뒤통수를 때릴 것 같은 소민의 눈빛에 민규가 순발력 있게 대처했다.
“쟤애능 있는 저분이니까 가능하지. 암암. 그렇고말고. 짱이야!!”
그제야 슬며시 미소 짓는 소민을 보며 혀를 찬 민규가 물었다.
“근데 대체 저 모습은 뭐야? 백치 아니었어? 죽을 힘을 다해 연기하는 건가?”
“백치미가 예전 사장이 만든 컨셉이었대.”
“그럼 저 사람이 바보연기 전문가라고?”
“어.”
“헐, 대박.”
그렇게 중얼거린 민규의 반응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인터넷 반응은 뜨거웠다. 이걸 노리고 촬영한 영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은 빠르게 선유에 대한 기존 이미지를 지워갔다.
그리고 때를 맞춰 선유가 출국하기 전 촬영한 촬영현장의 뒷이야기와 퀴즈쇼, 그리고 선유의 생활기록부마저 매스컴을 탔다. 이미지를 탈바꿈해 갈수록 인기의 절정기를 갱신해가고 있는 선유로 인해 제일 우울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소민이었다.
거기다 드라마 초기부터 정작가의 드라마가 웰메이드 드라마라는 칭호를 얻게 되고 주연배우들의 호연이 극찬을 받으며 중국으로, 일본으로 판권계약을 한 까닭에 해외로도 인지도를 뻗어가는 중이었다.
“정말 싹 다 엎어버리고 있어요.”
- 불만이 가득한 표정인데?
“당연하죠. 한선유씨 인기가 늘어가고 있는데. 안 불안하겠어요?”
- 그걸 이제야 느끼는 거야?
“내가 진즉에 느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 그게 아니라 나는 이미 한참 전에 누구 덕분에 그런 기분을 다 느꼈었거든. 거기다 나는 가정사라는 치명적인 약점이라도 있지. 근데 나랑은 달리 누구는 그런 것도 없었거든. 얼굴도 예뻐, 착해, 캐리어 있지, 집안도 좋아. 내가 안 불안하고 배겨?
술술 나오는 그녀에 대한 애정 어린 말에 발그레 해진 얼굴을 한 소민이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오디션은 어떻게 되가는데요? 잘 돼가요?”
- 아직은 모르겠어. 한국 정서하고 좀 다른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거기서 금발 여자하고 눈 맞기만 해봐요.”
- 내가 누구하고 약속을 하고 왔는데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하겠어?
극악무도한 짓이란 말에 소민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일편단심인 남자라는 걸 누가 알았겠어요?”
- 내가 다 연기를 잘 하는 탓이지 뭐. 그걸 헐리우드 감독들이 좀 알아줘야 하는데.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 봐요. 아! 나 일 있어서 나가야 해요. 끊어요.”
영상통화를 하던 그녀가 일이 있다며 그렇게 전화를 끊었고 선유 역시 오후에 잡힌 오디션을 위해 호텔을 나섰다.
[한국에서 유명한 배우라구요. 그럼 편하게 지내도 될텐데 왜 굳이 헐리우드에 진출하려는 겁니까?]
[제 꿈이거든요.]
[헐리우드 진출이 꿈이란 말입니까?]
[아니요.]
[방금 꿈이라고 했잖아요.]
[정확히는 꿈으로 가기 위한 계단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 말은 헐리우드엔 별 미련이 없단 말입니까?]
[아니요. 전 꼭 헐리우드에 진출할 겁니다. 그리고 헐리우드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이름을 알릴 겁니다.]
[의지가 확고해 보이는데요.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게 꿈은 아니라면서요.]
[전세계에 꼭 알리고 싶은 게 있거든요.]
[뭘 말입니까?]
[그건 아마 제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 알게 되실 겁니다.]
[본인이 유명해질 거라 확신하나요?]
[그럼요. 목표가 있으면 저는 불도저처럼 밀고 가거든요. 저도 얼마 전에야 알게 된 거지만 제가 나름 의지력이 보통이 아니더라구요.]
선유가 오디션을 보는 감독과 제작사 임원, 각본 작가 앞에서 당당히 그렇게 말했다. 나름 인기 있는 배우여서 저렇게 자신만만한 것이라 생각하는지 심사위원들이 그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천하의 한선유가 사실은 속으로 벌벌 떨고 있다는 것을 그 누가 믿어줄까?? 사실 지금 그가 던진 대사는 반 이상이 연기였다. 아니 대사 속에 말은 진심이지만 어조 표정은 전부 연기였다. 배우이길 얼마나 다행인지.
"어땠어요? 형님."
"몰라. 묻지 마."
그렇게 말한 선유가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게 한국에서라면 누가 나를 거부하느냐고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입지이지만 그를 거의 모르는 타국에서 그게 쉬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뭐, 남들이 데뷔할 때 겪는 무명기를 나는 지금 겪는 셈이니까 억울하진 않아.”
호텔에 돌아온 선유가 의자에 앉아 준영을 향해 그렇게 말했고 준영이 그렇게 말하는 선유를 향해 일갈했다.
“형님. 표정은 엄청 불안하고 초초하거든요?”
“불안하고 초조한 건 맞지. 그럼 무명기에 있는 연예인치고 아, 나는 언젠가 확실히 뜨겠지. 이러냐?”
“뭐, 그렇긴 하지만요. 형님도 힘들잖아요. 그러지 말고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면 안 돼요?"
준영의 물음에 선유가 그를 쳐다봤다. 준영이 그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불쌍한 표정으로 선유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사장이 오래?”
“그건 아니구요. 사장님은 얼마든지 괜찮다고 하셨어요.”
“그럼 왜?”
“이제 저는 여기 음식 도저히 못 먹겠어요. 엄마가 해준 김치 볶음밥도 먹고 싶고, 묵은지 찌개도 먹고 싶어요. 아니 보기만이라도 냄새만이라도 맡았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한인식당에서 파는 건 그 맛이 아니라구요.”
덩치만큼이나 탐스러운 식욕을 자랑하는 준영이 정말 먹고 싶다는 듯 그렇게 말하자 선유가 준영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뭐, 준영은 그렇게 쉽게 뚫어질 두께가 아닌지라 끄덕도 없었지만.
“야, 뭐 못 먹어? 아주 사기를 쳐라. 아침부터 치즈크러스트 피자를 한 판 다 먹은 놈이 뭐? 어쩌구 저째?”
“그건 먹을 게 없으니까 그런 거죠.”
여간 억울한 게 아니라는 듯 그렇게 외치는 준영의 말에 선유가 그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너는 내가 중요하냐, 네 입맛이 중요하냐?”
“제 입맛이요. 형님은 제가 없어도 건강하지만 제 입맛은 제가 안 돌봐주면 금방 건강이 안 좋아지잖아요.”
“야, 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는 준영의 모습에 선유가 울화통을 터뜨렸다.
“아, 솔직히 말해서 엄마도 보고 싶고, 여자 친구도 보고 싶다구요.”
선유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던 준영이 절규하듯 그렇게 말했다.
“야, 맨날 컴퓨터 꿰차고 방에 들어가 앉아서 여친이랑 화상 채팅하는 놈이 그게 할 소리냐? 대체 누구냐 네 여친이? 얼마나 예쁘면 아주 허구한날.”
“아, 그걸로 성에 차요? 그리고 형님도 노트북으로 소민누님이랑 화상채팅하잖아요. 그걸로 그리움이 해결 돼요? 소민누님을 실제로 보고 싶지 않냐구요? 그러다 바람이라도 나거나 누가 채가면 어쩌려 그래요?”
다다다 내뱉은 말에 선유의 모든 행동이 일순 딱 멈추자 준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걱정은 되는 모양이지.
“바람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네 여자 친구는 너 없으면 바람 피냐?”
“형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네가 먼저 채소민이 바람날지도 모를 여자로 만들었잖아.”
“아. 알겠어요. 죄송합니다.”
여자 친구를 건드린 건 준영에게도 상처인지 팩하고 사과같지 않은 사과를 던지더니 준영이 방으로 들어갔다.
“야! 나는 뭐 성에 차는 줄 아냐?”
사라지는 준영의 뒤로 선유가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흩어지는 혼잣말.
“근데 채소민이 얌전히 기다려주는데 빈 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 기다리는 보람은 있게 해 줘야지.”
선유가 소파에 기다림에 지친 몸을 기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