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99화 (98/105)

99. 한선유씨 꿈이 뭔데요?

99.

29살이 되도록 군대를 안 갔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느닷없는 그의 질문이 그녀에게 그런 혼란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그런 소민의 불안을 안심시키는 선유의 말이 나왔다.

“군대는 나 발작하고서 쉴 때 갔다 왔어.”

“근데 그런 예를 왜 들어요?”

“아무튼 대답해봐. 나 같은 남자친구면?”

“한 5,6개월은 일단 기다려보겠죠. 휴가 나와서 어떻게 하는지 잘 관찰하고. 나머지 기간은 그 이후에 결정할 것 같은데요?”

“22개월 중에 6개월이면 1/4도 못 기다린다는 거네?”

다소 실망한 어조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선유를 향해 소민이 물었다.

“군대도 갔다 왔다면서 그걸 왜 물어요?”

“채소민 내가 당분간 일이 있어서 지금보다 더 못 보게 될 지 몰라. 얼마나 기다려 줄 수 있어?”

그의 말에 세상이 음소거처리라도 되는 듯 멍멍해졌다.

“무슨 일인데요?”

“오디션을 좀 보려고 해.”

“오디션을 보는데 왜요? 금녀의 집이라도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국내가 아니라서 그래.”

“그럼 그동안 다른 스케줄은요?”

“비웠어. 대표가 다 비워줬어.”

그제야 소민은 백사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선유가 해달라는 대로 해줄 생각이에요. 자기 이미지를 엎고 싶다고 하니까 그래 줄 거예요. 그동안 그 녀석이 많이 힘들었을 거 아니까 이제는 해달라는 대로 해주고 싶거든요. 소민씨도 도와주지 않을래요?”

그게 단순히 선유의 마음을 받아주라는 소리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선유가 이미 그 때부터 계획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게 하고 싶은 꿈이에요?”

“꿈은 아니고 꿈으로 가기 위한 초석이라고 봐야겠지.”

“얼마나 걸릴 것 같은데요? 정말 22개월이나 걸려요?”

“글쎄...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말해줄 수가 없어. 그래도...”

“그래도?”

“그 꿈을 이루는 건 채소민이랑 같이 하고 싶으니까. 내 욕심이지만 기다려줬으면 좋겠어.”

“한선유씨 꿈이 뭔데요?”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어.”

“왜요?”

“아직은 내가 그 꿈을 이루기엔 너무 초라해서. 내가 조금 나은 사람이 되면 그 때 알려줄게.”

“뭐 예전보다 훨씬 낫기만 한데요?”

“그러니까. 더 나은 사람이 돼야 해. 이럴 줄 알았으면 다 얘기하지 말 걸 그랬어.”

“뭐를요?”

“내 흑역사.”

“그게 어디 한선유씨 탓도 아닌데 새삼 뭘 그래요.”

“그래도 혹시라도 내 흑역사가 채소민한테 악영향이라도 줄까봐서 그래.”

그렇게 말하는 선유의 얼굴을 소민이 쳐다봤다. 그리고는 팩을 한 잔여물이 남은 볼을 찰싹찰싹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도 팔자네요. 한선유씨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잖아요. 과거 탓을 하면서 그 과거 때문에 일어설 수 없어 하는 사람보다 얼마나 훌륭하고 멋진데 그래요. 그리고 한선유씨 흑역사요? 흥! 어디 와서 내 발목을 잡아 보라죠? 내가 넘어지나.”

그녀의 당찬 대답에 선유가 자신의 양 볼을 두드리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말했다.

“그래. 고마워.”

“뭐가요?”

“기다려준다는 소리잖아.”

“내가요?”

“응. 방금.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함께 해주겠다는 소리 아니었어?”

누가 전교 상위권에서 놀던 머리 아니랄까봐 빙빙 돌려 말했는데도 숨은 뜻을 콕콕 잘도 짚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얘기하기에는 뭔가 민망하고 창피하기도 한 마음에 소민이 저도 모르게 이런 대사를 내뱉고야 말았다.

“꾸, 꿈보다 해몽이네요. 아무튼 하는 거 봐서요.”

소민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선유는 아까보다 더 이글거리다 못해 지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채소민이 나를 이렇게 아끼는 줄 이제야 알았네. 이제껏 왜 몰랐나 몰라?”

싱글싱글거리며 그렇게 말하는 선유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진 소민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빨리 모니터링이나 해요. 내일 촬영장 가서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얘기하려고 그래요?”

“뭐라고 하긴 뭘 뭐라고 하겠어? 예쁜 사람 얼굴 보느라고 내용은 눈에 안 들어오더라고 하지?”

“허, 헛소리 하지 말구요. 자꾸 이러면 나 갈 거예요?”

부들거리는 목소리로 으름장을 놔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꾸만 말이 그렇게 나왔다.

“알았어. 알았어. 보면 되지.”

그 말과 함께 선유도 조용히 드라마를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소민과 투닥거린 시간이 있는 탓에 드라마는 어느덧 중반이었다. 그리고 촬영장에서 서로의 호흡이 잘 맞아 떨어진 덕분인지 드라마는 시간이 언제 갔나 싶게 훌쩍 끝나버렸다. 그리고 모니터링을 하라고 잔소리를 하며 모니터링을 안 하면 간다던 소민은 어느새 그의 소파에 몸을 기대고는 색색 잘도 자고 있었다.

“지금 네 남자 옆에서 잠이 오냐? 채소민이니까 고전적인 드라마스러운 유혹법은 아닐 거고 정말 자는 거지?”

그의 물음에도 소민은 얕은 숨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녀가 기대고 있는 소파마저 질투가 나는지 소파에 기댄 소민의 고개를 자신의 어깨로 향하게 한 선유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채소민, 채소민이 내 꿈을 알고 실망하거나, 내 꿈에 동참해주지 않겠다고 할까봐 말 못했거든. 지금은 채소민이 자고 있으니까 하는 말인데...”

그렇게 말한 선유가 자신의 어깨에 기댄 소민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기댔다.

“우리 나이가 있으니까 앞으로 한 40년쯤 후에도, 뭐 그 이상이면 더 좋긴 한데 어쨌든. 채소민이랑 이렇게 있을 수 있으면 좋겠어. 너랑 우리 집에서, 이렇게 같은 의자에 앉아서 서로 기대앉아 있을 수 있으면 좋겠어. 너는 내 어깨에, 나는 네 머리에.”

그렇게 말한 선유가 무언가 망설이다 다시금 입을 떼었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이렇게 기대앉아서 너 닮은 딸이랑 너 닮은 아들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고. 거기서 더 욕심을 부리자면 너 닮은 손주들도 있었으면 좋겠고.”

그렇게 말하던 선유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상상만 해도 좋아 죽겠는데 너는 내가 너무 꿈이 작다고 생각할까봐 말 못하겠더라고. 내 꿈은 그냥 우리 아버지랑은 다른 좋은 아버지가 되는 거거든. 가족들을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거. 근데 내가 그런 아버지, 그런 가정에서 자란 게 아니라서...”

선유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소민이 양팔로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뭐야, 알고 보니까 꿈이 되게 야무진 남자였네.”

“아, 안 잤어?”

“꿈이 되게 큰 사람이었네요? 한선유씨? 근데 이거 가만히 듣고 있으면 꼭 프로포즈같은 거 알아요?”

“프,프로포즈는 무슨.”

“어? 아니에요? 프로포즈라고 한 거면 나름 감동적이었는데.”

“겨우 이런 거에?”

“겨우라니요?”

깜빡했다. 그녀가 채소민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만약에 이게 프로포즈였다면 대답은?”

“당연히 땡 탈락이죠.”

아까의 감상평과는 판이하게 다른 답에 선유가 황당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감동적이라면서?”

“아무리 감동적이면 뭐 해, 나 잔다고 생각하고 얘기한 거잖아요.”

그녀의 말에 선유가 피식 웃었다.

“뭐예요? 그 웃음은?”

“채소민. 내가 아무리 우스워보여도 나도 배우거든? 자는 거랑 자는 연기는 구분할 수 있어.”

그의 말에 소민이 입을 딱 벌렸다.

“그럼 안 자는 거 알면서 일부러 그랬다는 거예요?”

“뭐, 상상은 알아서.”

“아니죠? 뻥이죠?”

“알아서 상상하시라니까?”

“못돼 먹었어.”

“원래 그랬잖아. 그나마 채소민 때문에 좀 착해진 거고.”

“그래요. 아무튼 그건 한선유씨도 프로포즈 아니라고 했으니까 됐고.”

“너무하는 거 아니야?”

“대신!”

그의 어깨에서 발딱 일어난 그녀가 소파 앞에 소파 테이블로 가 테이블 위에 살며시 앉아 선유를 바라봤다.

“대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선유가 되물었다. 되묻는 선유를 바라보며 소민이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더니 선유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이거 되게 위험한 도발이야, 채소민. 알아? 여긴 내 공간이라구. 자꾸 이런 식으로 도발하면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굉장히 큰 오예야.”

잘못하면 한순간에 둘 모두가 재너울이 되어 사라질 것 같은 분위기를 어떻게든 타파하려 선유가 그런 우스갯소리를 했고 소민이 키득거리며 물었다.

“이러면 어쩔 건데요?”

그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소민이 그의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그리고 그 짧은 입맞춤을 기점으로 삽시간에 분위기는 몽글몽글에서 모노톤이던 벽지가 붉은 색인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살며시 닿았던 그녀의 입술이 떨어져나가려는 순간 선유가 순식간에 소민을 잡아채 소파에 눕히고는 그대로 다시금 입술을 맞댔다. 그 탓에 여기가 소파인지 아니면 침대인지 알 수 없는 야릇한 자세가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소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기가 가득한 입맞춤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녀가 남긴 베이비 키스를 성숙한 여인의 키스로 성장시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거세게 휘몰아치는 그의 입술이 정말 화인을 찍는 건 아닌가 싶게 뜨거웠다. 이전 어느 키스와도 비견할 수 없는 그 열기에 손끝까지 바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장난처럼 시작한 일이 그렇게 이어지자 그 분위기를 만든 소민이 제일 먼저 그 분위기에 압사할 것만 같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선유의 눈동자가 항상 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방금 얼핏 마주친 시선에서 본 그의 눈동자에 비하면 그건 전혀 검은 게 아니었다. 검은 열기가 있다면 어떤 것일지 확실하게 알 만한 열기를 담은 그 눈동자가 그녀를 오롯이 담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꼿꼿이 마주할 자신이 없어 질끈 눈을 감기가 무섭게 그의 뜨거운 입술이 귓가에 닿았다.

“아!”

그 입술이 그대로 자신의 귓불을 꽉 깨물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여린 귓불을 괴롭히며 선유가 속삭였다.

“약속해.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겠다고.”

“내가 왜요?”

“네가 기다린다고 하면 난 죽을 힘을 다해서 목표를 빨리 달성하려고 하게 될 테니까.”

그의 답에 소민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음에 드네요. 내가 한선유씨 꿈이고, 목표라는 거.”

“그러니까 기다리겠다고 약속해.”

귓가에 그렇게 달콤하게 강요하는 목소리에 소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 없으면 꿈도 무너질지 모른다는데 기꺼이 해드려야죠. 그러니까 가능한 빨리 돌아오겠다고 약속해요.”

“약속하지.”

그 약속의 말을 끝으로 선유의 뜨거운 입술이 다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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