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95화 (94/105)

95. 메롱 하지 마

95

“한선유씨. 있잖아요. 내가 머리가 좋아서 그러는데 한선유씨가 어떤 차인지는 알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선유가 그녀를 올려다봤다.

“한선유씨는 차가 아니에요.”

“뭐?”

이건 뭔 또 알 수 없는 마법주문 같은 소리인지 그는 또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봤다. 역시 가족문제 가지고 얘기를 한 게 마음에 걸리는 건가 싶었는데 그녀가 씨익 웃었다.

“리무진은 내가 할 거예요.”

“뭐?”

“아무리 봐도 한선유씨가 리무진이었던 건 맞는 것 같은데... 한선유씨랑 그 리무진을 같이 타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타는 거라면 좀 그래요. 그러니까. 내가 할게요. 리무진.”

그녀의 말에 선유가 멍청하게 듣고 있다가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녀의 양 볼을 꽉 집었다.

“아야!! 애으애혀!(왜 그래요!)”

“이 여자야. 그렇게 당해놓고 또 그런 소리나 하냐. 앞으로 누가 그 쪽보고 리무진 하라고 하면 그 때야말로 고자킥을 날리라고. 지금 누구더러. 하!”

기가 막힌 듯 웃는 선유의 모습에 소민이 그의 팔을 힘겹게 떨쳐내며 말했다.

“당하긴 누가 당했다 그래요? 아까 내가 한시준 뺨에 천연 볼터치해준 거 못 봤어요?”

“그래. 그래. 채소민. 그래서 말인데. 너 의절해라.”

“네에?”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나빠. 나를 그런 삼류랑 동급으로 놨다는 게 열 받는단 말이지. 그러니까 의절하는 게 어때?”

“뭐요? 지금 나보고 소녀가장 되라는 거예요?”

“아니지. 나이가 있는데 소녀가장은 무슨? 그리고 채소민이 왜 소녀 가장이야? 내가 있는데?”

뻔뻔스럽게 그렇게 말하는 선유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으면서도 소민은 지지 않고 종알거렸다. 그녀의 빽을 믿고.

“내가 한선유씨 뭘 믿구요?”

“아, 그러니까 못 믿겠다?”

“그 나이 먹고 자기 자존심 조금 손상됐다고 여자 친구한테 가족이랑 의절이나 하라고 하고. 그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맘 편히 믿어요?”

괜히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새삼 생각하자니 부끄러워 그랬는데 선유는 한껏 진지한 표정이었다.

“뭐, 단순히 자존심상해서는 아니야.”

“그러면요?”

“일종의 예고편이야.”

“예고편?”

“의절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 말에는 출가외인이라는 다른 표현이 있지.”

“에?”

“그나저나 본편을 채소민한테 보여주려면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뭔 소리예요?”

“그런 게 있어.”

소민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습을 즐기며 선유가 씨익 웃었다. 그는 훌륭한 리무진이 될 생각이었다. 소민이 내리지 않게. 아니, 내릴 생각 따위 하고 싶지도 않게.

*

드라마 첫 방영 전, 예고편만으로도 네티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촬영 중에 짬을 내 소민과 같이 집에서 첫 화를 본 선유는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아무래도 잘못 됐어.”

“뭐가요?”

“내가 캐스팅 된 드라마가 감성 느와르라는 게 잘못인 것 같아.”

“왜요?”

“그야 당연히!!”

당연히 라는 말에 물음표를 얼굴에 단 소민이 그를 쳐다보자 그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채소민이 질투하는 걸 볼 수 없으니까.”

“헐.”

“그거 알아? 채소민이 질투하는 걸 보는 게 삶의 낙이 될 것 같은 거?”

“한선유씨 병원 좀 가 봐요.”

“왜? 난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한데?”

“그 병원 말고 정신병원이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혀를 낼름 내밀었다. 메롱을 하는데 유혹적이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채소민 메롱 하지 마.”

“왜요?”

“나 먹으라고 줄 거 아니면 하지 마. 자꾸 먹고 싶어지니까.”

그 선유의 말에 잽싸게 혀를 집어넣은 소민이 얼굴을 붉히다가 이내 화제를 돌렸다.

“아! 그래요. 이제 촬영도 거의 끝물이잖아요. 촬영 끝나면 뭐할 거예요?”

“오디션 볼 거야.”

“네?”

“오디션 볼 거라구.”

되물어도 다시 반복되는 같은 답에 소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제는 어딜 가든 바로 캐스팅이 될 텐데 아니, 오히려 캐스팅을 하고 싶어 안달일 텐데 오디션이라니?

“무슨 오디션이요?”

“그런 게 있어. 자! 채소민 이제 집에 가야지?”

“집에 가라구요?”

“그럼? 안 갈 거야? 아니지. 안 가고 싶어도 내가 오늘은 집에 보낼 거야.”

그렇게 말한 그가 주섬주섬 그녀의 가방을 챙기더니 그녀에게 안겼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녀는 현관에 서 있었다.

“자, 그럼 채소민! 잘 가.”

“나 데려다 주지도 않는 거예요? 이 밤에? 위험한데?”

“아, 그러네.”

그 말에 소민이 반짝반짝하는 눈으로 그를 봤다. 촬영장에서 그의 차를 타고 바로 그의 집으로 온 터라 차는 대리운전 기사를 통해 집으로 보내버려 그녀는 지금 차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그와 그녀의 집은 꽤나 먼 거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주먹으로 다른 손을 가볍게 내리치며 말했다.

“콜택시 불러 줄게.”

“나보고 지금 택시 타고 가라구요?”

경악을 금치 못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모범으로 불러줄게.”

결국 그녀는 선유가 요금을 따따블에 잔돈은 팁이라며 돈을 지불한 모범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먹구름 가득한 얼굴로 집에 돌아온 그녀를 맞이한 건 그의 동생 민규가 아닌 다른 인물이었다.

“오~ 딸!”

“아빠?”

“딸~ 반가워.”

해맑기 그지없는 그녀의 아버지 채종환 감독이었다. 그녀가 두리번거리며 그의 주변을 살폈다. 아마 수많은 그의 칭호 가운데 그에게 어울리는 칭호가 있다면 팔불출을 넘어 아내천치라는 칭호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 아버지의 곁에 엄마가 없었다. 엄마 없이는 돌아올 아버지가 아닌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여행을 갈 때는 두 사람이 함께 떠났는데 돌아온 건 아버지뿐이었다. 물론 엄마는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해외에 있는 시간이 많긴 했지만.

“엄마는?”

“흥. 그 여자는 이제 네 엄마 아니다.”

“싸웠구만.”

“아니. 그 여자가 애정이 식었어.”

“응? 뭐?”

“아니. 잠자기 전에 굿나잇 키스도 빼먹고, 밥 먹을 때 맛있게 먹으라고 웃어주지도 않더라니까?”

“애정이 식으면 그래?”

“그럼 그런 거지!”

아버지 채종환 감독의 말에 소민이 자못 심각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시무룩한 표정이 돼서는 방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렇다면 선유도 애정이 식은 거란 소리인가 싶은 것이다.

아니 리무진이 되겠다고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역시 과거를 다 들키고 가족관계도 다 들켜서 신비감이 사라져서 그런 건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그녀의 아버지 채종환 감독이 다시 발랄해진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아 참, 딸!!”

“왜?”

“아빠 이번에 영화인들의 밤 파티에 가는데 같이 가주면 안될까나?”

“내가?”

“그럼!! 딸이 가서 아빠 얼굴을 살려줘야지.”

“언제는 엄마랑 갈 거라며.”

“너희 엄마 아니야.”

“엄마 전화 오면 바로 나 버릴 거잖아.”

“아니야. 이번엔 못 버려. 너네 엄마 아니 그 여자가 파리 프레타포르테 가야 한다고 못 간다잖아.”

아, 결국에 아버지가 삐친 원인은 그거였다. 일이 소중해? 내가 소중해?를 하고 있는가보다.

“나 참. 결국엔 엄마 못가니까 삐친 거구나?”

“삐,삐치긴 누가? 이제 늙은 여자보다는 젊은 여자가 좋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아~ 그러셔요?”

믿지 않는 빛이 역력한 말투로 그렇게 말한 소민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으로 들어온 소민이 선유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는 뭘 하는 중인지 전화를 받지를 않았다.

그리고도 그 후로 여러 차례 소민이 전화를 해도 그는 받지를 않았고, 그 다음날에도 전화가 없었다. 결국 밤새 기다리던 소민은 말 그대로 다크 서클이 아름답게 자리 잡은 눈을 가질 수 있었다.

흡사 스모키 화장을 뒤집어 한 것 같은 눈에 그녀의 동생 민규는 아침부터 밥맛이 떨어진다며 짜증을 냈다. 그런 민규를 보던 소민이 조용히 말했다.

“민규야. 나는 아마 아빠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 받았나봐.”

“뭐? 그럼 옆집 아저씨 유전자 받았겠냐?”

“그게 아니라. 나 의처증 걸린 여자 같다니까?”

“왜?”

“아니. 한선유가 어제 태워다 주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으니까 막 화가 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다니까?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흠...”

가벼운 콧소리를 내며 그녀의 말을 듣던 민규가 말했다.

“기다려. 가끔 남자에겐 자유가 필요한 법이지. 기다려.”

“바람을 피워도?”

“미쳤냐? 바람 피면 얄짤 없이 버려야지. 그건 인간이 아니야. 쓰레기지.”

그렇게 말한 민규가 소민이 듣지 못 할만큼 낮게 중얼거렸다.

“한선유놈 바람 피기만 해봐라. 유전에 갖다 묻고 기름에 튀겨 죽일 테다.”

“네. 캐스팅 디렉터 채소민입니다.”

소민이 캐스팅 디렉터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 전화를 받고 있는 것을 선유가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아... 제가 이번에는 조금 도와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수화기를 든 채로 고개를 꾸벅하는 모습에 선유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일을 거절하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차라리 채소민이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하는 말을 믿는 게 더 현실적일 것 같았다. 한숨과 함께 통화를 마친 소민을 향해 선유가 물었다.

“채소민.”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자신을 향하는 눈망울에는 평상시와는 달리 어쩐지...

“왜요.”

명백한 불만이 얹혀 있었다. 말투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왜 일을 거절한 거야?”

“그걸 제가 왜 한선유씨한테 얘기해 줘야 하는데요?”

“뭐?”

“한선유씨도 아까 제가 어제 왜 전화 안 받았는지 물었는데 대답 안 해줬잖아요.”

아까 소민이 얼굴을 보자마자 어제 왜 전화를 안 받았는지 물었었는데 대답해주지 않았다고 그걸 계속 마음에 담아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왠지 창피했다. 이건 그래, 서프라이즈 선물처럼 짠하는 그런 방식으로 보여줘야만 했다. 그래야 효과 두 배가 될 듯 하니까.

“알았어. 안 물을게.”

“정말요?”

“어.”

“왜요?”

안 묻겠다니까 오히려 당황한 기색인 소민이 그렇게 말했고, 선유는 덤덤하니 말했다.

“내가 안 말해주면 말 안하겠다며. 근데 난 말 안할 거거든.”

그의 말에 소민이 입을 꼬옥 다물고는 그를 노려봤다. 이제는 저렇게 눈에서 레이저를 뿜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도 예뻐 죽겠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한선유씨. 빨리 코디 알아봐요.”

뭔가 한 소리할 것 같던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살살 자극하면 뭔가 털어놓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확실히 여우가 틀림없었다. 구미호? 구미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아마 꼬리가 19개도 넘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왜?”

“저 당분간 촬영현장 못 오거든요.”

“걱정 마. 곧 촬영 끝나. 조금만 참으면 돼.”

“아니요. 그 조금만도 어려울 것 같아서 그래요.”

“왜?”

“제가 이제부터 엄청, 몹시, 많이 바빠질 거거든요.”

“일도 잘랐는데 뭐가 바빠?”

“그럴 일이 있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한선유씨, 남은 촬영 잘해요. 파이팅!!”

“이 봐! 어디가?!!”

뒤에서 자신을 향하는 선유의 외침을 외면한 소민이 자신의 차로 다다다다 달려갔다. 그리고 허탈한 얼굴로 선유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흥, 나한테 애정이 식은 게 틀림없어. 후회하게 해 줄 테다.”

그렇게 말한 소민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예약 좀 할게요.”

그리고 전화를 끊은 소민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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