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94화 (93/105)

94. 똥차가면 리무진이 온대거든

94

“안녕하세요. 소민씨.”

“아, 네! 안녕하세요.”

“오늘도 나오셨네요?”

“네... 뭐.”

“소민씨가 이렇게 매일매일 와줘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별 말씀을요.”

“소민씨 덕분에 주연도 해보고, 고마워요. 언제 밥 한 번 사야 하는데.”

그게 시작이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밥 한 끼 먹었으니 답례로 차 한 잔 사고, 차 한 잔 마셨으니 다시 밥 한 번 사고. 만남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만남은 소민에게는 그 만남만큼 싹트는 호감이 되었고, 시준도 그런 거라 믿었다.

데이트랄 건 없었다. 일일드라마 촬영을 찍는 현장은 한시도 쉴 틈이 없으니까. 그래도 괜찮았다. 그냥 같이 있는 시간 자체가 데이트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녀가 일을 좋아하는 만큼 시준도 일을 좋아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하루 하루 시준에 대본에 밑줄을 쳐주고 촬영장에서 잡일을 해가면서 있어도 마냥 좋았다.

“그게 문제였던 거죠. 내가 내 일은 뒤로 하면서... 너무 푹 빠져가지고.”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을 선유가 잡아 끌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민을 배려해서인지 선유는 그녀를 정면으로 안는 대신 뒤로 끌어 안았고, 그녀를 감싸 끌어안은 팔로는 어깨를 다독였다. 다독이는 손길에 힘입어 소민은 말을 이어갔다.

일일드라마 촬영이 끝나갈 때 쯤 잠시 쉬는 시간에 곁에 있는 소민을 보며 시준이 중얼거렸다.

“이 드라마도 끝나가네.”

“아쉬워?”

“아쉽지. 이거 끝나면 나 이제 또 뭘로 먹고 사나.”

“이번 드라마 호응 좋으니까 또 일 들어오겠지. 너무 걱정 마. 잠깐 쉬고 그동안 연기 공부도 하고 그러면 돼지.”

그렇게 말하는 소민의 말에 시준은 답이 없었다. 한참이나 조용히 있기에 고개를 들자 시준이 그녀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얼굴에 뭐가 묻은 건가 싶어 얼굴을 매만져 봐도 딱히 묻을 만한 일을 하지도 않아서 짐작이 가는 게 없었다.

“너... 아버지가 채종환 감독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이야?”

그 말에 소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맞으면, 청탁이라도 해달라고 하게?”

“청탁이라... 네가 아버지한테 얘기 좀 해보면 어때?”

“뭐?”

“너희 아버지 작품 찍을 거잖아. 거기에 나 좀 꽂아봐달라고.”

“우리 아버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아무나 캐스팅하시는 분 아니야.”

“네가 소개하면 그래도 딸 부탁, 거절하시겠어?”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왜? 넌 내가 놀았으면 좋겠단 거야?”

“그게 아니라... 시준씨 앞으로 이거 말고도 더 잘될지도 모르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

“생각 해 봐, 긍정적으로. 어차피 캐스팅은 하셔야 하잖아.”

그렇게 말한 시준은 촬영 스텝의 부름에 소민을 남겨두고는 멀어져 갔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더 반복됐다. 그래도 소민은 시준을 믿었다. 아니, 좋아하니까 믿고 싶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건 하루면 충분했다. 그 날도 촬영장에 도착한 소민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발을 내디뎠다.

어제도 싸우다시피하고 헤어져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오늘은 차분하게 잘 얘기해 볼 생각이었다. 그녀가 왜 그를 굳이 아버지 영화에 오디션을 보라고 하는 건지. 그녀가 내딛은 발이 땅에서 떨어지기 전에 목소리 하나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채소민씨... 맞죠?”

“누구...세요?”

“잠깐 얘기 좀 할까요?”

누가 봐도 부티가 줄줄 흐르는 여자가 그녀를 붙잡았다. 테이블을 하나 사이에 두고 소민은 자신의 앞에 앉은 여자를 살폈다.

이런 상황, 드라마에서 많이 보기는 했지만 생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앞에 앉은 여자는 엄마라기엔 젊었고, 애인이라기엔 나이가 있어 보였다. 아니 그것보다도 시준에게서 어떤 언질도 받은 적이 없기에 소민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소민이 자신을 살피는 걸 충분히 무시한 뒤 그녀의 입이 열렸다.

“나, 한시준씨랑 결혼할 사이예요.”

“네?”

“한시준씨랑 결혼할 사이라고요.”

“무슨...”

애인이라고만 해도 황당할 노릇인데 결혼할 사이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소민은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만 같았다.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한시준씨는 저랑...”

“몰랐어요? 시준씨가 당신이랑 왜 어울려줬는지? 그 사람이 원하는 걸 주지도 않을 거면 놔주는 게 어때요? 나는 그 사람이 원하는 걸 줄 수 있거든요.”

“원하는... 거요?”

“그래요. 한시준씨가 갖고 싶은 게 뭔지나 알아요? 그 사람이 채소민씨 좋아한다고 단 한 번이라도 말한 적 있어요? 그럴 리가 없지. 그 사람이 갖고 싶은 건 여자가 아니에요. 돈 많고, 권력도 갖다 줄 수 있을 만한 그런 여자지.”

“아닐 수도...”

“그런 거 없이도 사랑한다? 한시준이? 그 남자가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그 쪽 배경만 보고 접근한 사람인데.”

앞에 앉은 여자의 말에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소민이 손을 뻗어 물컵을 들었지만 손은 그녀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컵이 플라스틱이길 망정이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깨졌을 게 분명했다. 바닥에 나뒹구는 컵을 주울 생각도, 발밑에 번진 물기의 차가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괜히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거예요. 나 그 사람 아이 가졌어요. 뭐, 굳이 따지자면 난 그 남자가 갖고 싶어서 가진 거고, 그 남자는 대기업 회장의 고명딸의 사위라는 타이틀 내지는 대기업 회장의 고명딸의 자식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얻고 싶어서 가진 거니까 서로 목적은 다르긴 해요. 그래도 이 경우는 누가 승자인지 알겠죠? 끝까지 하려면 해봐요. 그런데 끝까지 가려면 그 사람이 달라는 거 다 내놔야 할 거예요. 나랑도 맞서야 할 거고, 그럴 자신 있으면 하라구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멀어지는 뒷모습에는 소민에게 네 깟거 아무리 해봐야 한시준은 마음은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 쫓아가 따질 수도 없었다. 그래,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쓰레기같은 놈.”

더 패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낮게 으르렁거리는 선유에게 몸을 기대며 소민이 말을 이었다.

그 길로 시준을 불러 확인하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다른 일을 한다며 차일피일 미루는 소민을 먼저 찾아온 건 한시준이었다.

“생각해 봤어?”

“뭘?”

“너네 아버지 영화에...”

“그만! 시준씨! 나 보면 할 얘기가 그것 밖에 없어? 시준씨 능력이면 오디션 봐도 돼. 정정당당하게 인정받는 게 더 좋지 않아?”

“정정당당? 편한 길 냅두고 내가 왜? 그리고 솔직히 채소민 네가 캐스팅 디렉터 하는 것도 아버지를 뒤에 업고 있으니까 가능한 거잖아.”

“뭐?”

“너는 아버지 후광 뒤에 업고서 해도 되고, 나는 왜 안 되는데? 네 덕 좀 보자고.”

도를 넘어선 시준의 말에 소민이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아프더라도 확인할 건 확인해야했다. 상처는 남아도 미련은 없게. 구질구질해지지 않기 위해서.

“이러려고... 이러려고 나 만난 거니? 내가 채소민이라서가 아니라 채종환 감독 딸이라서?”

“몰랐어? 너는 날 정상까지 올려다 주면 돼. 편안한 고급 세단처럼 정상까지 안전하게.”

이미 다른 여자에게 들어 너덜거리는 가슴이었다. 그런데 시준은 그녀의 너덜거리는 상채기를 아예 잔인하게 잡아 뜯어버렸다. 충분히 예상한 아픔이지만 아픈 건 아픈 거였다. 그녀가 아프거나 말거나 시준의 말은 늘어지고 있었다.

“이러려고 만난 거냐고? 어떡하지? 원하는 건 그 이상인데.”

그 말에 소민이 애써 깊이 파인 상처를 숨기고는 웃음을 물었다. 최대한 차갑길 바라면서.

“너한테 우리 아버지 영화? 과분한 소리하고 자빠졌네. 내가 연줄 이런 걸로 일어서는 사람을 경멸하는데 이제껏 참아 줬는데 왜 정신을 못 차리니?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마. 안 그럼 한시준이 나한테 껄떡댄다고 기자들한테 찔러줄 테니까. 네 그 잘난 연기 계속 하고 싶으면 알아서 해.”

“뭐?”

“꺼지란 얘기야.”

그렇게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러면서도 기대했다. 사실이 아니라고 쫓아와서 잡아주기를.

“나 되게 바보같죠?”

이제야 꺼내 보이는 상처는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다. 그리고 상처를 보는 사람은 심각한 상처를 치료하는 의사처럼 더 없이 진중했다.

떨어져 내리는 그녀의 눈물이 양껏 떨어질 수 있게 그녀를 다독이면서도 네 탓이 아니라고 상처를 치료하며 다독이는 손길은 너무도 따스했다.

한참이나 울고 난 그녀가 그의 가슴에 거의 탈진한 듯 기대자 그제야 선유가 낮은 목소리로 소민에게 말을 건넸다.

“채소민, 그거 알어?”

“뭐를요?”

“똥차가면 리무진이 온대거든.”

선유의 말에 소민이 가만히 그에게 기댔다. 좀 더 깊게 자신에게 묻혀오는 소민을 든든하게 받으면서 선유가 말을 이었다.

“근데 처음부터 리무진을 타는 사람은 드물어. 안 그래? 남녀관계가 아니라도 웬만한 금 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는 한 처음부터 리무진 타는 거. 쉽지 않지. 뭐, 태어날 때부터 리무진 타는 인생이어도 남녀관계에서도 그러란 법은 없는 거고.”

그의 말에 소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에게는 첫 차가 시준이었고, 그 첫 차는 똥차였다.

“근데 그 다음에 리무진이 올지 뭐가 올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거야. 그리고 만약 리무진이 왔다고 쳐도, 리무진 안에서 잡아타라고 끌어도, 본인이 안타면 다 소용없는 거야.”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자신도 리무진은 아니라는 소리를 하려는 걸까?

“채소민. 똥차는 갔어. 다음 차가 오긴 왔는데 탈지 안탈지는 채소민이 정해야 해.”

자신을 향해 그렇게 말하는 선유를 향해 소민이 물었다.

“한선유씨가 보기엔 어때요?”

“뭐가?”

“지금 내 앞에 선 게 정말 리무진이예요? 리무진인지 똥차인지 어떻게 알아요.”

스스로 똥찬지 리무진인지 밝히라는 소리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타보면 알지. 어떤 차든 출입구는 있는 거야. 아니면 내려. 언제라도.”

“막 내려도 되는 거예요?”

“당연한 거 아니야? 똥차라면 당연히 내려야지. 그 차 타고 가다가 사고 나서 죽는 것 보다야 어디 하나 다치는 게 백배 천배 나은 거야.”

“연애에도 보험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교통사고만큼이나 아프고 후유증이 오래 남는 게 이별인데. 어떤 보험회사에서도 그런 보험은 만들지를 않아요.”

“만들지 않는 게 아니라 만들 수 없는 거야.”

“왜요?”

“그 차가 똥차인지 리무진인지는 보험회사에서도 구분할 수가 없거든. 그리고 사람마다 이게 리무진인지 똥차인지 판단하는 것도 다르고.”

“결국 내 앞에 차가 리무진인지 똥차인지 나더러 판단하라는 거죠?”

“머리는 참 좋아. 채소민.”

“원래 좋아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선유의 손을 놓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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