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92화 (91/105)

92. 야! 이 나쁜 놈아!

92

인터넷 기사를 통해 소민은 선유가 병원에서 퇴원해 촬영장에 복귀한 것을 알았다. 게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둘의 주먹다짐은 드라마 대본 상의 촬영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지금 그의 상태 역시 궁금했다.

선유에게 전화를 할까 고민을 하던 소민은 선유대신 우선 준영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촬영장에 있다면 언제 전화를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 어디야.

“준영씨?”

- 아닌데.

“누구세요?‘

- 병원에 청각을 두고 왔어? 내가 누군지 바로 알아 맞혀야 하는 거 아니야?

“설마... 한선유씨예요?”

- 난 채소민이 왜 설마라고 생각하는지를 모르겠네.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여전히 능글거리는 그가 맞았다. 오랫동안 못 본 것도 아닌데 갑자기 그가 미칠 듯 보고 싶어졌다.

“준영씨 전화를 왜 선유씨가 받아요?”

- 채소민한테 전화 오면 당장 나한테 넘기라고 했으니까.

“아...”

그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말이 그녀를 멍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선유는 시준과 다른 구석이 있었다. 시준은 늘 자신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반대로 선유는 그녀를 기다렸단다. 그렇게 그녀가 시준과 선유의 차이를 가늠하고 있는데 선유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댔다.

- 이 봐. 어디냐구.

“아... 저 집인데요?”

- 그럼 지금 촬영 현장으로 좀 와. 촬영해야 할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비어서 급하게 필요하거든.

“내가 무슨 땜빵이에요? 허구한 날 불러다가 땜질만 시켜.”

- 시끄러. 오면 좋은 경험을 하게 될 거야.

“한선유씨 말 안 믿어요.”

- 일단 오기나 해. 준영이 보내서 억지로 데리고 오기 전에.

“급하다면서요. 준영씨가 와서 나 데리고 갈 시간이 있어요?”

- 그러니까 보내기 전에 빨리 와. 빨간 차 타고.

그렇게 말한 선유가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아이 참,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면 되지.”

소민이 그의 말에 제멋대로 정의를 내리고는 붉어진 얼굴로 잽싸게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어찌나 분주하게 서둘렀는지 하마터면 아이브로우로 아이라인을 그리고 아이라이너로 눈썹을 그릴 뻔했다.

게다가 처음 고백하러 가는 사람처럼 어찌나 심장이 펄떡 대는지 심장이 활어가 된 기분이었다. 어찌 어찌 촬영현장에 도착하자 준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냉큼 맞았다.

“누님!!”

“아, 준영씨.”

자신을 반기는 준영에게 다가갔는데 준영은 잽싸게 그녀에게 커다란 보자기 같은 걸 뒤집어 씌웠다.

“준, 준영씨 왜 이래요?”

“쉿! 이거 철통 보안이 지켜져야 하는 씬이라서요.”

“근데 이거 꼭 제가 해야 해요? 다른 사람이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아... 아마 하고 싶어지실 거예요.”

“네?”

“그런 게 있어요. 다 찍고 나면 꼭 선유 형님한테 칭찬 좀 해주세요.”

그에게 칭찬을 하라니? 이런 일을 시키는데 이건 뭐 상의도 없이 통보에 가까운 건데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한단 말인가. 우선 그 문제를 제쳐두고 소민은 가장 궁금한 걸 물어보기로 했다.

“근데 저 얼굴 많이 나가요?”

“아니요.  한 세 컷만 나가실 거예요. 아예 편집될 수도 있구요. 근데 어떻게 되든 간에 저는 가급적이면 NG 많이 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어요.”

“네?”

NG를 많이 내라니 이 무슨 필름 아까운 소리인지...

“근데 저 대본 같은 것도 없어요?”

“없어요. 그냥 들어가셔서 “야! 이 나쁜 놈아!” 하시고 싸대기 좀 날리시면 돼요.”

“그럼 감정을 어떻게 잡아요?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잖아요.”

“그냥 열 받는 상황이요. 그리고 감정은 보자마자 잡히실 거예요.”

점점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였다. 대체 이 드라마 어디에 그런 씬이 필요한 건지 전혀 이해가 안 됐다.

게다가 자신이 싸대기를 때리는 상대가 설마 선유는 아닌지 걱정마저 됐다. 안 그래도 준영은 선유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해 약간 감정이 있는 듯 보였다.

“준영씨. 선유씨가 준영씨 힘들게 한 건 아는데요. 그래도 매니저인데, 자기 스타를 지켜주고 챙겨줘야죠. 그렇게 NG 많이 내라고 하시면 안 돼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뒤집어 쓴 보자기 때문에 앞이 거의 안 보이는 소민을 부축하던 준영이 물었다.

“제가 때리는 상대 선유씨 아니에요?”

“거 참, 나를 그렇게 때리고 싶어하는지는 몰랐네.”

갑자기 들려오는 선유의 목소리에 소민이 자신이 뒤집어 쓴 보자기를 벗으려고 했지만 선유가 먼저 보자기를 벗지 못하게 잡았다.

“아니, 때리고 싶어 하는 게 아니구요.”

“알아. 안아주고 싶겠지.”

“무, 무슨 헛소리예요.”

어떻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는데 그런 뜬금없는 소리나 해대는 선유에게 소민이 그렇게 말했는데도 선유는 다시 또 능글댔다.

“근데 이거 촬영 끝내고 나면 나한테 키스해주고 싶어질걸?”

“뭔 헛소리예요.”

“내기해도 좋아.”

“흥. 내가 하고 싶어도 안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못해요?”

“아, 그렇네. 내가 불리한 거였어. 하긴 원래 채소민과 나 사이에서 늘 불리한 건 나였는걸 뭐. 내가 그 쪽을 더 좋아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불리한 게임이었는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어떤 표정으로 그 말을 하는지 보고 싶은 마음에 꼼지락대는 소민을 꽉 한 번 안은 선유가 말했다.

“얼굴 보고 안아주고 싶지만 지금은 네가 상대역이라는 걸 숨겨야 해서 말이야. 이따가 다시 얼굴보고 하자.”

그렇게 말한 선유의 온기가 멀어지더니 다시금 선유의 목소리가 났다. 이번엔 그녀를 향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감독님. 상대역 도착했습니다.”

“그래? 이 분이 그렇게 연기를 잘 해낼 수 있단 말이지?”

“예. 꼭 이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 한 번 믿어 보겠네. 근데 왜 그렇게 꽁꽁 싸맸나? 얼굴을 봐야지.”

“아, 그건 촬영장에 들여보내면 알게 되실 겁니다.”

“뭐... 어쨌든 한배우가 맞은 걸 넘어가 주겠다고 해서 찍긴 하네만, 편집될 지도 모르네.”

“되면 더 좋구요.”

그렇게 말한 선유가 그녀를 촬영장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몇 발자국 걷지 않고 그녀가 쓰고 있던 보자기가 벗겨졌다.

“어?!”

선유와 준영을 뺀 모두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가장 당황한 것은 그녀의 상대역으로 지목되어 싸대기를 기다리고 있던 한시준이었다.

짝!

누가 들어도 아픈, 또 한편으로는 맑고 청명한 마찰음이 촬영장에 울렸다. 벌써 한시준은 14대째 싸대기를 맞는 중이었다.

게다가 번번이 온 힘을 실어 날리는 손힘에 아무리 여자가 때린다 하지만 얼굴이 붉어진 것은 물론이요, 입안이 터지지는 않았는지 걱정마저 될 정도였다. 게다가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맞아야 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볼이 얼얼하다 못해 찢어질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이 촬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감독이 문제가 아니라 감독 옆에서 지켜보는 한선유 때문이었다. 그는 이번 싸대기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음에 안 든다는 시늉을 했다.

한선유 소속사 사장의 전화로 한선유가 입원한 병원에 찾아갔을 때 그는 굉장히 선심 쓴다는 듯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고소 안하고, 드라마 촬영 탓이었다고 둘러대 줄게. 대신 싸대기 몇 대 맞아. 채소민한테도 완전히 손 떼고.”

한선유 본인이 때리는 줄 알았는데 드라마 작가에게 말 해뒀다며, 촬영 가운데 그 일부로 찍는 장면이 될 거라고. 여자가 때리는 거라고 안심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흔쾌히 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설마 이런 식으로 뒷통수를 맞을 줄이야. 이 상황은 이 상황 나름대로 수모였다.

“시준씨, 쉬었다 갈까?”

벌건 뺨이 된 마치 촌년 볼터치를 한 듯한 시준의 모습에 감독이 물었지만 그 물음에 답을 한 것은 선유였다.

“쉬기는 뭘 쉽니까. 상대역도 아픈 손 참아가며 때리고 있는데. 남자가 그 정도도 못 참겠어요?”

그는 인정도 없는지 그렇게 말했다. 오히려 때리는 여자 손바닥을 걱정하는 모습에 감독도 기가 찬 듯 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래도 한선유씨 저렇게 뺨이 붉으면 화면에서도 우습지 않겠어?”

“그럼 돌려 맞죠. 반대편 뺨.”

짝짝하고 목욕탕 세신사처럼 선유가 박수를 쳤다. 아니 흥부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닌데 뺨을 돌려대라니. 억울하기도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소민은 반대방향으로 자세를 잡고 있었다. 팔을 붕붕 휘둘러보며

“왼손으로 잘 때릴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는 그제야 알았다. 선유는 소민에게 그를 벌 줄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고 감정을 이렇게 풀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자신이 동의한 거였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각서까지 들이밀었다. OK사인이 떨어질 때까지라고 적힌 게 함정이었다. 감독이 OK사인을 못 떨어뜨리도록 계속 태클을 걸고 있는데 OK사인이 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는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결국 해가 뉘엿뉘엿 지고 그의 얼굴이 호빵맨같이 되고 나서야 선유는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뭐 이 정도면.”

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이 정도라니!

이 정도면 전치 2주감은 나오지 않았을까? 게다가 “이 나쁜 놈!”을 어찌나 많이 들었는지 착한 사람도 나쁜 놈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친 몸을 차로 향하는데 선유가 그 앞에 다시 나타났다. 선유의 매니저인 준영과 함께. 2대 1인 분위기부터가 불리한 상황에서 시준은지지 않으려 부러 큰소리를 냈다.

“이걸로 계산은 끝 아니었어요? 과거는 오늘 맞은 걸로 묻는 거.”

그 말에 선유가 고개를 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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