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나보고 그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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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직업부터 시작이 되었다. 하기야, 그녀의 불신의 원인이 한시준이 얘기하던 그 ‘목적’이라는 것이니 그도 그럴 만 했다.
“누나가 캐스팅 디렉터가 되기로 결심한 건 아버지 영화에 맞는 배우를 자신이 직접 찾아주고 싶다는 욕심에서였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되니까 그런 생각을 했나봐. 그리고서는 죽 어라 열심히 했어. 진짜. 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버지 인맥으로 해결할 수도 있는데 그런 건 싫다고. 자기 힘으로 올라가겠다고. 기를 쓰고 했어. 한 1,2년 됐을 때 쯤이었던 것 같아. 내가 대학 졸업반 무렵이었으니까.”
“민규야. 이 사람 어떤 것 같아?”
“뭐가?”
“나 이번에 새로 의뢰받은 드라마 주연으로 어떤 것 같냐구.”
눈썰미는 자신보다도 좋으면서 그의 누나는 그에게 한 번씩 꼭 확인을 받고 싶어 했다. 대중의 눈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글쎄... 좀 비열해 보이지 않냐?”
“그런가? 근데 후반가면 좀 비열하게 나오는 부분이 있으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럼 괜찮겠네.”
“괜찮겠지?”
“그래.”
그는 분명 그의 잘못이 아님에도 그렇게 말한 것을 두고두고 누나에게 미안해해야 했다.
“이제 들어와?”
“어? 어.”
“늦었다?”
“어... 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지 뭐.”
수상쩍은 누나의 말에 민규가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봤다. 평상시 같으면 대충 머리를 질끈 묶고, 편한 옷을 입었을 누나였다. 그런 누나가 긴 머리에 부드럽게 웨이브를 넣고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러면서 일이라고 주장했다. 아, 연애구나 하는 감이 오는 순간이었다.
“뭐야? 창피하냐?”
“무, 뭐?”
“연애하는 게 창피하냐고. 어떤 남잔데?”
반은 짐작, 반은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 짐작은 누나가 얼굴을 붉히는 순간에 확신이 되었다.
“그, 그런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한 소민이 자신의 방으로 황급히 들어갔고 민규는 그런 누나의 등에 혀를 쯧쯧 찼다. 저렇게 숙맥같아서야 어떤 남자가 좋아할까 싶었다.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고 그게 뭐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기야 누나가 대담한 듯 보여도 워낙에 어리숙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니 지금껏 솔로였겠지만. 누가 됐든 그의 누나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다음 날도 누나는 꼭두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평상시에도 종종 빨리 나가곤 했지만 요 며칠의 행동으로 봤을 땐 누나의 첫 연애 대상이 아무래도 드라마 촬영 현장에 있는 사람인가 싶었다.
“아버지 돕겠다고 하더니 이러다 남편 돕겠다 그러는 거 아니야?”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간만에 누나 방을 열어봤다. 자신의 방과는 달리 왠지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연애를 한다고 해서 딱히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그가 문을 닫는데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 너, 오후에 어디 가니?“
“아니. 오늘 집에서 레포트 쓸 건데.”
- 잘 됐다. 내가 지인짜 지인짜 미안한데, 내 방 책상에 중요한 서류를 두고 왔걸랑, 그것 좀 가져다 주면 안 될까? 응? 응? 응?
“아, 나 레포트 급한데.”
- 내가 용돈 줄게. 얼마면 돼? 얼마면 되는데?
“쇼를 해라. 알았어. 어딘데?”
절대 용돈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착하기 때문이지. 그가 다시 누나의 방에 들어갔다. 책상 위 단정하게 놓인 파일철 하나가 보였다. 꽤 먼 곳에서 촬영을 하는 까닭에 그는 아버지의 차를 슬쩍 했다. 뭐 아버지 차가 한 대가 아니니까 그 차 중에 한 대 쓴다고 혼나지는 않겠지만.
“대체 이게 무슨 서류야.”
자동차가 빨간 정지신호에 멈춰 서 있는 동안 그는 누나의 서류를 들춰봤다. 어차피 그도 한 번씩은 다 봤을 법한 서류들이니 문제가 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는 누나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그 단서를 보게 됐다. 대본이었다. 언제 분인지는 몰라도 대본이 한 권 아니 꽤 여러 권이 들어 있었다. 그 대본을 본 그가 차를 갓길에 세우고는 팔랑 팔랑 넘겨봤다. 빠르게 넘겨본 그 대본들에는
“채소민이 밑줄 쳐놨나?”
“그 정도가 아니었어.”
중간에 끼어드는 선유의 말에 민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정도였으면 그냥 캐스팅 한 사람에 대한 서비스라고 업무의 일부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온통 한시준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글들이 곳곳에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맨 뒷장에서 그녀가 그를 끌어안고 있는 사진이 한 장 떨어졌다.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알았어.”
“둘이 사귀는 걸?”
"아니. 한시준이 우리 누나에게 목적이 있다는 걸.”
“어떻게?”
“누나만 끌어안고 있었거든. 고목나무에 매미 매달리듯, 그렇게. 한시준은 주머니에 손 꽂고 있었거든."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선유의 물음에 민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느 누가 봐도 그건 극성팬과 스타의 모습이지 연인의 모습이 아니었어. 눈빛에도 일말의 감정이 없었어. 배우라면 연기라도 할 수 있는데 말이지. 차라리 연기로라도 사랑하는 시늉을 했다면 쉽게 용서가 됐을지도 몰라. 그래도 추억을 줬으니까. 근데 그 자식은 그저 누나가 퍼주는 것만 좋았던 거야. 그걸 누나는 몰랐던 거지. 경험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게 끝이야?”
“아니. 그럴 리가. 그게 끝이었으면 다행인 거지.”
“끝이 어떻게 났는데.”
“혹시 댁은 누가 그 쪽을 이용만 하려고 할 때, 그 사실을 당사자로부터 직접 듣는 기분이 어떤지 알아?”
“그걸... 채소민도 겪었단 말이야?”
“그것만 겪은 게 아니지. 그 이용에 대한 대상이 되지 않겠다고 한 순간 쓰레기처럼 버려졌지.”
“왜... 안 막았어. 목적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막았어야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선유가 금방이라도 민규를 때릴 듯한 기세로 물었다. 그저 소민이 알아채고 버린 거겠거니 했다. 근데 사실은 버려진 거였다니, 그제야 소민이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던 이유가 이해가 됐다. 동시에 뻔뻔하기 짝이 없는 시준에 대한 적개심이 피어올랐다. 민규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준의 목적이 뭔지를 알 수 없으니 민규 역시 섣불리 누나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누나가 큰 상처를 입지 않기를 바라며 그 아슬아슬한 연애 아니 짝사랑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학교에 갔다 돌아온 집은 어두컴컴했다. 누나가 일을 가서 없다보다 생각하고 불을 켠 민규는 거실 쇼파에 앉아 있는 누나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누나의 행색에 또 한 번 놀랐다.
“누나...”
“어... 왔어?”
차마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수조차 없을 만큼 처참한 몰골이라 그는 그저 그녀를 불렀고, 그녀는 그를 돌아보며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연기했다. 그래, 그건 연기라는 표현 외에 다른 수식어를 갖다 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훌륭한 배우는 못 됐다. 그를 돌아보는 순간부터 벌써 눈에 가득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 사실을 감지하고는 그에게 보이지 않으려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모른 척 해준다 해도 이미 소민의 등은 이미 통제를 잃고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까지 모른 척을 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인데.”
“흐억. 흐꺽. 헉. 흑”
억지로 숨기려 하는 건지 기묘한 울음소리가 억눌린 가운데서도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민규는 누나 옆으로 가 그녀의 등을 쓸었다. 아직 어려 도움이 못 되는 동생이라는 게 화가 났다.
민규의 손길에 막아두었던 둑이 터진 것처럼 울음이 터져 나오더니 한동안을 멈출 줄 몰랐다. 집안 가득 눈물로 채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렇게 울던 그녀는 결국 탈진해서 병원 신세까지 지고 말았다.
“죽 먹어.”
병원에서 퇴원하고 돌아온 누나에게 민규는 죽을 들이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는 누나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죽을 앞에 내려놔도 그녀는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오늘은 기어코 한 숟갈이라도 먹는 걸 봐야겠다는 각오로 앉아 있는데 소민이 입을 열었다.
“민규야. 참 웃기지?”
“뭐가?”
기운이 없지만 스스로를 비웃는 그 목소리에 어조에 민규가 냉큼 대답했다. 누나의 말에서 작은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나는 병원에서 있던 마지막 날까지 기대했어. 멍청하지.”
“누나가 왜 멍청해.”
“안 올 거 알면서도 문만 봤거든. 내가 아프다고 하면 그래도 혹시나 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누굴 기다렸는데.”
알 것 같으면서도 거의 확신하면서도 그는 그렇게 물었고, 누나는 그에게 다른 말만 내뱉었다.
“하긴 자동차가 정비소 갔다고 문병 오는오는 사람은 없지.”
나사못이 아프다니. 아파서 정신이라도 오락가락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민규야, 나는 사람 맞지? 도구 아니지?”
“뭐?”
“나는 사람이야. 목적지까지 태워다 주는 자동차 같은 게 아니잖아. 그치?”
“당연한 거 아니야? 누나가 사람이지 어떻게 자동차야. 자동차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누나는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하잖아.”
무슨 소리인지는 몰라도 그는 일단 무조건 그녀의 말에 동의해 주었다. 민규의 말에 소민이 희미하게 웃더니 죽을 절반쯤 먹었다.
“나중에야 알았어. 그 거지같은 놈이 지 출세욕에 누나를 이용하려고 했다는 걸. 누나를 출세 길에 타고 갈 자동차쯤으로 취급했다는 걸. 아버지한테 접근할 수단으로 이용한 거지.”
민규의 말에 선유가 이를 갈았다.
“그래서?”
“뭐가?”
“그 이후로 그 놈은 어떤 벌이라도 받았냐고.”
“한선유씨. 여긴 꿈과 희망의 나라가 아니야.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고 순진하지가 않아요. 그 놈이 무슨 처벌을 받겠어.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냥 누나 혼자 상처받은 거지.”
“그럼, 그 놈은 여지껏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 와서 다시 집적대는 거지?”
“글쎄... 지 자동차 다른 놈이 타는 건 싫은가 보지.”
그 말에 선유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참이나 뭔가를 생각하던 선유가 민규를 향해 말했다.
“알았어. 가 봐.”
“한선유, 노파심에서 말해두는데 괜히 일 크게 벌이지 마. 우리 누나 그 때 그 일 겨우 묻었어.”
“틀렸어. 채민규. 상처난 건 묻어두는 게 아니야. 치료하는 거지.”
“돌팔이가 치료하면 상처는 덧나고 더 심해지는 법이야.”
민규의 말에 선유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채소민한테 잘 배워서 난 돌팔이 아니야.”
민규가 나가자 선유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어디야. 사장님이랑 같이 병실로 좀 와.”
소민은 집에 돌아와 거실 쇼파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아직 떨쳐내지 못한 그림자가 자신의 위로 드리워지는 게 느껴졌다.
떨쳐냈다고, 이겨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다 그러지 못한 모양이다. 지금도 당장 선유에게서 시준과 같은 답을 들을까 도망친 셈이었다.
“누나.”
“어... 왔어?”
언제 왔는지 민규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소민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모습에 민규가 한숨을 쉬더니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시준에게 상처받았던 그 날처럼 한참을 조용히 곁에 앉아만 있던 민규가 입을 열었다.
“나. 한선유 만나고 왔다.”
무슨 말이 오갔을까. 겁부터 난다. 소민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랬어?”
그 사람이 뭐래? 라는 말이 입 안에 뱅뱅 도는 것을 소민이 억지로 참아 냈다. 혹시라도 시준과 같은 말을 했을까봐. 그래서 억지로 참고 있었다. 그런 소민을 지켜보던 민규가 물었다.
“안 물어봐? 뭐라고 했는지?”
“어?”
묻고 싶은데, 물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그의 입에서도 같은 말이 나왔을까봐. 그러면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질 것 같아서.
“누나. 내가 말했지. 남자는 내가 보겠다고.”
“어. 그랬지.”
“나보고 그러더라.”
그가 뭐라고 했을까. 그녀의 청력이 온통 민규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한시준이 무슨 벌을 받았냐고 묻더라.”
그 말에 그녀의 가슴이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시준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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