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아주 홀딱 빠졌어요
68.
“준영아, 선유 아직도 연락 안 되냐?”
“네. 전화기 계속 꺼져 있는데요?”
백대표의 말에 수화기를 들고 있던 준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준영의 말에 백대표가 제법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어디 돌 맞아서 변사체 된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있겠어요? 그럼 지금 당장 기사 내려가고 한선유 변사체로 발견이 메인으로 올라와야죠. 근데 그런 얘기 없는 걸 봐서는 어디 숨어 있단 소리라고 봐야죠.”
“하기사... 근데 확실한 거지? 네 말 믿고 기사 띄우기는 했는데.”
“확실하다니까요? 아주 홀딱 빠졌어요.”
“그래. 네가 얼마 전에 물어 보길래 설마 하긴 했는데.”
“아유, 아주 둘이 하는 거 보면 속 터진다니까요? 아니, 그만큼 서로 사인을 보내면 지나가던 개도 알 것 같은데 둘만 아주 서로 눈치는 뒀다 국 끓여 먹을 건지 답답하다니까요?”
“이렇게 하면 결과가 나오긴 하겠지. 근데 결과가 죽도 밥도 아닌 걸로 나면 어떻게 하냐?”
“그럴 리가요. 그나저나 백대표님. 포장을 그렇게 하시고 짱입니다요.”
준영의 말에 백대표가 어깨가 으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딱히 어떻게 컨셉 전환을 해야 할지 난감한 참인데 잘 됐지, 뭐. 선유 그동안 계약 연애도 이정도면 묻힐 수 있을 것 같고.”
“이거야말로 현대판 드라마잖아요. 잘 나가는 남자 배우 둘의 구애를 받는 여자. 거기다가 성향도 서로 다르고. 여자들이 한 번쯤은 꿈꿔보는 로망인데요?”
“그렇긴 한데... 소민씨도 좋아할 지는 알 수가 없지.”
“제 매니저 인생을 걸고 소민씨는 아마 형님을 선택할 겁니다.”
“뭐, 그러면 다행이고. 선유가 더 이상은 자격지심 때문에 포기하는 걸 바라지 않아서 일단 기사부터 낸 건데 만약에 아니라고 하면...”
“어쩔 수 없죠.”
“어쩔 수 없긴 뭘 어쩔 수 없어? 새 계약 때문에 붙어 다닌 거였다고 선유 보호해야지. 매니저라는 놈이!”
백대표의 말에 준영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역시! 대표님 뒷 일까지 미리 생각해 두시고 멋지십니다.”
애시당초 준영에게서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기에 준영의 행동에 백대표가 픽 웃으며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그가 처리해야 할 일은 산재해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선유가 제일 걱정이었다.
이런 일만 터지면 난리를 칠 그의 어머니의 존재가 백대표의 얼굴을 어둡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의 소속사 메인 배우이자, 그가 사고를 쳤으면 낳았을지도 모를 아들 같은 존재이기에 선유에게 든든한 비빌 언덕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럴 구석이 전혀 없는 선유이기에 더더욱 마음이 쓰이는 건지도 몰랐다.
바깥 어딘가에 있을 선유를 생각하며 백대표가 창 밖을 내려다 봤다. 소속사 입구에는 기자들이 빼곡히 바늘쌈지에 얹힌 양 몰려와 입구 앞에 서 있었다. 선유의 집에 사람의 기척이 없으니 이리로 몰려온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 그들을 백대표가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공인이긴 해도 개인이기도 한 건데... 참 요새 기자들은 기자 정신이 지나치게 투철한 건지 기자이길 포기한 건지 가끔 헷갈려.”
“뭐 하나 건수 잡히면 일단 끝가지 가죠. 누구하나가 못 볼 꼴 날 때까지요. 형님도 대표님이 계속 커버 쳐주시지 않았으면 어느 순간 무너져 주저앉았을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선유 그 녀석이야 예전 소속사 사장이 모자라는 이미지 구축해 놓은 거 아직 수습이 안 된 것 뿐이지 멍청한 놈 아니고. 소속사에서 계약 연애로 잡은 거 외에 지금껏 뭐 건덕지가 있었냐? 솔직히 이 바닥에서 도 닦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지내는 그 놈이 신기한 거지.”
“그렇긴 해도요. 이 쪽에서 그렇게 자기 잘못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도 수두룩한데, 남들이 보기엔 그 사람들보다 나을 게 없는 형님이 건재한 건 사장님 덕이죠.”
준영의 말에 백대표가 묵묵히 침묵을 하다 이내 창가를 다시 한 번 바라보고는 준영을 향해 말했다.
“아무튼 기자들이 선유가 지금 여기 없다는 거 알면 더 난리날지 모르니까 어떻게든 있는 것처럼 굴어. 넌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선유 집에서 뭐 챙겨오는 시늉이라도 하고.”
백대표의 말에 준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 시각, 선유의 소속사로 두 여자가 오고 있었다.
*
금은방 안주인처럼 하고 온 여자가 먼저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녀는 앞에 선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주차하고서는 누가 잡을 새도 없이 선유의 소속사 건물 안으로 입성했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백대표의 방으로 향했다.
“거기 막 들어가시면 안 되는데.”
“괜찮아요. 나가봐요.”
대표의 말에 유일하게 그녀를 만류하던 여직원이 나갔고, 그녀는 백대표의 앞에 서 있었다.
“우선 앉으시죠.”
“이 사태에 대해서... 나한테 해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녀의 말에 백대표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나오지 않을 이유가 뭘까요?”
“오호라! 웃는 걸 보니 이것도 노이즈 마케팅이란 건가요?”
그녀의 말에 백대표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다.
“이건 제가 했던 노이즈마케팅과는 다른 양상이 될 겁니다.”
“무슨 말이에요?”
날카로운 물음에 백대표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건 소속배우를 홍보하기 위한 게 아닙니다. 노이즈 마케팅은...”
한 호흡을 쉬며 백대표는 다음에 벌어질 사태에 대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는 있었지만, 실상 그가 얼마나 큰일을 벌여 놓은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선유가 자의로 하지 못한다면 타의로라도 매듭을 짓고 넘어갈 일이었고, 쉽지 않을 일이었다. 그런 선유를 위해 온전한 방어막을 쳐 줄 수는 없다 해도 1차 저지선, 2차 저지선은 되어줄 생각이었다.
선유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지 못한 건 안타까웠지만 그건 백대표도 마찬가지였다. 짧게 심호흡을 한 백대표의 시선이 자신의 앞에 앉은 여자, 선유의 어머니, 유세란 여사를 바라보며 신호탄을 쐈다.
“더더군다나 아니죠.”
“그럼 이딴 기사가 난 이유가 뭔데!!”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거칠게 달려드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녀가 백대표를 향해 테이블에 펼쳐진 1면이 자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장식된 연예신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장면을 백대표는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뭐가 문제인가요?”
“뭐가 문제냐니!! 그게 소속사 대표가 할 말이야? 기여도 아니라고 잡아뗐어야지, 저렇게 열애설이 터지는 건 막았어야지!!”
“선유는 제게 아들 같은 존재입니다.”
“포장은 다들 그렇게 하지. 우린 한 팀이라고, 가족이라고. 그런데 사실은 뱃 속 검은 짐승들이 당신같은 사람들이야. 설마, 이제 선유 단물 다 빨아 먹었으니까 내치려고 이러는 거야?”
그 말에 백대표의 눈이 유세란 여사를 쏘아봤다.
“저는 선유가 아들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선유가 여사님께는 그런 존재입니까? 친아들, 친자식이지만 단물이 떨어지면 내칠 수 있는 그런 존재요?”
“누가 그렇대?”
백대표의 말에 앞에 앉은 선유의 어머니 유세란 여사가 불같이 화를 냈다. 그 진실성이 의심스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따지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문제는 그건 아니었으니까.
“다행이네요. 하지만 설혹 여사님께 한순간이라도 선유가 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라면 선유는 제게 여사님이 생각하는 아들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백대표의 말에 세란이 어쩐 일인지 침묵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백대표가 말을 이었다.
“만약 여사님께 아들이 그런 존재라면 선유는 차라리 제 신체의 일부 같다고 하면 맞을 것 같습니다. 행여나 다칠까, 아플까 챙기고 위하는 제 몸 말입니다. 그런 아이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데, 본인은 숨기려고 해도 제가 알 정도까지 마음이 커졌는데 그걸 어떻게 모른 척 묻어버립니까?”
“더 좋은 기회,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지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내가 걔를 위해 뭘 준비하고 있는지 당신이 알기는 해?”
세란이 반발했지만 백대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정도로 물러날 거였다면 애시당초 시작도 하지 않았을 일이다.
“모릅니다. 하지만 여사님 관점에서 더 좋은 기회, 더 좋은 사람이 선유에게도 그런 기회, 그런 사람이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내 아들이야!”
“네. 그리고 선유는 한선유라는 고유 명사를 가진 개인이기도 하죠. 강요하지 마세요. 선유가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게,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도록 돕는 게 여사님과 제 몫입니다.”
백대표의 말에 세란이 자신이 갖고 온 가방 끈을 꽉 움켜 잡았다.
“거짓말하지 마. 아들? 자기 몸? 그래. 안 아플 때는 내 자식, 내 몸 같지. 그런데 속담에 이런 말도 있어. 앓던 이 빠진 듯 시원하다고. 너희들은 그런 놈들이야. 그러니까 괜히 헛소리로 선유 혹하게 만들지 마.”
손이 하얘지도록 가방을 움켜잡은 세란의 모습을 백대표가 바라봤다. 그가 한 말에 거짓은 없었지만 선유의 어머니인 유세란 여사도 자신의 고집을 꺾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건 단순한 아집만은 아닌 듯도 보였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꽤나 불안해 보였으니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대표가 입을 뗐다.
“어떡할까요? 선유를 평생 버리지 않겠다고, 각서라도 써드릴까요?”
그 말에 유 여사의 시선이 백대표를 향했다. 눈빛이 불안정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안심을 못하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대신, 선유 어머님도 하나는 약속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녀를 바라보는 백대표의 눈을 유여사가 마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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