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생 최고의 캐스팅-48화 (48/105)

48. 구미호와 흡혈귀

48.

제운이 매니저를 부르자 코디와 대화 중이던 매니저가 달려왔다.

“나 핸드폰 좀 줄래?”

“촬영에 집중하게 주지 말라면서요?”

“잠깐이면 돼.”

어딘가 평상시 같지 않은 제운의 목소리에 유찬이 가방 쪽에 가서는 그의 핸드폰을 찾아 건네며 말했다.

“형,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 뭐 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 끝을 얼버무린 제운을 한 번 쳐다본 유찬이 다시 코디에게 갔고 제운이 인터넷을 켜자 검색을 할 필요도 없이 실시간 검색어를 점령한 문구들이 보였다.

1. 한선유 화보

2. 한선유 여자 모델

3. 한선유 여자친구

4. 한선유

5. 월간 낑깡 모델

1순위에서 5순위가 모두 한선유와 관련이 있었다. 맨 위의 검색어를 클릭하자 바로 화면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화보가 그의 눈을 아프게 자극했다.

분명 그녀가 모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델 못지않은 모습을 한 소민이 이제껏 본 적 없는 표정,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란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팔은 그와 화보를 찍은 남자, 선유의 목을 감싸 안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한 팔로 소민의 가느다란 허리를 휘어잡은 선유의 눈빛은 연기라고만 볼 수는 없을 정도였다. 설사 그게 연기라도 그 눈빛 하나 만으로도 한선유는 여자를 유혹하기에 충분할 터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보.

떨어지는 소민을 받는 듯 한 선유의 모습이 담긴 화보는 소민을 너끈히 받아 줄 수 있을 듯 든든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런 선유를 향하는 소민의 모습이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품 안으로 행복하게 낙화하는 듯 한 모습인지라 괜스레 가슴이 아파왔다.

막상 화보를 보자 이제까지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던 그의 마음에 결심이 섰다. 이렇게 아무 것도 해보지도 못하고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설사 이 사진이 단순한 화보에 불과할지라도 더 망설이고 뒤로 물러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첫 캐스팅 장소에서부터 주변에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진 듯 환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여자.

원래 목표란 어려울수록 투지를 불태우는 법이었다. 그래서 그는 곧 촬영을 재개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선유와 소민이 사라진 쪽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다시 지금. 그는 아까와는 다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허전해 보이는 촬영장을 둘러봤다.

“사람 하나로 이렇게 느낌이 달라질 수도 있구나.”

그가 다시 핸드폰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액정을 길게 눌러 사진을 저장하고 공들여 사진을 잘라냈다. 그렇게 공들여 잘라낸 이미지에는 소민의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

“언젠간... 나한테 이런 눈빛을 보여주는 날이 오면 좋겠다.”

혼잣말과 함께 그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메인화면에는 소민의 모습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

5시간 정도 걸리는 운전길이 이렇게 즐거운 길이 될 수 있다는 걸 선유는 처음 알았다. 오히려 이 시간을 늘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 절로 속도계의 바늘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올 수밖에.

“한선유씨, 졸려요? 어디 아파요?”

“왜?”

“여기 고속도로예요. 고속도로에서 70km로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사고 나고 싶어요? 힘들면 내가 바꿔줘요?”

“아니. 괜찮아.”

그렇게 말한 선유가 금세 말을 바꿨다.

“안 괜찮은 것 같아. 다음 휴게소에서 잠깐 쉬어가도록 하지.”

“내가 바꿔준 다니까요?”

“안 바꿔줘도 돼. 잠깐만 쉬면 된다고.”

그렇게 말한 선유가 고집스레 핸들을 움켜지고는 페달을 밟았다. 평일의 낮인지라 고속도로 휴게소는 생각보다 한산했고, 소민을 알아보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둘 다 얼굴이 팔린 신세이긴 하지만 그나마 덜 팔린 소민이 차에서 내려 커피와 토스트를 사왔다. 소민이 사온 커피와 토스트를 받아든 선유가 그 전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이 봐.”

“이 봐 아니고, 채소민이라고요. 대체 몇 번을 말해야 돼요. 촬영장에서는 이름을 불러라 어째라 하더니 본인만 잘하면 될 것 같단 생각 안 해요?”

“뭐, 아무튼. 근데 미똥이 뭐야?”

그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에 소민은 하마터면 씹고 있던 토스트를 도로 뿜을 뻔했다. 겨우 삼키고 나니 미칠 듯 한 사레가 터져 나왔다.

“콜록콜록콜록쿨럭쿨럭쿨럭쿠웨일럭!”

사례의 끝은 알 수 없는 기침으로 끝났고 소민의 사레에 그저 티슈를 내밀은 선유가 그녀의 답을 기다리는 듯 말똥말똥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 그건 어디서 들었어요?”

“저번에 댁 동생이 내가 그 쪽한테 한 전화 받았거든. 그 때 나보고 미똥이라 그러던데?”

“그래요? 그... 아마 동생이 자다 깨서 화가 나서 그랬나 봐요.”

“그게 뭔데?”

“저, 저도 잘은 몰라요.”

“그래? 근데...”

그렇게 말한 선유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가 피식하고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고, 그런 그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그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그쪽 핸드폰에 내가 그렇게 저장되어 있다던데?”

‘아 놔, 채민규. 이 입이 3개 묶어 천원인 요구르트 같은 놈. 넌 앞으로 등짝 맞을 때 무조건 보너스 두배 당첨이다’라고 생각한 소민이 두 손을 착 모아 용서를 빌었다.

“미안해요!! 그 때는 너무 열 받아서 그렇게 저장했어요!!”

“그래서, 그게 무슨 뜻이냐구.”

“그게...”

선유의 눈치를 살피던 소민의 입에서 조심스레 그 글자의 의미가 주춤주춤 흘러 나왔다.

“미...친 똥...개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눈을 부릅 떴다.

“뭐? 똥개? 그것도 미친? 내가 광견이라고?”

“아, 그렇잖아요. 아니, 계약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관상을 봐주겠다질 않나, 눈 감으라고 하더니 도망을 가지를 않나. 내가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네? 역지사지. 반대로 생각을 해봐요.”

소민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선유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그건...”

“아, 그래요! 퉁쳐요. 퉁! 나도 더 이상 한선유씨가 나 냅두고 도망간 거 문제 삼지 않을게요. 그럼 되죠?”

그녀의 말에 선유가 무슨 생각인지 한동안 조용히 있었다. 어색한 기류가 맴돌 때 쯤 선유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쪽은 쿵푸팬더 같지 않아.”

“네?”

뜬금없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랬다. 무슨 생각인지 표정은 자못 심각하기까지 했다.

“사진작가도 그 사진 마음에 들어 했어. 마녀같이 잘 나왔다고.”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는 칭찬처럼 말했지만 마녀같이 잘 나왔다고 한 말에 고마워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컨셉이 마녀이긴 했지만, 마녀가 좋은 의미는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의 진지한 눈빛을 본 소민의 입에서는 고맙다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고, 고마워요.”

그런 소민을 선유가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그 시선에 괜히 소민이 우유를 내려다보며 톡톡 손으로 건드리는데 선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는데 그 쪽은 쿵푸팬더도 아니고 마녀도 아닌 것 같아.”

“무슨 말이에요?”

“그냥... 그냥... 남자를 홀리는 예쁜 구미호 같아.”

선유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소민이 이게 무슨 소리인지 그를 빤히 바라봤다. 쿵푸팬더도 아니고 마녀도 아니라더니 더한 요물이 튀어나오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건 뭐 약주더니 도로 병을 주는 그런 상황이었다. 아니면 정말 졸리던가.

“한선유씨. 정 졸리면 자요. 내가 운전할게요.”

그가 정말 자신을 구미호라 생각한다고 결론 내리기는 싫었다. 결국 선유가 졸린 거라 결론을 내린 소민이 운전을 하겠다고 나서며 보조석에서 내려 운전석으로 가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소민의 손을 선유가 잡았다. 왠지 찌릿한 게 손 끝부터 전기가 통한 듯 저려오면서 다리에 기운이 빠지는 느낌에 소민이 다시 보조석에 몸을 기댔다.

“그래서 말인데...”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 선유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 쪽이 구미호라면 다른 남자 간 탐내지 마. 내 간을 줄 테니까.”

“네?”

“내 간이든, 아니면 다른 거든 달라면 줄 테니까.”

그 말에 소민이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한선유씨. 저는 구미호가 아니구요. 한선유씨한테 바라는 건 캐스팅 수락한다는 말, 그거 하나...거든요? 한선유씨 간을 왜 빼요. 제가 무슨 장기 밀매단이에요? 설마 계약 진지하게 고려해 본다더니 그거 취소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

어렵게 어렵게 돌려 말했는데 그녀는 영 못 알아먹은 듯 싶었다. 드라마에서는 이런 것쯤 일도 아니었는데, 어려웠다.

드라마가 아니니까. 거짓이 아니니까.

그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그녀를 향해 자신의 마음을 보내듯 한숨을 내쉰 그가 차 시트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야. 걱정 마. 내가 한 말을 그렇게 쉽게 엎어버리거나 하진 않으니까.”

다 마신 커피 컵을 컵홀더에 놓은 그가 커피를 마시고도 졸린 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여기서 1시간만 자고 가자.”

“힘들어요? 힘들면 내가 운전할게요.”

“됐어. 난 여자한테 운전 안 시켜. 1시간만 쉬고 가면 돼.”

그렇게 말을 하고는 아예 시트를 뒤로 누인 그가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감고 잠이 들었는지 말이 없었고 차 안에는 그의 숨소리와 고요함이 가득 찼다.

소민이 눈을 감고 있는 선유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뭐, 잘생기긴 했네.”

그녀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혼잣말을 뱉어냈다. 그렇지만...

“구미호 좋아하네. 사람 홀리는 재주는 본인이 더 뛰어나면서 누굴더러 구미호래.”

투덜거린 그녀가 그와 같은 높이로 시트를 눕히고는 자신의 몸을 기댔다.

“한선유씨. 그 쪽이야 말로 여자 홀리는 흡혈귀 같은 거 알아요?”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 그 쪽 옆에, 아니 그냥 TV에 나온 당신 모습만 봐도 좌심방 우심실에 깃털 든 것처럼 심장이 간질거린다구요. 꼭 계절성 알레르기라도 있는 사람처럼 당신만 보면 이상하게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빨리 계약을 끝내고 거리를 두는 게 맞는 건데... 계절이 지나가야 알레르기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당신을 벗어나야 나아질텐데... 나아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구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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