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놀려먹은 게 아니면?
46.
그 말에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선유가 전화가 끊긴 건가 싶어 귀에서 떼고는 액정을 확인했다. 액정에는 여전히 통화 시간을 체크하는 숫자가 가지런히 떠 있었다.
“여보세요?”
-말해요.
“뭘?”
선유의 질문에 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한숨을 쉬는 듯한 숨소리와 함께 소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용건이요.
“아, 그래. 용건. 스토커 하라고 했는데 왜 주변에 안 나타나?”
그 말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은 선유에게는 너무도 답답했다. 평상시에는 잘만 종알대던 여자가 갑자기 묵언수행이라도 들어간 것인지 말이 없자 선유는 일단 되는 대로 말을 늘어놨다.
“스토커라면 스토킹 하는 대상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을 내뱉고 나니 문득 부아가 치밀었다. 스토커라면서 스토커의 기본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다시 소민은 조용했다.
-아무리 스토커라도 먹고는 살아야죠.
“뭐?”
-그러니까 제가 한선유 씨를 캐스팅하기 위해 따라다니고 스토커처럼 굴겠다고 한 건 사실이지만 제 본업이 스토커는 아니잖아요. 저도 일을 해야죠.
“그래서? 지금 어딘데?”
-왜요?
“스토커님 수고를 덜어주려고. 내가 그쪽으로 갈게.”
-됐어요. 일할 때는 방해받고 싶지 않거든요?
일하니까 바쁘다는 말이겠지만 그에게는 너한테는 캐스팅 이상의 볼일은 없다는 듯 말하는 그녀가 선유는 내심 서운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애써 담담하게 선유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 일 끝나면 나 만나러 올 거 아닌가?”
-글쎄요? 어려울 것 같은데요?
“아니, 왜? 나 캐스팅 안 하고 싶어? 내가 기회를 주면 와야지!”
선유의 질문에 소민이 포옥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지금 여기 목포예요. 가고 싶어도 올라가면 오늘 하루 끝난다고요.
“목포? 목포는 왜?”
선유의 말에 소민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여기 촬영 있어서 촬영 확인하러 왔거든요.
소민의 말에 선유가 눈가를 어루만졌다. 무슨 여자가 홍길동도 아니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 속도가 놀라웠다.
“바쁘게 사네.”
-모두들 그러고 사니까요.
“그거 오늘 끝나는 촬영이야?”
-아니요? 여기서 한 사흘 정도 촬영할 것 같은데요?
그가 수화기 너머 천진난만하게 넘어오는 그녀의 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 너도 거기 사흘이나 있는다고?”
-그럼 어떡해요? 제운 씨도 앞으로 여기서 사흘 있어야 한다는데요. 첫 촬영이니까 보긴 해야 하잖아요.
그녀의 입에서 또 제운이라는 말이 나오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김제운은 왜 그렇게 따라다니는데?”
-제운씨도 내가 캐스팅 했으니까요. 첫 촬영은 꼭 확인한다가 제 모토거든요.
“첫 촬영이면 오늘만 보고 올라와야지. 왜 사흘이나 거기 있냐고!”
-왜 시비예요. 배고파서 예민해요? 그럼 밥이나 먹어요.
소민의 말에 아무 응답이 없자 다시 소민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여보세요?
“이봐, 그럼 계속해서 목포에 있을 건가?”
-뭐, 그렇겠죠?
“알았어. 끊어.”
그 말과 함께 끊긴 전화를 보며 소민이 투덜거렸다.
“대체 전화예절을 어떻게 배워먹은 거야. 물론 용건만 간단히라고는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는 것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전화기를 내려다보던 소민은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현장으로 뛰어갔다.
*
날씨는 청명하기 그지없는데 제운은 거의 하루 종일 물에 뒹굴고 있었다.
저러다가 손발이 쭈글쭈글해져서 제운의 손을 클로즈업 할 때 할아버지 손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오랜 시간을.
오전부터 살수차가 뿌려대던 물은 오후가 되어서야 감독이 내린 OK사인과 함께 멈췄다. 아직 다른 촬영은 많이 남아 있었지만.
자신의 의자로 걸어오는 제운을 기다리던 소민이 냉큼 그를 반겨줬다.
“제운 씨 수고했어요.”
“어때요? 저 잘 나올 것 같아요?”
소민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제운의 말에 소민이 양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 보였다.
“두말하면 잔소리죠.”
“하하하하하!”
“그나저나 쫄딱 젖어서 어떡해요. 빨리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날도 따뜻한데요, 뭐.”
“그래도요. 아! 코디 언니 저도 수건 하나 주세요.”
투덜댈 법도 한데 괜찮다며 웃는 제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작품을 추천한 당사자인 소민은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머리를 말려주는 일을 돕는 정도였고, 코디가 준 수건을 받아들어 제운의 머리를 말리려 갖다 댈 때였다.
“요새는 캐스팅 디렉터가 머리도 말려주나?”
“어?”
지금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에 소민이 순간 멈칫했다.
“제운 씨 제 귀가 이상해졌나 봐요. 한선유 씨 목소리가 왜 들릴까요?”
제운을 향해 그런 자신이 우습다는 듯 말을 한 소민이 계속해서 제운의 머리를 말리려 하자 어느새 다가온 선유가 제운의 머리에 이제 막 닿은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내 말 무시하면 안 되지. 캐스팅 디렉터 씨.”
“진짜 한선유 씨?”
“그럼 내가 가짜야?”
소민이 기분이 나쁜 듯 미간에 주름을 잡는 선유의 볼을 쿡 찔렀다. 그리고 생생한 그 감촉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소민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헐. 진짜네? 여기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냐는 그녀의 질문에 딱히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제운과 함께 사흘 동안 촬영 현장에 있겠다는 그녀가 지나치게 신경이 쓰여서 왔다고 얘기해야 할까?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내면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결국 선유는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그리고 지금 상황에 꺼내도 어색하지 않을 이야기를 꺼냈다.
“굳이 묻는다면, 우리의 계약에 관해서 이야기 하려고.”
“계약이요?”
“그래. 우리가 도. 장. 까지 찍은 그 계약.”
옆에 있는 제운을 충분히 의식해서 한 말이었는데 그 말에 화들짝 놀란 건 소민인 모양이었다. 선유의 말에 소민이 사색이 되더니 선유를 잡아끌며 허둥지둥 말을 걸었다.
“아, 그, 그래요? 그럼 저쪽으로 가서 얘기할까요?”
소민의 말에 어쩔 수 없는 척 따르려는데 제운과 눈빛이 맞부딪혔고,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제운을 보며 선유는 묘한 투쟁심이 일었다.
“그런데 김제운 씨가 무슨 소린지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더 얘기해 주고 가는 건 어때?”
“됐어요! 김제운 씨는 안 궁금해할 거예요. 빨리 와요!”
“뭐, 캐스팅 디렉터님 말씀이면 당연히 따라야지.”
그렇게 말한 소민이 느릿느릿 뒤따르는 선유의 팔을 작고 가는 손으로 붙잡더니 선유의 앞에서 잡아끌며 앞장서 나갔고, 제운은 그런 소민의 모습을 바라봤다.
한쪽 구석으로 그를 끌고 간 소민이 그를 박력 넘치게 벽으로 밀어제쳤다. 물론 힘이 부족한 까닭에 그녀의 예상처럼 그가 퍽하고 벽과 부딪히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건 반대가 되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지금 그게 중요해요?”
선유가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소민을 돌려 벽에 밀어 붙이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그게 중요하냐고? 당연히 중요하지.”
나름 분위기를 잡으며 그녀를 벽으로 밀어 붙였는데 그녀의 얼굴이 찡그려지더니 뒤통수를 잡는 것이었다.
“이씨! 사람 죽일 일 있어요?”
어지간히 아픈지 눈물까지 찔끔 나온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뒤통수를 쓰다듬자 그녀의 키 높이에 조금 튀어나온 벽돌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
“괜찮겠어요? 한선유 씨도 괜찮은지 어떤지 한 번 박아볼래요?”
소리치는 것을 보니 크게 다친 건 아닌 모양이라고 안도하면서도 손이 저절로 소민의 동그스름한 뒤통수를 향해 뻗어 나갔다. 선유의 커다란 손이 소민의 머리를 감쌌고, 그런 선유의 손길에 소민이 퉁명스레 말했다.
“그리고, 이런 드라마 같은 장면 연출하면 여자가 좋아할 줄 알아요?”
소민의 질문에 선유가 그녀를 내려다보자 소민이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모든 여자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난 안 좋아요. 내가 한선유 씨 날바람끼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입술도장도 서슴지 않는 사람인데.”
소민의 말에 선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별 의미 없이 한선유 씨가 나 놀려먹으려고 한 거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괜히 그러지 말라고요. 이런 거나 입술도장이 어쩌고 하는 거나.”
“놀려먹으려고 했다라…….”
선유가 소민의 말을 받아 중얼거렸다.
“그래서, 계약 관련해서 할 말이 뭔데요?”
여전히 선유를 외면한 채로 소민이 그렇게 말했다.
“놀려먹은 게 아니면?”
그런 소민의 턱을 잡아 선유가 다시 시선을 맞췄다. 선유가 내쉬는 공기와 소민이 내쉬는 공기가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소민의 심장이 그런 선유의 호흡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요동을 쳤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옭아매는 눈빛. 까만 눈동자 속에 어린 소민의 모습은 덫 앞에서 도망갈 생각이 없는, 세이렌에 유혹에 홀린 것 같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소민을 그의 목소리가 한 번 더 옥죄어 왔다.
“그런 게 아니면 어쩔 건데?”
그렇게 묻는 선유의 목소리가 심장 깊숙한 곳에 쿵하고 가라앉아서 입술을 뗄 용기를 못 내고 있을 때였다.
“소민 씨!”
“아, 제운 씨.”
지금 이 순간, 선유에게 가장 짜증나는 사람이 있다면 단언컨대 제운이라고 그는 얘기할 것이었다. 자신과 소민 사이의 묘하게 생성되기 시작한 분위기를 깨버리고 끼어든 제운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는 소민의 시선을 끌고 갔다.
무슨 일인지 눈으로 묻는 소민에게 제운이 성큼 다가왔다. 선유는 그런 제운에게서 평상시와는 달리 영역 싸움을 하는 맹수와 같은 기세가 풍겨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제운을 선유 역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소민 씨 그거 알아요? 지금 소민 씨 인터넷에서 핫이슈인 거?”
그런 선유를 모른 척, 제운은 소민에게 다정하게 다가오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가 가져온 영문 모를 소리에 소민의 시선뿐만 아니라 관심사도 자연스레 그리로 옮겨가면서 둘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긴장은 삽시간에 깨져버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리 와봐요. 내가 보여줄게요.”
자연스레 그녀를 데려가려는 제운의 손목을 선유가 잡았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먼저 얘기를 나누는데 끼어드는 건.”
“그 얘기, 중요한 겁니까?”
평상시와 달랐다. 자신을 선배로 대우하던 제운이 그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중요하면 어쩔 거고 안 중요하면 어쩔 건데? 먼저 얘기하고 있었잖아.”
선유의 말에 제운이 코웃음을 쳤다. 코웃음이라니! 코웃음이라니! 하늘같은 선배한테 코웃음이라니! 뒷목이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선유가 제운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런 시베리아 벌판 같은 분위기에 소민은 영문도 모르고 멀뚱하니 선유와 제운을 번갈아 보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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