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설마...
43.
소민이 나가고 나서 한 시간 뒤, 또 다시 누가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인지 뻔히 알면서도 그는 밖을 확인했다. 그리고 집 앞에는 예상했던 대로 임지유가 있었다.
“미친 거 아니에요? 왜 왔대요? 형님 설마 임지유가 하는 말에 또 넘어가시는 거 아니죠?”
준영의 말에 선유가 아무 말이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근데 그 여자는 내가 머리가 나빠서 예전 기억을 까먹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봐.”
“형님, 진짜 그러지 마요? 그러면 정말 저 실망할 거예요. 그 여자가 형님한테 어떻게 했는데!”
제 일처럼 흥분하는 준영을 보며 선유가 픽 웃었다.
“그래. 그 여자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너도 알고, 나도 알지. 그러니까 걱정 하지 마. 김준영.”
“차라리 소민씨를 만난다고 하는 게 만배 아니 억배는 더 건설적이겠네요.”
“여기서 뜬금없이 그 여자 얘기는 왜 나와.”
“비교급을 둘 만한 사람이 소민씨밖에 없어서요!”
그렇게 말한 준영이 분한 감정을 실어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그 기세에 쏠리는 몸을 지탱하려 황급히 운전석의 목 받침대를 잡은 선유가 미세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김준영. 괜찮냐고 묻더니 네가 날 안 괜찮게 만들 셈이냐?”
“아! 어떡해요, 그럼! 화는 나고 화풀이 할 데는 없고.”
“네가 왜 난리야. 내 일인데.”
“우리가 남입니까?”
영화에서 많이 들어본 대사를 하는 준영의 말에 피식 웃은 선유의 눈길이 손으로 향했다. 아직 손에는 소민이 사온 파스가 붙어 있었다. 물끄러미 파스를 보던 선유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게 그 날 이후로 연락이 없어? 잘 들어갔다거나 괜찮냐거나 하는 안부문자도 없고. 울어서 창피한 건 난데 왜 그 여자가 잠수를 타는 거야?”
“예?”
혼자 중얼거리는 선유의 말에 준영이 묻자 선유가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더니 준영에게 물었다.
“김준영. 계약 관련해서 소속사에 연락 온 거 없냐?”
“없는데요?”
“정말 계약 관련해서 연락 들어온 거 하나도 없어?”
뜬금없는 선유의 말에 준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니까요? 일이 모자라서 그러세요? 일 좀 따와요?”
“일은 무슨, 됐어!”
그렇게 짜증을 낸 선유는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는 핸드폰에서 시종일관 눈을 떼지 않았다.
“어떻게 전화 한 통을 안 하나? 혹시 다른 사람이랑 계약 한 거 아니야?”
뭐라 혼자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는 선유의 모습을 준영이 힐끗 바라봤다. 설마 지유에게서 연락이 오기라도 바라는 건 아닐까 하는 노파심에 준영이 물었다.
“무슨 연락 기다리십니까?”
“내가?”
“여기 형님이랑 저 말고 누구 또 있습니까?”
“내가 무슨 연락을 기다려.”
“아. 네.”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선유는 손에 핸드폰을 쥐고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왜 운전에 집중도 못하게 뒤에서 계속 저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준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운전에 집중하려 애쓸 때였다. 선유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벨소리 첫 음이 채 다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선유가 이내 곱게 미간을 구겼다.
“누구라고?”
왜 저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걸까. 설마 진짜 임지유한테 전화라도 온 건가 싶어 귀를 쫑긋하는데 버럭하는 선유의 목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김미영 팀장? 나 돈 많아. 돈 많아서 대출은 필요 없어. 끊어!”
씨근덕대는 선유를 모른 척 하며 운전을 하는데 이번엔 준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운전해. 내 목숨 맡기고 가는데 딴 데 정신 팔지 말고!”
블루투스로 전화를 받으려는 애꿎은 준영에게 짜증을 낸 선유가 보조석에 놓인 준영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본인이 제일 정신집중 안되게 하시는 걸 왜 모르시는지...”
준영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하며 선유가 물었다.
“은인? 은인이 누구야?”
그렇게 말한 선유는 준영이 답변을 할 시간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준영씨?
“준영씨 핸드폰은 맞는데 찾으시는 그 준영씨는 운전 중이라 대신 받았습니다만. 누구신지?”
“아... 저... 김미영팀장입니다.”
“뭐? 얘 대출 받았어?”
“네?”
“얘 핸드폰에 당신이 은인으로 돼 있는데 대출 받았냐고.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다 싶더라니 방금 통화한 그 여자구만. 끊어! 얘 대출금 얼만지 문자로 찍고!”
그렇게 말한 선유가 핸드폰을 끊고는 준영을 노려봤다.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을 하지. 어디 빌릴 데가 없어서 김미영이한테 돈을 빌려? 그러고 뭐? 은이인?”
선유의 말에 준영이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소민이 자신에게 전화를 하는 건 이해가 갔다. 준영에게 선유의 스케줄을 묻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스스로를 왜 김미영 팀장이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고, 그 덕에 준영은 선유에게 돈이 얼마나 필요한 거냐며 닦달을 당하다 아무리 빌리지 않았다고 해도 거짓말 하지 말라는 선유의 말에 이제 다 갚고 10만원 남았다는 말을 하고서야 겨우 선유의 추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네가 나한테 해주는 만큼, 나도 너한테 해줄 수 있으니까 어쨌든 힘든 일 있으면 말해. 도와줄 수 있는 데까지는 도와줄 테니까.”
“네.”
못미더운 듯 한 번 더 강조하며 그렇게 말하는 선유를 준영이 백미러로 쳐다봤다. 선유는 아까처럼 어느 새 시트에 몸을 묻고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성질머리가 거지같아서 그렇지 나름대로는 속정이 깊은 편이었다.
준영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할 때도 경황이 없는 그와 함께 가서 많은 일을 대신해 주고 장례식 비용도 대신 결제해 줄만큼 그는 속정이 깊었다.
뭐, 물론 장례식장에서도 사람들이 알아볼지 몰라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있는 통에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은 누구냐며 좋은 소리는 못 들었지만.
여하튼 그는 이런저런 오해를 많이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오해에 초연한 듯 자신과 무관한 듯 덤덤했다. 일주일 전에 일어났다는 그 두 사건을 제외하고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잡지사와 인터뷰를 하기로 한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형님. 그럼 들어가서 인터뷰하고 나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 말 잊지 마라?”
“네네.”
그렇게 말한 준영이 못내 의심쩍은지 한 번 더 쳐다본 선유가 스튜디오로 올라가자 준영이 핸드폰을 들었다.
“예. 소민씨.”
차에 올라타며 소민은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바보. 바보. 거기서 김미영 팀장이 왜 나와.”
설마 준영의 전화를 선유가 대신 받을 줄은 몰랐다.
“어울리지 않게 나름 준법정신이 있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소민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실 선유의 집에서 나오고서 전화를 할까말까 얼마나 고민했는지 몰랐다. 혹시나 섣불리 전화하면 선유가 민망해하지는 않을까, 그 때 일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 며칠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것도 그거였지만 자신에게 그렇게 말한 지유가 선유에게 그 사이에 고백이라도 했으면 어쩌나 하는 고민도 해야 했다. 그 고민을 자신이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혹시나 인터넷에 임지유와 한선유의 열애설이 기사로 올라오지는 않나 매일 확인도 했었다.
그러나 기사도 연락도 없자 오히려 더 불안했다. 혹시나 n기획사의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선유는 며칠 쉰다며 별 일 없고 스케줄도 없으니 안심하라는 소리만 들었다. 스케줄이 잡히면 연락을 줄테니 당분간 선유에게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어제 저녁 스케줄을 잡았으니 이제 선유에게 캐스팅작업을 재개해도 된다는 문자가 왔었다. 그 문자를 보고서 든 생각은 캐스팅을 어떻게 해야 할까가 아니라 일주일동안 쉬어야 할만큼 선유가 꽤나 힘들었나보다하는 걱정이었다.
“계속 불안했는데 목소리로는 괜찮은 것 같아서 아무튼 다행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이 차를 세우며 자신의 앞에 서있는 건물을 올려다봤다.
“그래도... 괜찮아졌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선유는 한창 잡지사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선유씨는 어떤 요리를 잘 하시나요?”
“글쎄요. 여성분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은 잘 못하는 것 같네요. 전 그냥 가정식을 하거든요. 잘하는지는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구요.”
하필 잡힌 인터뷰가 주부용 잡지였다. 거기에 컨셉은 또 요리하는 남자였다.
요리를 하기 전 의자에 앉아 몇 마디 나누는 인터뷰를 따고 있는 선유는 마지못해 입꼬리를 올리고는 있었지만 얼굴 근육에 부들부들 경련이 오고 있었다.
“호호호. 한선유씨가 가정식이라니 의외네요. 하지만 잘생긴 남자가 하면 어떤 요리를 하든 섹시해 보이지 않나요?”
“여자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런 거겠죠.”
“역시 한선유씨다운 말이네요. 마음에 들어요.”
그렇게 말한 인터뷰어가 레코딩기를 잠시 끄고는 말했다.
“그럼 의상 갈아입으시고 사진 몇 컷 찍고 다시 진행할까요?”
생각 같아서는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일은 일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동안 스텝들이 요리용 사진을 위해 촬영장에 배치를 하고 있었다.
소민이 들어온 타이밍이 그 타이밍이었다.
“누구세요?”
촬영스텝이 들어오는 그녀를 향해 묻자 소민이 잠깐 멈칫하다 이내 미소 지으며 답했다.
“한선유씨 소속사에서 촬영 모니터링 하러 나왔습니다.”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요?”
“그럼 한선유씨 매니저한테 물어보시겠어요?”
선유에게 묻는다면 안 되겠지만 선유의 매니저 준영이라면 얼마든지 그녀를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서였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스텝이 정말 소속사에서 나온 사람이라 생각했는지 이내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한선유씨는 잠시 의상 갈아입으러 가셨어요.”
“네. 감사합니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데 선유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나 선유가 그녀를 보고 난리를 칠까 소민이 스텝사이로 슬며시 모습을 숨겼다.
“자, 이미지 컷 찍을게요.”
사진작가의 말에 따라 선유는 포즈를 잡기 시작했는데 그의 얼굴은 어딘가 핼쑥해 보였다.
“아직 몸이 불편한 거 아니야?”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이 조금 더 그의 상태를 살펴보러 스텝 사이에서 빠져나오자 그의 모습과 촬영 소품들이 보였다. 그의 앞에는 커다란 무가 놓여 있었다.
“선유씨. 무에 칼 좀 대볼까요?”
그 말에 선유는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일이니만큼 해내야 하는 건 맞지만 그에게 무란 먹을 수도, 건드리기도 싫은 아니 정확히는 그를 아노미상태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선유씨? 칼로 무 좀 썰어 볼까요?”
주변에서는 그가 칼자루만 움켜쥐고 있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과 함께 움켜쥔 칼자루가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웅성거리는 스텝사이에서 소민이 선유의 상태를 살폈다.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게 꼭 영화촬영현장에서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편식이 아니라 난 무는 절대 안 먹어.’
왜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른 걸까.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깍두기에 기겁을 하던 그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그리고 횟집에서의 알밥이 흩어져 있던 모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해보니까 알밥에도 잘게 썬 깍두기가 들어있었네.”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의 고개가 들렸다. 선유는 여전히 무에 칼을 대기는커녕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중이었다.
“설마...”
그렇게 중얼거린 소민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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