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유유상종, 끼리끼리
42.
“통성명부터 하죠. 임지유라고 해요.”
“채소민입니다.”
그 말 이후 늦은 시간, 카페에 마주 앉은 두 여자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을 먼저 깨뜨린 것은 지유였다.
“선유랑... 무슨 사이예요?”
“글쎄요... 무슨 사이인지 이제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분명 처음에는 일 때문에 따라다닌 거였는데 지금은 너무 복잡해졌다.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선유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애매한 소민의 말에 지유가 코웃음을 쳤다.
“그거... 아무 사이도 아니란 소리네요?”
“그렇게 말씀하신 그 쪽은 무슨 사인데요?”
기를 죽이려 한 것이었는데 소민은 그럴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이름 대신 어처구니없는 칭호를 택하기까지 했다.
“궁금해요? 꽤 깊은 사이예요. 선유가 날 좋아하기도 했고, 나도 좋아하고.”
“흐응~ 했고, 하고. 그러니까 옛 여자 친구란 얘기네요. 그리고 임지유씨는 현재진행형이란 소리구요.”
소민의 말에 지유가 픽 웃더니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선유 옆에서 얼쩡거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요?”
“왜요?”
“내가 선유 옆으로 돌아갈 거니까요.”
“돌아간다... 뭐, 한선유씨가 가만히 있는 집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죠. 근데 한선유씨는 사람이잖아요. 만약에 돌아가려고 하는데 한선유씨가 안 받아 주면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난 이미 한 번 그 아이와 사랑했던 사이니까 그 애에 대해 잘 알거든요.”
“그래요? 그럼 왜 나한테 비켜 달래요? 그냥 가서 똑똑 노크하고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당신 말대로 한선유는 집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괜히 옆에서 헛바람 넣으면 흔들릴 수도 있으니까.”
“뭐가 그렇게 걱정인지 모르겠네요. 확신이 별로 없으신가봐요?”
예리한 소민의 말에 지유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냥 내 남자 옆에 날파리 하나도 꼬이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괜히 감당도 못할 사람 근처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당신은 빠져요.”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요?”
“뭐?”
“그렇게 못 하겠다구요. 아니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이건 내 의지로 결정한 거니까 그렇게 안 할 거예요. 난 날파리도 아니고요.”
소민의 말에 지유가 기가 차다는 코 웃음을 쳤다. 그런 지유에게 소민이 분명하게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좋은 기억이면 한선유씨가 당신한테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겠죠. 당신 말대로 사랑했는데 그렇게 보내지도 않을 거고.”
“네가 걔에 대해 뭘 알아? 걔는 원래 못된 애야. 새삼스럽지도 않아.”
지유의 말에 소민이 그녀를 노려봤다. 그래, 그녀가 선유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선유가 알려진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사람이라는 거. 그리고 앞에 앉은 저 여자가 그에게 달가운 존재가 아니란 사실로 충분했다. 선유가 앞에 앉은 임지유와 굳이 다시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눈동자가 지유를 향해 형형하게 빛났다.
“그래요. 과거에 당신이랑 한선유씨가 어땠는지는 모르죠. 근데 한선유씨. 못되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예전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한선유씨 상태는 내가 알거든요.”
“사람은 쉽게 안 바뀌는 법이야.”
“그럼 처음부터 그 쪽이 잘못 본 거겠죠. 한선유씨는 원래 착한 사람인데 그걸 안 봐줬거나 못 본 거 아니에요?”
“틀렸어. 걘 원래 나쁜 애라니까?”
“전 직업이 사람 보는 거예요. 웬만하면 제 안목이 틀리는 경우는 없었어요. 그런 제가 보기에 임지유씨 당신은 한선유씨한테 하나도 도움이 안 될 사람이네요.”
“걔는 도움 같은 게 필요해서 날 좋아한 게 아니야. 그냥 나니까 좋아했던 거지. 선유는 나밖에 모르니까 돌아올 거야. 그럼 그 때가서 네 말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겠지.”
지유의 말에 무언가 생각하는 듯 소민이 이제 많이 식어서 아까보다는 김이 훨씬 덜 나는 씁쓰레한 루이보스차 쪽에 시선을 뒀다.
“당신... 트라우마라는 말 알아요? 한선유씨한테는 당신이 트라우마같은데... 내가 정신과의사는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트라우마를 계속 마주치면서 정면돌파하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한선유씨한테 당신이 트라우마 같은, 그런 존재라면.”
그렇게 말한 소민이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지유를 똑바로 바라보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당신한테 한선유씨를 보내지는 않을 거예요. 설령 한선유씨가 나쁜 사람이라 해도 그런 사람에게 트라우마일 정도의 사람이라면 더 나쁜 사람이겠죠.”
“말이면 다인줄 알아?!”
지유가 손을 치켜드는 걸 보며 소민이 미동도 없이 노려봤다.
“맞네요. 더 나쁜 사람. 말로 안 되면 손찌검하는 스타일이신가 봐요? 천상 여자, 벌레 한 마리도 생명이라고 못 죽이는 사람으로 불리는 여배우의 본 모습이 이건가 본데... 연기 잘하시네요. 연기파 배우라고 인정할게요.”
소민의 말에 지유가 부들부들 떨며 가까스로 손을 내려놓는 모습을 소민이 지켜봤다.
“한선유씨 착한 사람 아니라구요? 잘 됐네요. 저도 착한 사람은 아니라서요. 유유상종, 끼리끼리라고 안 착한 한선유씨는 못된 제가 책임질게요. 임지유씨는 임지유씨랑 어울리는 사람 찾으시길 바라요. 그럼.”
소민이 당당히 말하고 일어설 때였다. 물 컵을 손에 쥔 지유가 중얼거렸다.
“선유 옆에 조금 있더니 기고만장했나본데. 두고 봐. 한선유가 왜 나쁜 사람인지 알게 될 테니까.”
그 말에 소민이 방글방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왜 나쁜 사람인지 알아볼 때까지 두고 볼게요. 옛 여자 친구 허락 따위 필요 없기는 하지만 허락해줘서 고마워요. 아, 그리고 잔 비었어요. 물 부으려던 거면 실패예요. 정 붓고 싶으면 물 떠오시던가요. 그 때쯤이면 전 여기 없겠지만요.”
그렇게 말한 소민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는 카페를 나갔다. 카페에 남은 지유는 소민에게 당한 모멸감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테이블 위로 꽈 움켜쥔 주먹에 힘줄이 도드라지게 솟았다.
“그래. 지금 웃어 봐. 얼마 후면 네 발로 한선유 옆에서 비켜나게 해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지유의 눈에 독기가 한 가득 들어차 있었다.
*
“하! 뭐야? 그냥 한선유 코디였던 거잖아? 한선유랑 무슨 특별한 사이인 것도 아니고? 그냥 코디?”
퀸이 알아낸 사실, 아니 인터넷만 검색해 봐도 나오는 사실을 이제야 확인하고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영화제에서 지유에게 뺨을 맞았을 때의 수치심이 다시금 그녀의 피를 더워지게 만들었다.
그 때는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라 얼결에 맞았지만 생각해보니 두고두고 분해 알아본 결과가 이거였다. 업계 탑이라는 임지유와 한선유는 아무사이 아니었다는 것.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나는 애인사이 맞는 거잖아.”
퀸이 코웃음을 치며 이메일로 받은 영상을 돌려봤다.
“천상여자? 웃기고 있네.”
그렇게 중얼거린 퀸의 손에는 이메일로 받은 영상인 영화제 CCTV의 촬영본을 옮겨 담은 메모리카드가 들려 있었다. 워낙 흐릿하고 각도가 틀어져서 잘 안 보이긴 했지만 어떻게 쓸 수 있을지 몰라 갖고 있는 터였다.
“아무 사이가 아니라면 내가 겁낼 이유가 없지.”
사실 선유가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급을 올려줄 수 있는 동아줄 같은 존재랄까? 어느 정도 급만 올라가서 퀸이란 이름이 지나가는 어린애도 알만해지면 버린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이건 다른 쪽으로 사용해도 되겠네. 일회용으로. 잠깐 이용할게요.”
한쪽 입꼬리만 당겨 웃은 퀸이 전화기를 들었다.
“네. 안녕하셨어요? 기자님. 오랜만에 전화드리죠? 제가 기자님한테 좋은 거 하나 알려드리려고 하는데요.”
장시간의 통화 끝에 전화를 끊은 퀸이 지유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이건 경고야. 내 남자한테 헛소리, 헛짓거리 하지 말라는 경고. 그러니까 잘 새겨들어. 다음엔 이 정도로 안 끝날테니까.’
퀸의 얼굴 위로 어울리지 않는 야비한 미소가 걸렸다.
“미안하게 됐어요, 언.니. 그 경고 제가 좀 무시했네요. 언니 남자가 아니니까 상관없긴 하지만 원래 제가 경고 같은 거 우습게 아는 스타일이라서요. 어디 이 다음엔 뭘 할지 한 번 볼까요?”
*
오늘은 잡지 인터뷰 겸, 잡지에 실을 화보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스케줄 시간에 맞춰 선유를 픽업하러 그의 집에 방문할 때부터 운전을 하는 지금까지 준영은 선유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한숨을 한 번 내쉰 준영이 다시 한번 백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선유의 상태를 살폈다. 백대표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형님이... 휴가를 달라고 하셨다구요?”
“그래.”
“왜요?”
“왜겠냐?”
대표의 말에 준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 설마...”
“그 일 아니고서야 걔가 그럴 일이 없지.”
“이번엔 며칠이나...”
“말로는 하루만 쉬겠다는데 모르지. 보통 사흘 정도 걸렸잖아.”
그렇게 말하는 백대표의 표정도 어두웠다.
“그렇게 마음고생을 하면서도 끈을 놓지도 못하고. 모질이도 그런 모질이가 없다.”
대표의 말에 준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착하긴 착한데. 융통성이 없이 답답한 놈이라 걱정이다. 쉽게 털어내지도 못하면서 끌어안고 가느라 고생이야.”
백대표와 준영의 사이에 암울한 분위기가 내려앉았고, 백대표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말했다.
“아무튼 준영이 네가 신경 좀 써라. 나도 그 사람 좀 만나볼테니까.”
“대표...님이요?”
“언제까지 선유 저러는 것도 보기 싫고. 내가 마음이 답답해서 안되겠다. 아무튼 넌 그동안 선유 좀 잘 봐.”
그렇게 대표와 대화를 나눈 게 일주일 전이었다. 대표의 말보다도 선유가 회복을 하는 데 꽤나 긴 시간이 소요된 셈이었다.
“그만 봐라. 나 닳는다.”
“형님. 괜찮으세요?”
“왜? 안 괜찮았으면 좋겠냐?”
“괜찮으셨으면 좋겠는데 안 괜찮으시니까 쉬신 거잖아요.”
준영의 말에 선유가 픽하고 웃었다.
“맞는 말이네. 안 괜찮았지. 억지로 괜찮으려고 하는 것도 맞고.”
“이번엔 꽤 오래 걸리셨잖아요.”
준영의 말에 선유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그 여자에 임지유까지 겹쳤거든.”
“네?”
예상치 못한 선유의 말에 준영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야!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 죽일라 그러냐?”
“누, 누구요? 임지유요?”
“어. 찾아왔어. 그 날 밤에.”
선유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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