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처음부터 눈이 갔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그를 쳐다보는 그녀를 향해 그가 그렇게 다시 물었을 때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 옷도 아닌데 어쩌긴 뭘 어째요?”
“방금 네가 돌아서면서 국물이 나한테 튀었잖아.”
그의 말에 그녀가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국그릇을 한 번 보고 그의 옷을 한 번 보더니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누가 그러나 했는데 이 국이 뜨거웠으면 어쩔 뻔했어요. 손 데일 뻔 했잖아요.”
“지금 그게 문제야? 너 때문에 옷에 무국이 튀었다구. 이거 어쩔 거야?”
“그게 왜 제 잘못이에요? 멀쩡히 가던 사람을 돌려 세운 건 그쪽이지, 제가 아니잖아요.”
역시 한마디도 지지 않고 얄밉게도 대꾸하는 그녀의 입술을 확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여기는 식당 한복판이었고 주변엔 소문을 내고 싶어 입이 근질거릴 사람들이 득시글대고 있었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그의 귀에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소민씨!”
“제운씨!”
자신과 대화를 나눌 때의 까칠함은 어디 갔는지 반가운 듯 그렇게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게 왜 기분이 나쁜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선유가 제운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민의 모습을 바라봤다.
“오랜만이에요. 제운씨. 제운씨도 여기 나오는 거예요?”
어느새 그녀와 제운은 손까지 꼭 붙잡고 있었다. 선유의 잘생긴 이마에 힘줄이 살짝 돋아났다.
“아, 그래서인가?”
선유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운을 쏘아 봤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자신과 비견되기까지 하면서 최근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는 김제운이었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이 곳은 원래 그런 곳이니까. 다만 이번 작품에서 제운과 그가 라이벌인게 문제였다.
“너무 극에 몰입했나보군.”
작품 속 라이벌과 친밀한 여자라서 기분이 나빴던 거라고 자신의 행동을 납득한 선유의 발걸음이 제운과 소민을 향했다.
제운과 함께 웃고 있는 소민을 향해 그가 일갈했다.
“이 봐. 대화 중에 자리를 뜨는 건 예의가 없는 행동인데?”
그의 목소리에 그녀의 시선이 그를 했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새초롬했다.
“제 이름... 이 봐 아니거든요. 사람을 부르려거든 이름으로 부르세요.”
“이름? 이름이라고 했나?”
“안 그래도 저번부터 얘기하고 싶었는데 언제 봤다고 자꾸 야, 너 그러는 거예요? 나도 우리 엄마, 아빠가 지어주신 예쁜 이름이 있거든요?”
“알려준 적도 없잖아.”
“채소민이요.”
선유의 대답에 슥 나서 대답을 한 것은 소민이 아닌 제운이었다. 제운의 입장에서는 아직은 서로를 잘 모르는 것 같은 두 사람을 다 알고 있기에 중간자 입장에서 대답한 것이었지만 선유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김제운씨, 대화 중에 끼어드는 건 어느 나라 예절이지?”
낮게 깔린 목소리는 그의 별명 냉동인간이 틀린 말이 아니란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주변을 얼리며 내려앉았다.
그 날 선 반감에 제운이 조금은 당황하여 되물었다.
“예?”
“그리고 내가 선배일텐데. 아무리 거리가 멀었어도 먼저 대화 중이라는 걸 못 느낀 건가? 먼저 대화 중인 사이에 끼어들어 말을 거는 거,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 안 해?”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소민씨가 함부로 취급을 당할 만 한 분은 아니거든요.”
“함부로? 그럴 만 한 분? 지금 그 말... 대화 중이라는 걸 알고도 끼어들었다는 말 같은데. 맞아? 그 앞뒤 상황은 다 알고 그렇게 행동한 건가?”
“그게...”
제운이 뭐라 입을 떼려는 찰나 소민이 제운의 소매를 잡아 당겼고, 그 느낌에 돌아본 제운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소민의 행동이 무엇보다 강한 제재라도 되는 듯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 제운의 모습에, 그리고 제운의 소매를 잡고 있는 소민의 모습을 선유는 차가운 눈동자로 바라보다 이내 소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좋아. 먼저 나랑 하던 대화는 마저 하고 갔으면 하는데?”
뭔가 묘하게 여전히 반말이긴 하지만 분명 아까에 비하면 훨씬 부드러운 어투였다. 그리고 그런 뜻밖의 선유의 태도에 소민 역시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아까처럼 들이댔다간 일이 어떻게 꼬일지 모르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제운씨. 저녁 먹었어요? 안 먹었으면 얼른 먹어요. 이렇게 만나서 아쉽긴 한데, 이따가 시간 나면 그 때 봐요. 지금은 좀...”
말끝을 흐리며 미안한 미소를 짓는 소민을 향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 그가 이따 꼭 보자는 약속을 남기고는 멀어지자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한 선유가 팔짱을 끼고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분명 방금 무국이 튄 옷을 입고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있을 뿐인데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그가 성질이 개떡 같음에도 왜 드라마나 영화판에서 그를 찾는지 아! 하고 단박에 이해가 될 만한 아우라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온 연예계 배우를 다 좋아하나?”
그런 그가 그녀를 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그냥 제운씨는 처음부터 눈이 갔어요.”
그건 사실 그대로의 진심이었다.
제운은 2년 전 소민이 참여했던 신인캐스팅 현장에서 가장 눈에 들어왔다.
선유처럼 선이 굵은 남성적인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름에 매력적인 마스크와 무대 위에서의 매너가 인상적이었다.
결국 사람 보는 눈은 틀리지 않다고 자부하는 그녀의 안목대로 그는 자신의 캐스팅 이후로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부터 눈이 갔다? 그럼 나는?”
“네? 글쎄요?”
딱히 응대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렇게 대답했던 그녀가 이내 그를 찬찬히 훑었다. 분명 성질머리를 제외하고는 즉, 입만 다물고 있다면 그는 완벽한 남자에 가까웠다. 특히 그의 눈빛은 뭐랄까...
꽤나 깊어서 한 번 마주보면 쉽게 눈을 돌리기 어려웠다.
“그나저나 날 왜 잡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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