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보면 볼수록 참
“그래~ 뭐 악연도 인연인거고. 악연이라면 호연으로 바꾸면 되는 거 아니겠어? 내가 그렇게 만들지, 뭐.”
운명은 개척하면 된다는 마인드의 소민이 가뿐한 마음과는 다르게 원래는 자야 할 시간에 일어나 무거운 몸을 채근해 계획을 실천하러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언제 자신이 잠이 모자랐냐는 듯 명랑하고 활기차기까지 한 그녀의 목소리에 두 부부가 고개를 들었다.
“어서 와요.”
앞치마와 두건까지 두른 그녀의 모습에 두 부부가 깔깔대며 웃더니 자리를 내주며 올라앉으라고 했다.
“우리가 얼추 준비는 끝냈으니까 이따가 설거지 하는 거나 도와줘요. 돈도 안 받겠다 그래서 오라고 하긴 했지만 시켜도 되나 몰라. 그냥 거기서 구경이나 해요.”
“아유~ 막 시키셔도 되요. 제가 요리는 못해도 설거지는 반짝반짝 잘 하거든요. 제 설거지 솜씨 보시면 전속계약 하고 싶으실 걸요?”
그녀의 말에 부부가 다시금 사람 좋아 보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혹시 여기 계신 모든 분이 여기서 식사하시는 거예요?”
“그럼 어디 가서 먹겠어. 여기는 제일 가까운 식당을 갈라고 해도 차로 한 시간을 밖에 나가야 하는데 시급을 다투는 촬영장에서 어떻게 벗어나.”
부부 중 한씨 아줌마라고 부르라고 한 여자가 그렇게 말하자 소민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꽤 이른 아침임에도 강원도 영월의 동강 근처 오지에서 한창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그녀의 타깃, 한선유도 한창 촬영 중이었다.
“식사하시고 촬영할게요!!”
식사시간을 알리는 스텝의 소리에 밤샘 촬영에 지친 스텝들이 밥차 주변으로 좀비 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촬영장이 익숙한 소민 역시 이런 꾀죄죄한 모습을 워낙 많이 봐온 터라 별다른 느낌 없이 그들에게 맛있게 먹으라며 수저와 젓가락을 나눠주고 있었다.
“어? 채소민씨 아니야?”
“어! 안녕하세요, 조감독님!”
그녀와 안면이 있는 조감독이 그녀를 보고 반가워하며 인사를 하자 소민 역시 환하게 웃어 보이며 아는 척을 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그것도 밥 차에?”
“아~ 이거... 알바에요. 흐흐흐”
“요새 일 없어? 웬 알바야?”
“사실은 여기 캐스팅해야 할 배우가 있어서요.”
“그래? 누구? 심예령 씨?”
“아니요~ 한선유씨요.”
그녀의 말에 조감독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한선유씨는 식사하시러 안 오시네요?”
“글쎄? 아까 얼핏 듣기로는 차에서 쉰다는 것 같던데?”
“그래요? 제가 식사 갖다드려도 되겠죠?”
“뭐 괜찮겠지.”
“어느 차예요?”
*
“스읍 하! 후! 하! 스읍 하! 후! 하!”
소라 혹은 혜민의 차와 비슷하게 생긴 벤 앞에 식판을 들고 선 소민이 산모도 아니면서 출산이라도 하려는지 라마즈 호흡 비스무리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긴장하지 마. 쫄지 마. 아우! 긴장 되!!”
여태껏 수많은 남자 배우를 만나봤는데 왜 이리 긴장이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하긴 남신이라 불리는 원반을 만날 때도 이랬다.
“괜찮아. 이 안에 있는 남자는 원반이 아니야. 전화받는 예절을 고려하면 주관적으로 얼굴은 원반이 더 잘 생겼어.”
국이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심호흡을 하던 소민은 마침내 결심을 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비장한 표정과는 다르게도 아주 소심하게 창문을 살며시 두드렸다.
깊은 잠이 들었는지, 노크소리가 너무 작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외려 용기가 생긴 소민이 한 손으로 식판을 들은 채 차 문을 살며시 열었다.
차안에는 커튼이 쳐져 있어 어두컴컴했는데 그 가운데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녀의 청각을 자극했다.
“왜요? 왜 싫은데요?”
여자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민이 식판에 국칸 마냥 휘둥그레진 눈을 감추지도 못하고 그 소리의 근원지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한창 물이 올라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 아이돌이 선유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벤에서 쉬고 있던 선유는 자신의 차 밖에 얼씬거리는 그림자가 곧 자신의 차 안에 스며들자 짜증이 치미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뭐야? 가서 밥이나 먹어.”
“밥먹을 시간이 어디 있어요. 연기가 처음이라 합 맞춰 볼 시간도 모자라는데 같이 맞춰주세요. 저랑 파트너시잖아요.”
상대는 아이돌이고, 안 그래도 많은 안티 팬을 굳이 나서서 늘릴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대강 대강 짜증을 억누르며 상대를 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어... 그러면 다음은 키스신을 맞춰볼까요?”
“뭐?”
합을 맞추자는 핑계로 찾아오더니 키스신 연습을 해야 한다며 다짜고짜 입술을 들이미는 모습에 선유가 진저리르 치며 그녀를 매몰차게 밀쳤다. 요즘 왜 이렇게 들이대는 인간들이 많은 건지...
그의 눈에 며칠 전까지 들이대던 토끼탈(정확히는 머리만 있는 바로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토끼탈을 보는 순간 묘하게 대비를 이루었던 그 여자의 등이 떠올랐다. 하얗고 매끈하게 뻗어 있던 그 등. 지금 이 순간 그게 왜 떠오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는 지금 눈 앞에 있는 여자아이와는 말도 섞기 귀찮았다.
“나가.”
“싫어요.”
“대본 맞춰 줬잖아. 그럼 나가.”
“끝까지 안 했잖아요. 키스신도 맞춰봐야 한다니까요?”
“그건 굳이 연습 안 해도 되잖아. 그러니까 나가라고.”
“왜요? 왜 싫은데요?”
“왜 싫으냐니.”
“우리 어차피 연인사이잖아요.”
그 여자아이가 흥분해 그렇게 말할 때 문가에서 부시럭하는 소리가 났다. 언제 열렸던 것인지 차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조금은 낯이 익은 얼굴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에 그 얼굴이 각인되자,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찔하게 뻗은 곡선을 가진 등의 소유자인 토끼탈녀가 저러다 눈알이 빠지지는 않을까 걱정될 만큼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황당한 표정을 좋은 시간을 방해받아 짜증이 어린 것으로 이해한 것인지 그녀는 이내 엄지를 척 들어 올리더니 계속 하라는 듯 한 손짓을 보내고는 살며시 문을 닫는 것이었다. 이 상황을 뭐라고 이해한 것인지 빤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보면 볼수록 참.”
그를 황당하게 만들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울 능력과 재능을 가진 여자였다.
피식하고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보면 볼수록 뭐요? 제가 예쁘단 말 하려 그러는 거죠?”
반면 앞에 앉은 여자애는... 분위기 파악 못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울 듯했다.
이런 상황을 만든 자신의 앞에 여자아이를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상황파악 못하고 떠들어대는 스타일, 난 딱 질색이야.”
“네?”
“드라마에 감정이입을 하는 건 좋은데. 드라마에서 연인사이로 나온다고 실제로 연인사이? 아니잖아. 정신 차려. 넌 그냥 나한테 지금 같이 일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네가 여자? 차라리 저기 토끼탈을... 아니다. 됐다. 아무튼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헛꿈 꾸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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