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통신용 수정구를 통해 견인족들의 테러로 엉망진창이 된 도시를 바라보며, 므르므르는 대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분노를 대변하듯, 그의 촉수들 역시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정녕 끝을 보자는 건가···!”
그동안 그가 마셜 상단의 패악질을 알면서도 참아왔던 건 그와,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전대 마셜 상단주와의 친밀한 관계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참는 것도 한계였다.
“어떻게 할까요, 므르므르님?”
5대 상단 중 하나인 소밀레 상단주의 물음에, 므르므르는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민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리십시오. 저쪽에서 제대로 하고 싶다니, 제대로 해줘야겠죠.”
지금껏 그는 행성 내부의 소란에 어지간하면 개입하지 않으려 해왔다. 직접 계약자인 그가 제대로 힘을 행사하면 단순히 도시가 파괴되는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결심을 깨고, 이번 일에 직접 개입하고자 마음을 먹은 것이다.
“전례를 만들 순 없지 않겠습니까?”
므르므르의 실체를 잘 알고 있는 소밀레 상단주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번 일이 단순한 헤프닝 정도로 끝나길 바랐다. 하지만 ‘행성의 신’인 그가 직접 개입하겠다고 움직인다면, 이번 일이 커졌으면 커졌지, 작아지지는 않으리라.
‘상단 전체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겠군.’
그러나, 므르므르가 마음을 굳혔다면 그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귀빈분들은 어떻게 할까요?”
여기서 말하는 귀빈들이란 트레이 일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행성을 떠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들은 이번 일과 상관이 없잖습니까.”
“알겠습니다.”
소밀레 상단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므르므르는 다시 통신용 수정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견인족 여러 명이 경찰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다.
그의 촉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근처의 고층 빌딩 하나가 마치 파뿌리 뽑히듯 뽑혀서 하늘에 붕- 떠오른다. 견인족들도, 경찰들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나 고층 빌딩은 그대로, 수직으로 견인족들이 있는 곳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견인족들은 피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짓뭉개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견인족을 살해했음에도 그의 얼굴엔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건 그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한번 피를 묻히기로 한 이상, 므르므르는 결코 고민하지 않았다.
***
“오면서 봤는데, 갑자기 도시가 시끄러워졌습니다.”
쾅-!
때마침 밖에서 들려온 폭음. 견인족들이 폭탄이라도 던지고 있는 모양이다.
“자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거든?”
조금 표독스러워진 트레이의 물음에 나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뭐, 우리 때문 아니겠습니까?”
견인족. 지금 도시에 무차별적인 테러를 가하는 이들이 트레이를 습격한 암살자와 동일한 종족인 것이 단순한 우연일 리는 없다. 저 테러는 우리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는데 우리가 도화선에 불을 붙였구나···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면 빨리 이 행성을 빠져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두려우십니까?”
“아니, 나는 대상인 트레이···! 가 아니라 두렵네, 두려워. 이대로 죽으면 말짱 꽝 아닌가?”
나는 여유롭게 말했다.
“괜한 걱정입니다. 정, 뭐하면 포탈 시계로 빠져나가면 되니까요. 이렇게 포탈 시계를···”
[현재 공간 이동 방해장이 전개된 상태입니다.]
[공간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공간 이동 방해장?’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으나, 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말했다.
“쓰면 안 됩니다.”
“···뭐, 뭐야?”
“우주선을 타고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창문을 통해 외부를 내다보며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주선이 있는 정거장은 무사할까? 내가 만약 침입자라 한다면, 제일 먼저 정거장부터 폭파하고 볼 것 같은데?
마치 내 생각이 씨가 되기라도 한 듯, 저 멀리서 보이는 정거장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정거장 전체를 뒤덮을 만큼, 강렬한 폭발이었다.
“뭐, 일단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나는 문을 열었다. 트레이는 그룹원들과 함께, 문밖으로 나섰다. 특급 안전 가옥을 회수하려던 그때, 한 무리의 조인족들이 나타났다. 그룹원들이 경계 어린 표정으로 검을 들었다.
“경계하실 거 없습니다. 저희는 소밀레 상단의 용병들입니다. 상단주님께 정거장으로 안내해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통찰안으로 그들의 말의 진위 여부를 확인했지만, 통찰안으로 판별하기에는 그들의 말은 ‘진실’이었다.
“아, 예. 맞습니다, 가시죠.”
“그, 그래.”
직전까지만 해도 굼벵이처럼 몸이 잔뜩 움츠러 들어있던 트레이는 슬슬 조인족 용병들의 눈치를 보더니 몸을 꼿꼿하게 펴고, 대범한 척 앞장서서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리가 지나치게 후들거리는 거 아닌가··· 뭐, 아무렴 상관은 없었지만.
내가 들어올 때마다, 시내는 한층 더 난장판이 됐다. 저 멀리서는 거대한 빌딩들이 하늘에 둥둥 떠올라 있었다. 아마 사이코키네시스(Psychokinesis)인 듯 보였다.
문득 전에 염동력을 사용하는 초월체를 상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저건··· 초월체가 사용하던 염동력과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신력까지 느껴지는 걸 보면··· 직접 계약자의 소행이 확실하다.
‘아까 그 므르므르라는 외계인인가.’
그런 그가 직접 힘을 사용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확실하게 소탕하려는 듯했다. 곧 빌딩들이 떨어지는 것을 기점으로, 잠시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우리 역시 다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견인족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트레이다!”
“트레이! 트레이!”
트레이를 발견한 그들의 눈에 어린 광기는 정거장에서 봤던 트레이 코인 찬양자들과 거의 동급이었다. 물론 차이점은 그들이 트레이를 미칠 듯이 증오한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죽어라! 마셜 상단주의 원수···!”
그들은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눴다. 조인족 용병들이 굳은 표정으로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제이드를 돌아봤다.
“제이드.”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의 몸이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견인족들의 방아쇠 역시 당겨졌다. 그러나 그는 그가 들고 있는 검으로 모조리 탄환을 튕겨냈다.
마지막 탄환을 깔끔하게 이등분한 그의 검의 다음 행선지는 견인족들이었다. 찌르고, 베고, 가른다. 견인족들도 제법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제이드는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니다. 신화 등급 스킬들로 꽉꽉 채운 그는···
‘반년 전의 나보다 강하겠는데?’
파워 인플레이션(Power Inflation)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격감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만큼, 나 역시 반년 전의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강해졌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견인족들을 모두 토막 낸 그는 검에 묻은 피를 바닥에 털어냈다.
“가시죠.”
“그, 그래.”
조인족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에 경의가 깃들었다. 이후로도, 우리는 몇 번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우리는 피해 없이 돌파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소밀레 상단의 개인 정거장.
정거장 안에는 작은 우주선이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밀레 상단주입니다.”
소밀레 상단주라고 자신을 소개한 조인족은 곧 우리를 우주선으로 이끌었다.
“귀인 분들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상황이 급하니 빨리 출발하셔야 합니다. 녀석들이 우주 해적을 끌어들였답니다.”
“우주 해적, 말입니까?”
트레이의 표정에 공포가 깃들었다. 우주 해적은 상인들의 가장 큰 적이니,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예. 고작 마셜 상단의 힘만으로 이 그랜드 머천트를 수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행성 전체를 포위할 생각인 모양입니다.”
“아, 예···”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 행성을 벗어나는 것은 요원해진다.
‘도와줘야 되나?’
잠시 생각이 들었지만 말았다. 굳이, 내가 개입할 일은 아니다. 곧 우리는 우주선에 탑승했다. 나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기프트를 사용해 우주선을 보강했다.
“갑니다.”
정거장의 문이 열리며, 엄청난 진동과 함께 우주선이 떠오른다. 나는 지상을 내려다봤다. 지상의 도시는 순식간에 작은 점이 돼 사라진다.
“후.”
트레이가 작게 한숨 쉬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꼿꼿하게 굳어있던 그의 몸이 풀어졌다.
“내게 대체 왜 이런 일이···”
“아직 안 끝났습니다.”
내 말에 그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 끝났다고?”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
내가 말을 이어나가는 사이, 우주선은 대기를 돌파하고 우주 공간으로 나왔다. 곧 우리는 마주하고 말았다. 주포를 내밀고 우리를 향해, 아니 행성을 향해 겨누고 있는 ‘전함’들을.
한 대, 두 대도 아니고 그 숫자는 수십 대에 달한다.
‘무슨 제독이라도 불러온 건가?’
어쩌면 내 추측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저 전함들 사이에선 ‘직접 계약자’의 기척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러나 트레이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다 말았다. 전함에서 주포가 발사됐기 때문이다.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분홍색의 광선이 우리를 향해 날아온다. 찰나의 상황, 나는 중얼거렸다.
“시간 가속.”
블링크를 사용했지만, 블링크가 사용되지 않는다.
아직도 공간 이동 방해장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하기야 그물 쳐 놓고 고기 잡는 격인데, 방해장의 범위는 상당할 것이다. 결국 나는 문을 열고, 직접 바깥으로 나왔다.
쾅!
마침내 광선과 내가 사용한 마력 보호막이 부딪쳤다. 마력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보호막은 부서지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전함은 한 대가 아니었다.
전함들이 불을 뿜기 시작한다. 나는 그 주포들이 단순히 나만 노린다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행성 역시 파괴할 생각인 듯 보였다.
하기야, 애초에 행성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건 제법··· 기분이 나쁘네.”
시야를 덮는 무수한 광선들의 무리를 보면서, 나는 불쾌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얕보인 것 같아서.”
나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전함들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사라져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전함들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먼지로 변해 우주 공간에 흩날리기 시작한다.
날아오던 광선이라 한들 예외는 아니었다.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담으며, 나는 스킬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본래는 라니아를 살해할 때 사용하기 위해, 재사용 대기시간을 초기화했던 스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