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반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우리는 레비아탄의 뒤를 쫓고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심해로 들어갈 거라는 예측과 달리, 녀석은 상하로 이동하며 말 그대로 바다를 마음껏 휘젓고 있었다.
가뜩이나 거대한 녀석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자, 녀석의 몸에 닿는 것은 죄다 유리처럼 산산조각 났다. 그중에는 거대한 섬도 있었지만, 그 역시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아마 녀석이 마음만 먹는다면, 세계 지도를 얼마든지 뒤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재해(災害)라는 표현이 절로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한편으로, 나는 의구심이 들었다.
‘녀석의 목적은 뭘까? 단순한 시간 끌기?’
시간 끌기라면, 그 이유가 뭘까? 마인화의 지속 시간은 이미 끝났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먹잇감도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기감이 뛰어난 녀석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일까.
‘설마 지독하게 겁이 많다던가···’
솔직히 이렇게 덩치 큰 녀석이 겁이 많을 거라 생각하긴 힘들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긴 아니다. 통찰안으로 생각을 읽는다면, 확실히 확인할 수 있겠지만···
통찰안을 사용한 채 녀석을 바라봐도, ‘통찰안의 단계가 낮아 자세한 정보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메시지만 떠올라, 그것 역시 불가능하다.
‘만약 녀석이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 노림수가 존재해서 저러는 거라면?’
물론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본다 한들, 여전히 상황은 제자리다. 녀석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메인 AI, 노틸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초월체들이 포착됐습니다.
그 말처럼, 구석의 모니터에 초월체들이 잡힌다. 그들과의 거리는 대략 50km 정도 떨어져 있으나, 이 속도라면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충돌하고 말 것이다.
충돌하면 그들이 어떻게 될지는, 뭐 말할 필요도 없겠지.
- 어떻게 할까요?
마음 같아선 한발 앞서 그들을 처치하고 싶었으나, 그럴 순 없었다.
그 전에 먼저 녀석들의 ‘소속’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 건 우리 그룹원들뿐만이 아니라, ‘변이체 연합’ 역시 마찬가지일 것.
‘녀석들 중에는 세상 어디든 볼 수 있는 초월체가 있다고 했지.’
물론 정말 존재하는지 그 존재를 확인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거짓말이라 치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섣부르게 행동하는 것은 삼가야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이 상황에 ‘변이체 연합’까지 적대로 돌리는 일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굳이 결정을 내릴 필요도 없이, 초월체들이 달아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마 레비아탄이나 노틸러스 1호의 존재를 느낀 모양이었다.
물론 전자일 가능성이 훨씬 높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이 달아나는 것이 그리 요원해 보이진 않았다.
레비아탄이 그들을 뒤쫓으려는지 방향을 선회했기 때문이다. 그 속도는 무척이나 빨라, 순식간에 녀석과 그들의 거리가 좁혀졌다.
“이거···”
- 어떻게 할까요?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녀석은 우리를 앞에 두고, ‘식사 시간’을 가지려는 모양인가. 당연히 녀석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둘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다?
나는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무인기 보내서 구출하면 되지.’
초월체들의 소속을 확인하는 건, 그다음 일로 미뤄도 된다. 생각을 즉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물론 무인기가 도착할 때쯤이면 그들은 이미 녀석의 위장 속에 처넣어질 것이다. 아무리 빨리 보낸다 한들 5분은 넘게 걸릴 테니 말이다. 즉,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일단 녀석부터 저지하자. 라우라 연결해줘.”
- 예.
짤막한 노틸러스의 음성과 함께 라우라가 연결된다. 그녀 역시 뒤따라오는 다른 수송기에 대기 중이었기에, 즉시 내 연락을 받았다.
- 말해.
“이프리트를 소환해줘.”
- 목적은?
“레비아탄의 말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무리 이프리트라 하더라도 녀석을 죽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건 이프리트를 저평가하는 것이 아닌, 레비아탄을 고평가하는 것이다.
내가 거인화 상태에서 사용한 ‘극한의 발도술’을 몇 번이나 받아낸 녀석이, 라우라가 소환한 이프리트에게 죽을 리 없으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어디까지나 저지 목적일 뿐이다.
하지만 소환된 이프리트를 본 나는 생각을 달리 먹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잠시 망각(忘却)하고 있었다. 라우라가 ‘정령술’이라는 분야에 한해서는 연병수에 버금갈 정도의 천재라는 것을 말이다. 서로를 흉흉하게 노려보고 있는 두 거인들.
왼쪽에 있는 거인은 내게 익숙한 이프리트고, 오른쪽에 있는 거인은 처음 보는 존재다. 하지만 전신에 흑색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걸 보면 그 정체를 어렵지 않게 추정 가능했다.
<어둠의 정령왕, 알폰소>
- 플레이어, 라우라의 소환수
지난번, 어둠의 정령을 소환하는 모습은 봤지만, ‘어둠의 정령왕’을 소환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 체구로 보나, 느껴지는 힘으로 보나, 결코 이프리트의 아래가 아닌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들을 둘이나 소환한 라우라는 어떤 존재일까.
‘괴물?’
하지만 난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로 사이가 좋지는 않아 보이는데···’
아니, 정정한다. 사이가 ‘많이’ 좋지 않아 보였다. 서로 으르렁거리더니, 무기를 들어 서로를 향해 겨누는 것을 보면 말이다. 급기야 둘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라우라, 의도한 거 맞지?”
- 의도한 건 아닌데···
그사이 둘은 제대로 맞붙었다. 이프리트는 화염의 창을 날렸고, 알폰소는 어둠의 방패를 들어 막아냈다. 징- 일대를 가득 메우는 진동음과 함께 불덩이가 그대로 흩어 없어졌다.
하지만 그 여파는 고스란히 일대에 전해졌다.
콰르릉!
천둥 번개가 치고, 거대한 해일이 일어난다.
그야말로 자연재해. 내가 탑승한 노틸러스 1호도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메인 AI인 노틸러스가 선체에 데미지를 입을지도 모른다면서 퇴각을 권고했다.
조금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던 나였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자연재해가 저들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들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뭐, 목적은 달성한 건가.’
레비아탄이 멈췄다. 아마 이프리트와 알폰소 때문이겠지. 노틸러스 1호 역시 자연스럽게 멈췄다.
“공격하자.”
녀석이 두 정령왕에 눈이 팔렸으니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
핵미사일을 압축해서 만든 김민수&아나스타샤 합작 특제 어뢰가 발사된다. 레비아탄을 처치하기 위한 용도로, 그 파괴력은 핵미사일의 그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것도 한 발이 아닌, 수십 발이다. 수십 발의 어뢰는 정확히 레비아탄의 몸에 명중했다.
‘······’
잠시 간의 정적 이후,
콰르릉-!
내 시야를 잠시 가릴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 녀석의 몸에서 일어났다. 바닷속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는 순간적으로 바닷물을 말라버리게 만들 정도로 대단했다.
수면 위로 드러난다.
“다들 괜찮습니까?”
제일 먼저 그룹원들을 확인한다.
- 나는 괜찮아.
- 예, 괜찮아요. 그런데 휘말렸으면 진짜··· 좆될 뻔했겠네.
라우라와 이서란의 무사함을 확인한 나는, 이번엔 선체 내부로 눈길을 돌렸다.
- 선체의 피해 11%. 오토 리커버리(Auto Recovery) 기능이 발동했습니다.
그 내구도만 2,000만(지난번 봤을 땐 1,500만이었지만 추가 장갑을 장착하며 내구도가 상승했다) 가까이 달하는 노틸러스 1호의 내구도가 단숨에 11%가 줄어들었다.
정확한 수치로 따지면 대략 220만이 한순간에 줄어든 셈이다. 내구도 220만이라면, 내가 보유한 1급 안전 가옥 다섯 채를 부수고도 남을 정도의 파괴력이다.
하물며 여파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저런 무지막지한 공격을 정통으로 맞은 녀석은 결코 무사하지는 못할 터였다. 그래, 어디까지 상식적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녀석은 그 ‘상식’을 거부하는 존재였다.
온몸에 상처를 입어 검은 피를 사방에 흩뿌리면서도 레비아탄은 기어코 움직이기 시작한다. 수십 발이나 되는 어뢰로도, 녀석의 발 하나 묶기에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는데···’
미사일을 개조하는 데 들어간 비용만 1억 기프트가 넘는다. 물론 기술 개발비가 그 절반 정도라 실질적으로는 5천만 기프트 정도로 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번에는 두 정령왕을 바라봤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멀쩡하지는 못했다. 이프리트의 몸은 반파됐고, 알폰소는 상반신은 멀쩡했지만 하반신이 날아가 버렸다. 그 여파의 위력이 그 정도로 상당했던 모양이다.
‘그러게 소환됐으면, 얌전히 싸울 것이지 쯧쯧···’
레비아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정령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녀석이 입을 벌렸다. 하지만 두 정령왕 역시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지는 않았다.
- 감히···
이프리트는 화염의 창을 불러내 레비아탄을 향해 휘둘렀다. 그의 창에 닿은 녀석의 몸이 검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레비아탄은 아랑곳하지 않고 창도, 이프리트도, 그대로 한입에 집어삼켜 버렸다. 알폰소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엷게 미소 짓더니 어둠의 방패를 꺼냈다.
- 옛 기억이 나는군. 폭식의 마왕과 비슷한 냄새야··· 이 세계에도 폭식의 권능을 가진 존재는 있다, 이건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그는 레비아탄을 향해 방패를 들었다. 방패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유동적으로 움직이더니 그의 몸을 감쌌다. 다음 순간, 레비아탄의 입이 그를 집어삼켰다.
두 정령왕이 어이없이 소멸된 후, 잠시 정적이 흐른다. 하지만 곧 하늘에서 포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위를 바라보니, 수송기에서 그룹원들이 스킬을 퍼붓고 있었다.
어지간한 초월체조차 녹여버릴 정도의 압도적인 화력이지만, 레비아탄을 상대로 얼마나 피해를 줄 수 있을진 의문이지만 말이다. 녀석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공격을 피하려는 듯, 녀석의 몸이 깊게 잠수한다.
‘언제까지 도망칠 생각이지.’
나는 그사이, 어느 정도 피해 수복을 완료한 노틸러스 1호를 몰아 다시 녀석의 뒤를 쫓았다.
***
하이 옵저버(High Observer)를 통해 퀸(Queen)을 비롯한 변이체 연합의 간부진들 역시 이진서와 레비아탄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투의 스케일이 그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저 괴물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
남극의 지배자, 바벨란트의 물음에 온몸에 푸른색 전류가 흐르고 있는 거인, 인도의 지배자인 인드라가 입을 열었다.
“글쎄, 누굴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둘 중 누가 괴물이지?”
“그야 당연히···”
바벨란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출력되는 영상 속에서, 레비아탄을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이진서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