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일단 각설하고, 한마디로 정리하면··· 기프트를 좀 아껴야겠다. 아니, 아껴야 한다는 표현보다는 비축해야 한다는 표현이 옳겠지.”
“예, 형님.”
정민혁은 군말 없이 긍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해했다. 기프트를 아끼라는 말, 이진서에게 농담처럼 많이 들어본 말이지만, 이렇게 진지하게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형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런 그의 생각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이진서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하냐?”
정민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 궁금합니다.”
“먼저··· 당분간 초월체 사냥을 못 할 것 같다. ‘변이체 연합’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거든. 물론 변이체 연합이 아닌 초월체는 사냥할 수 있겠지만, 그쪽에서 그렇지 않은 초월체를 골라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해서 말이다.”
“변이체 연합과··· 말입니까?”
그도 이진서로부터 변이체 연합에 관한 일을 전해 들었었다. 하지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는 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니, 애초에 초월체들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 게 가능하긴 한 건가?
아마 말하는 사람이 이진서만 아니었다면, 미리 전말을 전해 듣지 않았더라면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을지도 몰랐다. 이진서는 잠시 침묵하며 그의 표정을 살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솔직히 믿기지 않지만··· 영감님은 믿어도 될 거라고 말씀하시더라. 물론 찝찝한 면도 없잖아 있지만··· 우리에게는 중요한 ‘단기 목표’가 먼저니 말이야.”
정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단기 목표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레비아탄에게 집어 삼켜진 강순철을 구출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룹원, 그것도 여러 명도 아닌 단 ‘한 명’을 무사히 구출하기 위해서 변이체 연합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그는 이진서의 엄청난 자비심에 눈물이라도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불가침 조약은 언제까지 유지되는 겁니까? 레비아탄을 처치하고, 순철이 형을 구출하면 끝나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이진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러면 좋겠지만··· 이쪽의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제안을 그쪽에서 받아들일 리 없잖으냐? 아마 반년 정도는 유지해야 것 같다.”
“반년이라면···”
이제 반년이 넘게 흐른 시점이다. 다시 반년. 불가침 조약이 끝날 때쯤이면 일 년을 훌쩍 넘길 것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그때까지는 기프트 수급에 타격을 입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얼마나 타격을 입을지는 직접 계산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상당한 타격일 것이라는 건 분명했다.
“물론 우리도 호구가 아니니까, 저쪽의 요구 조건이 마음에 안 들면 불가침 조약을 깨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면 저쪽에서도 가만히 있진 않겠죠.”
이진서는 부정은 하지 않았다. 정민혁은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다 한들, 이미 결정돼버린, 그의 손을 떠나간 일이었다.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무르려면 어떻게든 무를 수는 있겠지만, 그래 봐야 이진서의 체면만 깎을 뿐이다.
차라리 이진서의 말대로, 요구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이쪽에 이득이 아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불가침 조약을 깨버리면 그만이다.
남들에게 비난을 듣긴 하겠지만··· 그래 봐야 언젠가 쓰러트려야 할 주적들의 비난일 뿐이다. 얼마든지 그 정도야 감수해줄 수 있었다.
‘변이체 상대로 무슨 신의는 신의겠어.’
“예, 형님, 알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약이 끝나고 나면··· 그 내용은 저희 간부진들에게 한번 공표해주세요. 정리해서 그룹원들에게 공표하겠습니다.”
‘뭐, 사실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초월체를 상대할 인간이라 해봐야 이 하늘 요새에서 몇 되지 않는다. 하물며 그 몇 중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이진서.
겉으로는 ‘하늘 요새’와 ‘변이체 연합’ 간의 불가침 조약이지만 실제로는 ‘이진서’와 ‘변이체 연합’ 간의 불가침 조약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정민혁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굳이 그룹원들에게 공표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상으로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래, 고맙다. 영감님이 이곳에 도착하면 그때 이야기 다시 나누는 걸로 하자.”
“예, 형님.”
“그리고 다음 이유는···”
“두 번째 이유도 있었습니까?”
“왜 세 번째는 안 물어보냐?”
“세 번째 이유도 있었습니까?”
“농담이다. 세 번째는 없어. 두 번째까지가 전부다.”
“두 번째 이유는 뭡니까?”
“내가 너한테 말했었지. X-347. 외계의 행성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이야.”
정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형님.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행성을 소유한다니, 그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의 형님은 역시 스케일부터가 달랐다.
“시스템에게 물어보니, 그 행성을 제대로 개척하기 위해선 플레이어 시스템과 ‘직접 계약’을 맺어야 한다더구나.”
정민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저희는 이미 ‘플레이어 계약’을 맺은 상태 아니었습니까?”
“애석하게도 아니야. 우리가 지금 맺은 건, 그냥 현실로 따지면··· 이중 계약 내지 간접 계약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해.”
“그, 그렇습니까? 그러면 형님이 맺으시려는 건···”
“말했잖냐, 직접 계약이라고. 플레이어 시스템과 직접 계약. 마치 채굴자, 발라르가 그랬듯, 나 역시 플레이어 시스템의 서포트를 제대로 받게 되는 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진서도 간접 계약과 직접 계약의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정작 그도 직접 계약을 맺은 적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확신(確信)하고 있었다.
‘그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직접 계약은 발라르를 따라잡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직접 계약이라는 걸 맺는 것과, 기프트를 모으는 것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겁니까?”
“그래.”
이진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100억 기프트.”
“예?”
“100억 기프트가 필요하다더라. 플레이어 시스템과 직접 계약을 하기 위해선 말이다.”
정민혁의 입이 벌어졌다. 그동안 그룹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맡아오며 많은 양의 기프트를 손에 쥐어왔던 그였지만, 100억이라는 건 그도 쉽게 상상하기 힘든 액수의 기프트였다.
“왜, 많냐?”
“예··· 솔직히 말하면··· 모을 수 있을까요?”
“지구상에 있는 변이체들을 모조리 때려잡으면, 100억 기프트쯤은 일도 아니겠지. 하지만 지금 두 상황이 맞물려서 얼마나 걸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상황이 꼬일 대로 꼬였다고, 이진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한번 줄일 방안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나도 쟁여둔 마통··· 아니, 기프트가 있으니까 서서히 줄여나가면 된다.”
100억 기프트. 모으는 게 힘들긴 하겠지만, 시간만 충분하다면 충분히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진서는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정민혁은 생각했다.
‘과연, 그 욕심쟁이들이 가만히 있을까?’
기프트를 아낀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지금 누리는 것들을 못 누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욕심 많은 이들은 이진서와 간부진들을 비난할 것이 틀림없고, 그렇게 되면 하늘 요새엔 크나큰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아니, 그러면 쫓아내면 된다.’
정민혁은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다. 지금의 하늘 요새는 ‘굳이’ 많은 인원이 필요 없다. 초월체들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면, 지구에는 안전지대 역시 생기는 셈이니 말이다.
간단하게 말해, 지상으로 내려보낼 생각이었다. 물론 지상으로 내려갈 이들의 삶은 하늘 요새에 거주하는 이들의 삶과 비교하면 처참해지겠지만···
그걸 신경 쓸 정도로 정민혁은 자비롭지 않았다. 이진서와는 다르게.
***
정확히 그로부터 일주일 뒤, 노틸러스 1호가 마침내 완성됐고, 첫 진수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태였다. 함장실 의자에 몸을 누인 채로 선실의 화면을 바라본다.
잠수함 내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수많은 ‘진혜연’들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 다 아나스타샤가 만들어낸 생체 안드로이드 로봇 Q 시리즈들이다.
선원복을 입고 있기에, 그때 떠올렸던 어색함은 조금 덜했으나, 여전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모델 좀 바꿔 달라니까.”
- 안녕하십니까, 함장님. 저는 노틸러스 1호의 메인 AI인 노틸러스입니다.
“어, 그래, 만나서 반갑다.”
나긋나긋한 소녀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 미리 말씀드리지만 AI들의 모델 변경은 불가능합니다. 승무원들은 저와는 별개의 존재들로서···
“그것도 못 하면서 메인 AI는 무슨···”
괜스레 투정을 부려봤지만, 그렇다고 한들 모델이 바뀔 리도 없었다. 결국 단념한 나는 이번엔 외부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름다운 바닷속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아직은 아름답다. ‘녀석’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녀석이 나타나는 순간, 이렇게 편안하게 화면을 보고 있을 시간은 없을 것이었다.
“이제 가볼까.”
- 확인했습니다.
노틸러스 1호가 천천히 바닷속을 기동(起動)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병수야.”
“예, 형님.”
내 앞에 새하얀 빛과 함께 나타난 연병수가 내 손을 잡고는 주문을 외웠다. 텔레포트(Teleport).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수송기 안에 탑승해 있었다.
“깔끔하네.”
옐레나가 사용한 것처럼, 방금의 텔레포트는 동작부터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역시 차원이 다른 마법적 재능. 옐레나의 마법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헤헤, 감사합니다, 형.”
“그래, 다시 대기해주고.”
“예!”
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수송기의 책임자인 이서란이 대물 저격총을 갈무리하고는, 내게 다가왔다.
“녀석의 위치를 파악했어요.”
“어딥니까?”
“이곳에서 500km 떨어진 섬 근처예요.”
말이 500km지, 상당한 거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녀석도 우리의 위치를 파악했겠죠.”
지난 일주일간, 노틸러스 1호가 완성될 때까지 놀고만 있었던 게 아니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녀석’에 대한 조사를 펼쳤다. 왜,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이란 말도 있으니까.
녀석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변이체를 ‘일직선’으로 이동해 정확히 집어삼켰다. 처음엔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했지만···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必然)이다.
그만큼 녀석의 탐지 능력이 대단하다는 방증이었다.
“녀석이 설마 도망가겠어요? 녀석의 지능은 떨어지는 편이라면서요?”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초월체들은 대부분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물론 설령 녀석이 그런 지능을 가지고 있다 한들, 녀석 정도의 체구라면 그 지능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냥 입만 벌리고 있으면 알아서 먹잇감들이 들어올 테니 말이다.
즉, 녀석은 가장 강력한 초월체지만, 반대로 말하면 경험은 부족한 초월체라 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