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거인족은 인간들과 달리 신을 숭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멸시하는 쪽에 가까웠다. 때문에 신의 도움을 받은 팔마스에 불만을 품은 거인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다만 팔마스의 세력이 거대하고, 반대 세력의 구심점이라 할 만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기에 잠자코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에 가장 가까운 인물인 세이세이가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젊은 나이에 부족장 자리에 오른 그는 젊은 거인들에 있어서는 전설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는 소식에 상당수의 젊은 거인들이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라스팔마스.
대전의 중앙에 걸터앉은 채 팔마스는 주사위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인간의 주사위의 수십 배 크기에 달하는 십이면체 뼈 주사위. 그가 오래전 직접 잡은 고룡의 뼈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주사위를 가볍게 던진다. 천장 거의 근처까지 올라갔던 주사위가 낙하해, 바닥에 떨어진다. 강렬한 바람이 일었다. 떨어진 주사위의 눈은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흡.’
팔마스의 눈이 흔들린다.
그가 죽인 고룡은 흑룡(黑龍).
흑룡은 미래를 볼 수 있는 힘을 가졌고, 그런 흑룡의 뼈로 만든 주사위로는 미래를 점칠 수 있다. 물론 정확한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닌, 눈의 숫자로 길과 흉을 점치는 것에 불과하지만.
하필이면 가장 높은 수- 대흉(大凶)인 12가 나왔다.
‘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겠군.’
팔마스는 이 내전(內戰)이 쉽게 그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지금이라도 신을 죽이고, 녀석들을 회유해야 하나.’
‘신’을 죽인다면 당장 그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용해진 틈을 타서 저들의 주축인 세이세이를 제거한다면 미래의 위협도 막을 수 있을 테고 말이다.
그는 점점 마음을 굳혔다. 그때, 그에게 들려오는 무뚝뚝한 목소리.
“무슨 일이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고, 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보는 순간, 그는 품었던 살심이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덤비면 죽는다고.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그는 여전히 무표정이다. 팔마스는 그가 자신의 생각을 꿰뚫고 있음을 깨달았다. 또한 그가 여기서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의 생사 여부 역시 달라질 거라는 걸.
그는 거인의 왕이라는 위명에 걸맞지 않은, 최대한 예를 갖춘 부복(俯伏) 자세로 말했다.
“일부 거인족들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반기라··· 나는 하나 된 거인족을 원한다고 전에 말했을 텐데.”
말투는 여전히 평탄했으나, 팔마스는 그의 심기가 불편함을 깨달았다.
“곧 진압할 예정입니다.”
물론 말이 곧이지,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반기를 든 거인족들 역시 신의 무구로 무장했을 테니 말이다. 그런 그의 대답에 신이 간단한 해결책을 내놨다.
“힘을 주지.”
“힘 말씀이십니까? 무구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네 수하들을 괴물로 만들면, 손쉽게 반란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
팔마스는 그의 호위의 최후를 떠올린다. 검은 덩어리에 의해, 괴물로 변한 그는 그조차 섬뜩하게 만들 정도로 흉측한 몰골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들을 그렇게 만들겠다고?
‘미쳤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쳤다. 그러나 팔마스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걸로 하지.”
“···예.”
어차피 내전이 일어나면 결국 상당수의 거인들이 희생된다. 오히려 괴물로 만드는 것이, 더 큰 희생을 막는 길일지도 모른다···라면서 그는 애써 자기 합리화를 했다.
그는 끝끝내 인정하지 못했다. 이미 ‘신’에게 그는 영혼 깊숙이 굴복했다는 걸 말이다.
***
조력자, 세이세이의 활약에 힘입어 내 세력은 무려 오천 명 가까이 불어났다. 오천 명의 대다수가 전부 고대의 거인들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그들을 전면에 내세울 생각은 없었다. 내게 힘을 빌려준 거인족 용사, 간츠의 부탁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변이체의 탄생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었다.
채굴자가 마음먹고 변이체 바이러스를 뿌리는 순간, 지구와 똑같은 지옥도(地獄道)가 펼쳐질 테니 말이다. 아무리 나라 하더라도 저번과 같은 괴물이 오천 마리나 된다면 막을 수 없다.
아니, 거인의 왕, 팔마스를 따른다는 거인들의 숫자까지 합친다면 수만 마리에 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최소 초월체 수만 마리가 탄생하는 셈- 그야말로 끔찍한 재앙이었다.
‘물론 거인들이 모조리 플레이어로 각성한다면 막을 수 있겠지만.’
플레이어들은 변이체 바이러스에 면역이다.
거인 변이체가 존재하는 마당에 거인 플레이어가 존재하지 말란 법은 없으니,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플레이어로 각성시킬 방법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생각만 했는데, 메시지가 떠오른다.
[플레이어, 이진서는 아직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기에, 우리 회사와는 직접 계약이 불가능합니다.]
‘회사라···’
기프트로 말도 안 되는 이적(異蹟)을 일으킬 수 있는 건 전부 ‘플레이어 시스템’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체계를 구축한 회사는 어떤 회사란 말인가.
애초에 채굴자와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라는 것만 봐도 이 회사가 보통 회사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지만,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직접 계약 조건은 뭔데?’
[행성을 한 개 이상 소유할 것, 적어도 100억 기프트 이상 보유할 것.]
‘······’
100억 기프트야 초월체들을 처치한다면 어찌어찌 모을 수 있겠지만, 행성을 소유한다는 건 불가능한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채굴자에게 계약으로 묶여있는 지금이라면 더욱 말이다.
어차피 오르지 못할 나무, 깔끔하게 포기했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혹시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는 채굴자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나?’
나는 이미 전에 지구에 존재하는 채굴자의 존재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고, 거절당했었다. 내가 채굴자에 대해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 블랙마켓의 상인을 통해서였다.
[발라르.]
짤막한 대답이 들려왔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지구를 채굴기로 만든 채굴자와 동일한 이름이네?’
아니, 이름만 동일한 것은 아닐 것이다. 채굴자가 몇 명이나 될지는 모르지만, 발라르란 이름을 가진 채굴자가 흔할 리는 없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
그럴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동일 인물일 줄은 몰랐기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물론 이 세계의 그와, 지구의 그는 개별적인 존재입니다. 이 세계의 발라르는 단순한 기억의 편린(片鱗)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이 세계의 그는 얼마나 강한 거지?’
[알 수 없습니다.]
‘어째서?’
[이 시절의 그는 아직 우리 회사와 계약을 맺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플레이어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건, 그나마 이쪽의 입장에선 호재라 할 수 있었다. 만약 플레이어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상대하기 까다로웠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함부로 약하다 재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질문을 바꿔 묻는다.
‘그렇다면 지구의 그는 얼마나 강한 거지?’
이번에는 명확한 대답이 들려왔다.
[플레이어, 이진서보다 훨씬.]
지금의 나는 강해질 수 있는 최대한으로 강해졌다.
이제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은 특수한 방법이 아닌 이상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지구의 그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강하단다. 예상은 했지만, 입맛이 쓰다.
그나마 내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이 세계의 그, 과거의 그라는 게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생각을 마친 나는 ‘거인화’를 사용했다. 내 몸이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순식간에 수십 배 크기로 자라났다. 앞에 있는 거의 인간의 성문 크기만 한 문을 열고 나간다.
- 우오오!
나를 본 고대의 거인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나는 그들 중 가장 강한 ‘나우나우’와 ‘소로로’를 굴복시킴으로써 내 ‘힘’을 입증했고, 기프트를 사용해 그들에게 아낌없이 음식을 공급했다.
특히나 그들은 음식에 약했다. 하기야, 그 정도 크기면 배를 채우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이 필요할 테니 어찌 생각하면 그들에게 당연한 노릇이었다.
결국 그들은 몸도, 마음도 모두 다 내게 복종하는 상태였다. 그들은 이내 들고 있는 창과 총들로 바닥을 찧기 시작했다. 쿵! 쿵!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팔마스를 쓰러트리자!
- 킬 더 팔마스!
그들의 고함에 힘입어,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나를 따라라, 그러면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얻게 될 것이다.”
“왕이시여, 라스팔마스로 진격할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내게 무릎을 꿇고 있는 세이세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혼자 간다.”
“어째서···”
왜냐면, 너희는 플레이어가 아니니까, 라고 말해봐야 그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기에, 나는 다른 핑계를 들었다.
“거인의 왕과 직접 결착을 지을 셈이다. 신성한 결투를 통해!”
“신성한 결투?”
세이세이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지만, 그와 달리 다른 거인들은 그다지 지능이 높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엿듣기라도 했는지 몇몇 거인들이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그리고 고함은 곧 다른 거인들에게도 전염되기 시작했다.
- 신성한 결투!
- 잔혹한 우리의 치프는 팔마스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찬탈할 셈이야!
- 영리한 찬탈자!
곧 그들이 길을 열었다.
터벅터벅, 그들의 사이를 걸으며 나는 저 멀리 떨어진 산을 바라본다. 로키 산. 왕의 궁전 ‘라스팔마스’가 위치해 있다는 곳. 저곳으로 홀로 향할 생각이었다. 블링크(Blink)를 사용한다.
몸이 거대해진 만큼, 마력도 그에 비례해 많이 들었지만, 이동 거리 역시 늘어났다. 블링크를 여러 번 사용한 끝에 멀리 떨어져 있던 로키 산이 지척에 이르렀다.
앞에 서 있던 거인들이 나를 바라보며 고함을 질렀다.
“막아라!”
“배신자다!”
그들은 이쪽을 향해 투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방패를 들어 쳐냈다. 쳐낸 창은 오히려 그들의 가슴에 꽂혔다. ‘절대 반사’ 효과의 발동 때문일 것이다.
순식간에 그들을 돌파한 나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거대한 짐승에 탑승해있는 거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건 뭐야?”
- 무크다.
“무크?”
간츠의 말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무크를 길들여서 타고 다니는 모양이군.
거인만큼 거대한 짐승- 꼭 늑대의 형상과 닮아 있었다-의 등장. 나를 향해 흉포한 울음소리를 흘리며 달려든다. 무크의 등 위에 올라타 있던 거인이 나를 향해 창을 뻗었다.
인간으로 따지면 창기사인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