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물론 스킬을 모조리 쏟아부으면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나 ‘채굴자’의 존재. 지구의 채굴자와 동일한 존재인진 알 수 없지만···
보유한 기프트와 무력이 정비례한다는 걸 감안한다면, 틀림없이 강할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그를 상대한다고 가정한다면 스킬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 물론 그래봐야 당장 사용 가능한 스킬은 ‘시간 가속’과 ‘마인화’가 전부지만 말이다.
생각하던 나는 팔을 휘둘러, 변이체의 공격을 쳐내고는 뒤로 몸을 날렸다. 조금 뒤로 밀려났던 변이체는 사족 보행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덩치에 사족 보행이라니.
끔찍하기 짝이 없다.
나는 슬그머니 거인들을 돌아봤다. 그들에게도 변이체는 생소한 존재인 듯 당황한 표정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광선총으로 나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피유-
나는 검에 마력을 실어 나를 향해 날아오는 붉은 광선을 쳐냈다. 쳐낸 광선이 통로의 천장 부분을 건드린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바리케이드가 무너지면서 거인들을 향해 떨어졌다.
그것만으로 큰 효과를 기대하긴 힘들겠지만, 잠깐 그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검에 마력을 집중한다. 잠깐의 정신 집중 끝에 압축한 3미터에 달하는 검기.
내 대해(大海)와 같은 마력이 실려 있는 만큼, 당연히 검기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머릿속에 검성, 아자르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가 사용하는 극한의 발도술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영령 빙의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로도 한번 사용해본 적 있는 그의 기술. 검을 직선으로 휘두르자 검기가 뻗어나간다.
쐐애액.
검기는 변이체를 그대로 두 토막으로 베어버리는 데 성공했다. 변이체의 검은 피가 사방에 흩뿌려진다. 나는 마력을 둘러 피를 막아냈다. 하지만 거인들은 그대로 피를 뒤집어썼다.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마치 의지가 있는 것처럼 검은 피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말이다.
“이게 무슨···!”
그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 친다. 그러나 그들은 곧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그들의 몸에 검은 반점이 올라오며, 그들의 몸이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아아악.”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변이체로 변하는 모습을 처음 본다. 세상이 코인 채굴기로 포밍될 때, 배달부 일을 하느라 바깥에 나와 있었던 데다, 혼자 있었기에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까.’
죽이려 마음먹는다면 지금의 그들을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시간 회귀의 물약을 꺼내 그들의 몸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치료하기로 결심했다.
변이체로 변해가는 그들을 죽이는 건 채굴자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10만 기프트짜리 물약의 효과는 확실했고, 그들의 검은 반점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너희들의 목숨을 구했다. 계속 덤빌 건가?”
만약 계속 덤비겠다고 말한다면, 이 자리에서 그들을 죽일 생각이었다. 내게 포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니까. 그들은 고민하는 낯빛을 했으나,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닙니다, 치프로 모시겠습니다. 생명의 은인이시여.”
도합 열 명의 거인들이 내게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내 자비에 감사하며, 앞으로 나를 치프(Chief)로 모시겠다고 충성을 맹세했다. 부족을 만들 생각 따윈 없지만 굳이 도움이 되겠다는데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요새 안쪽으로 데려갔다. 그들에게 채굴자의 존재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혹시 신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 설명을 들은 거인 한 명이 아는 척을 했다.
“신?”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쯤, 자신을 신이라 칭하는 한 남자가 왕궁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는 느릿느릿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
당시만 해도, 거인족은 용족과의 전쟁에서 밀리고 있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였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하늘’이었다. 하늘을 장악한 용족을 이긴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인들은 돌덩어리를 날려대는 것으로 응수했지만 그렇게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안 되겠다 생각한 거인의 왕, 팔마스는 신무기 개발을 지시했고 이로 탄생한 것이 바로 발리스타.
발리스타는 용을 죽이기에 충분한 파괴력을 가졌지만, 애석하게도 그 사정거리나 정확도가 부족했다. 거인족 중에 뛰어난 대장장이가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바로 그맘때쯤이었다.
왕궁에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이 나타난 것은. 신은 용족과의 전쟁을 돕겠다고 제안했고, 팔마스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 거인들은 신의 무구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사정거리도 파괴력도 발리스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의 무구의 등장에 전세는 급격하게 기울었고, 결국 용족은 대전쟁에서 패해 뿔뿔이 흩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
“제가 왕궁에 있는 친구에게 전해 들은 건 이게 전부입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는 채굴자의 목적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기프트가 목적이라면 어째서 지구처럼 코인 채굴기로 테라포밍하지 않은 걸까? 어째서 지구처럼 인간들- 거인들을 모조리 다 변이체로 만들지 않는 걸까?
‘하기야···’
이곳에 나타난 ‘신’이 애초에 지구의 채굴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저 이 모든 것은 내가 추측하는 것일 뿐. 설령 동일 인물이라 한들 이 세계는 적어도 수천 년 전의 과거다.
그가 지구에서와 동일하게 행동한다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 만나보긴 해야겠군.’
생각을 마친 나는 입을 열었다.
“혹시 왕에게 불만을 품은 거인 부족은 없나?”
“산하로 끌어들이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채굴자가 무슨 꿍꿍이로 거인족과 힘을 합쳤는지는 몰라도, 거인족을 내부 분열시킨다면 그의 계획을 망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거인은 고개를 저었다.
“왜?”
“그들은 치프를 치프라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인정하게 만들면 되지.”
“치프가 인간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거인들은 인간을 나약하디나약한 종족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나약한가?”
“그건 아니지만···”
“그리고 내가 인간인 것이 문제라면··· 일시적이지만 나도 거인이 될 수 있다고.”
거인 용사, 간츠의 힘을 빌리면 된다. 동족상잔을 하기 싫어 빙의에 불응했지만, 거인족 전체를 상대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그가 빙의를 거부할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내가 거인화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나도 이 자리에서 스킬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기에 굳이 증명하진 않았다.
“일단 이곳부터 시작하지.”
“검은 대지부터 말씀이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임무 내용이 갱신됩니다.]
[동화 속의 진실을 찾아서.]
[당신은 거인족의 뒤에 흑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흑막이 존재하는 한, 이 세계엔 전쟁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흑막을 쓰러트리고, 이 세계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십시오.]
[임무의 난이도가 상승된 만큼 보상이 상향 조정됩니다.]
난이도가 상승된 만큼, 보상이 상향 조정됐단다. 썩, 반가운 메시지는 아니었다. 채굴자를 쓰러트리는 일이 전쟁을 끝내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방증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반드시 해내야 한다.’
거인족의 분열이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
벽장을 빼곡히 채운, 물경 수천, 수만 권에 달하는 책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이 중에서 ‘라그나로크’와 관련된 책을 찾는다는 건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때, 그들 사이로 한 남자가 불쑥 나와 손을 뻗었다.
“아무 책이나 골라볼까?”
태평하게 말하는 그의 손엔 책이 들려 있었다.
[거인왕 팔마스의 회고록(回顧錄)]
‘거인왕이라···’
남자는 라그나로크가 거인족과 용족의 전쟁을 일컫는 말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이 책은 라그나로크와 연관이 있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찾았네.”
“어떻게 그걸 한 번에?”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는 사람들의 물음에,
“내가 좀 운이 좋다고.”
남자- 아론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아무리 운이 좋아도 그게 가능해?”
누군가가 의문을 떠올렸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곧 그들은 책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
난데없이 나타난 거인은 부족원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신의 무구조차 그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세이세이는 ‘그 날’ 이후, 간신히 기력을 되찾은 부족의 대전사, 나우나우를 내보냈지만 거인을 만나자마자 그는 어린아이처럼 바지에 오줌을 지려버렸다.
그의 몸속 깊숙이 각인된 공포.
“이, 인간···”
놀랍게도 거인은 인간이었다. 나우나우가 무력화되자, 세이세이는 저항을 포기했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거인을 바라본다.
키 차이 때문에 서로 마주 보는 형국이 됐다. 자신들보다 작지만, 거인이 틀림없다.
“어떻게 우리 거인으로 변신한 거지?”
“내 마법이라 해두지.”
“그런 마법은 듣도 보도 못했는데. 그나저나, 나를 죽이지 않는 걸 보면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거인- 이진서가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면 제안이지.”
“무슨 제안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동족들을 배신할 생각이 없다.”
“배신하라는 게 아니야. 당신은 ‘신’에 대해 알고 있겠지.”
“······”
“그는 사실 너희의 행성을 갈취하러 온 약탈자다. 우리 행성이 그랬던 것처럼, 너희 거인족 역시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지겠지.”
“새삼스러운 말을 하는군. 어차피 이해관계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닌가? 필요가 사라지면 서로 버리고 버려지는 관계. 우리도 어느 정도 대비는 하고 있다.”
“너희 거인족은 그를 막을 수 없다.”
분명 거인족은 강인한 종족이다.
하지만, 거인족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채굴자를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국 작정하고 변이체로 만들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전부 당하고 말 것이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 그의 계획을 틀어지게 만들기 위해선, 반드시 거인들의 분열이 필요하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묻는다.
“내가 인간 밑으로 들어오란 소리인가?”
“지금 이 모습이라면 상관없을 테지. 혹시 키가 달려서 그런 건 아닐 테고.”
그러면서 이진서는 슬쩍 나우나우를 바라봤다. 만약 키와 덩치 때문에 인정을 못 하는 것이라면, 그가 아닌 나우나우가 부족장 자리에 올랐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몸짓으로 물은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줘라.”
그러나 그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진서는 검을 내려놨다. 불만을 품고 있던 이곳, 검은 대지 부족을 생각보다 간단하게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