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이프리트 소환.’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소환(G)을 사용합니다.]
메시지와 동시에 일대를 아우를 정도로 거대한 붉은색의 소환진이 지면에 생성됐다. 다음 순간, 강렬한 폭발과 함께 얼음들이 일제히 증발하며 수증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마침내 그 속에서 온몸이 화염에 둘러싸인 거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가 내 스킬에 의해 현세에 강림한 것이다. 이프리트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동시에 지면에서 화산이 분출하듯 엄청난 화염이 솟구친다. 얼핏 보기엔 화염 마법과 비슷하지만 스케일이 차원이 달랐다. 다가오던 변이체들이 휘말려 그대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졌다.
물론 초월체들은 한 번에 죽지 않았지만. 녀석들에게도 이 안에 있는 것은 무리였는지, 다급히 자리를 뜨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데미지를 입는 건 비단 변이체들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있는 안전 가옥 역시 고스란히 데미지를 입고 있었다.
[1급 안전 가옥의 내구가 감소합니다.]
[1급 안전 가옥의 내구가 감소합니다.]
···
연이어 떠오르는 메시지. 그 말처럼 내가 있는 ‘1급 안전 가옥’의 내구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안전 가옥은 그 내구가 다해 잿더미로 변해버릴 것이다.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내구를 살피며, 수리 타이밍을 잡던 나는 그에게 말했다.
“저기··· 좀 여기는 피해서 공격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하찮은 벌레 주제에 감히 편법을 사용해, 이 몸을 불러내다니.
못마땅한 얼굴로 오히려 안전 가옥을 향해 불덩어리를 날려 오는 그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프리트가 순순히 내 명령에 응하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래서는 공격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멋대로였다. 물론 감히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디까지나, 아쉬운 건 이쪽이었으니 말이다.
‘빨리 가자.’
이프리트가 변이체들을 막고 있는 사이, 나는 안전 가옥에서 내렸다.
안전 가옥보다 직접 가는 것이 빠르다는 판단에서였다. 1급 안전 가옥을 다시 아공간 창고에 수납하는 데 성공한 나는 연이어 블링크를 사용해 빠르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힐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본다.
화염 분출이 멈추자 수십 마리의 초월체들이 이프리트를 향해 달라붙는 모습이다. 하지만 손쉽게 그들을 떨쳐버리고 화염의 검을 소환해 관통한다. 과연 불의 정령왕다운 경이로운 무력.
하지만 나는 이프리트가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초월체는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닐 뿐더러, 결국 그는 내 마력에 의해 소환된 ‘소환수’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로부터 대략 십오 분 뒤, 쉬지 않고 블링크를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 예상처럼 이프리트가 소멸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초월체들이 다시 쫓아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제법 많이 벌었다. 곧 ‘질주’가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때,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단검을 휘둘렀다. 느낌은 없었지만, 내 감이 잘못됐을 리 없다. 진리의 눈, 게비샤를 사용하자 검은 형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데스 스토커.
투명화 능력을 가진 변이체. 그 외에 딱히 까다롭다 할 만한 것은 없지만 그 투명화 능력 하나는 대단해서 처음 상대했을 때 나는 게비샤를 사용하고도 그 형체를 보지 못했었다.
물론 마력 능력치가 그때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한 지금은, 또렷하게 보였지만 말이다.
‘혼자인가?’
다행히 데스 스토커는 그렇게 강력한 개체는 아니다. 지금 몸 상태로도 일대일이라면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을 정도로. 녀석이 바닥에 손을 대자 거대한 가시가 솟구친다.
하지만 앱솔루트 배리어에 막힌 가시는 더 전진하지 못했다. 녀석에게 달려들어 사신의 단검을 미간에 꽂았다. 쑤욱!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머리가 박살 나며 사방으로 피가 튄다.
솟구친 가시가 곡선을 그리면서 움직이며 연신 내 몸을 노린다. 공격이 갈수록 빨라지고, 강해져 앱솔루트 배리어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뚫릴 것이다.
물론 그러도록 가만히 놔둘 생각은 없었다. 단검에 마력을 주입한 상태에서 그대로 수직으로 내리그어 녀석의 몸을 그대로 반으로 갈라버렸다. 사방에 흩뿌려지는 핏물과 살점들.
[1,359,582기프트를 획득했습니다.]
손을 털어낸 후 하늘을 바라본다. 먹구름을 헤치고, ‘질주’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날개를 펼치고 질주를 향해 날아올랐다. 열려있는 질주의 조종석에 앉는 데까지 성공했다.
‘부스터.’
[부스터 모드를 사용합니다.]
질주의 형태가 날렵하게 변화한다.
내 마력을 빨아들인 질주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진다. 나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초월체들이 멀어진다. 한 10초, 20초 정도만 늦었어도 발목을 잡혔을 것이다.
[목적지를 설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최대한 거리를 벌리자.’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지 계속 따라오고 있다. 굳이 하늘 요새를 노출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므로 따돌려야만 했다. 내 의지에 따라 질주가 빗줄기를 가르며 세차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
전성기 시절, 구원교의 위세는 대단했다. 현재 존재하는 사이비의 과반수가 구원교를 모태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그 당시, 구원교는 해외에도 발을 뻗었었다.
필리핀 지부는 그때 설립된 해외 지부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설립 이후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이제는 상당수의 필리핀인들도 가입한 상태였다.
정상수는 그런 필리핀 지부의 지부장이었다.
물론 교주가 몇 년 전부터 이곳을 들르지 않아, 사실상 그는 교주와 같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세상이 코인 채굴기로 변해버린 후, 그는 플레이어로 각성했다.
4년 전, 그가 횡령한 자금의 일부로 코인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교단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플레이어로 각성한 신도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리더가 됐다.
필리핀 전역에서도 그만한 세력은 없었기에, 구원교의 이름 아래 필리핀의 플레이어들이 몰려들었다. 그의 구원교는 필리핀에서 제일가는 세력이 됐다.
그는 구원교의 이름을 상수교로 바꾸고 스스로를 교주로 자청했다. 이에, 논란이 생기기도 했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자에 등극한 그는 그런 사소한 논란 따위는 가볍게 무마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상수교는 건재했다. 물론 지금까지 건재했다는 건, 더는 아니라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상급 변이체가 최상급 변이체로 변이된 지 고작 일곱 시간.
그가 쌓은 바리케이드, 상수의 장벽들은 모두 다 무너졌다. 신도들은 혼란에 빠졌고, 그건 정상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대처도 최악이었다. 신도들을 버린 야반도주였으니 말이다.
“어차피 못 구할 것들이야. 나만 있으면, 우리 상수교는 영원할 거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교주님.”
그를 따라온 목사들이 맞장구쳤다. 정상수는 그들의 말이 사탕발림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말에 위안을 얻었다. 그는 자신감을 얻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상수교를 일으키는 거다. 저 바다 어딘가에 있는 엘도라도로 가서.”
물론 목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미친놈···’
‘네 기프트 때문에 지금은 순순히 따르지만 기프트만 빼앗고 나면 너도 끝이다.’
동상이몽의 상수호는 물살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물살은 거셌지만 상선을 기프트로 개조한 상수호는 흔들림 없는 편안함을 그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정상수를 비롯한 상수교의 목사들은 죄다 선실 안에 들어와 있었고, 제대로 보초도 서지 않았다. 설마 이 바다 한복판까지 변이체가 오겠냐고 안일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교도들은 어떻게 됐을까?”
정상수의 물음에 질문을 받은 목사는 그런 뻔한 걸 왜 묻냐고 속으로 생각하며, 겉으로는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아마도 변이체에 의해 뜯어 먹히거나 바다에 수장됐을 겁니다. 운 좋으면 살아남았을 수도 있지만··· 글쎄요.”
“교도들을 괜히 두고 왔나? 다시 돌아갈까?”
이게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목사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상수님께 선택받지 못한 미천한 인간들일 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그렇지? 그런 미천한 놈들을 내가 신경 쓰면 안 되겠지?”
사실 정상수도 그냥 해본 말이었다. 뭇 사이비 교주들이 그렇듯,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의 안위였으니 말이다.
“예, 상수님께서는 새로운 엘도라도를 만들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자네에게도 한자리 줄 거야.”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정상수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우리 배가 조금 기운 것 같지 않아?”
“아마 파도 때문에 흔들려서일 겁니다.”
하지만 파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선창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검푸른 암초.
‘아니, 저건 암초가 아닌데···’
저런 사이즈의 암초가 존재할지 의문이며,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변이체인가?”
“······”
“저런 변이체는 처음 보는데···”
정상수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한눈에 다 담지 못할 정도로 ‘더럽게’ 크다. 저렇게 큰 걸 과연 변이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변이체가 맞긴 맞는 걸까?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바깥으로 나왔다. 만약 변이체가 맞다면 처치해야만 했다. 초월체로 추정되지만 그는 이미 초월체를 처치해본 경험이 몇 번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태껏 살아남지도 못했을 테니까. 지금까지 처치해왔던 초월체처럼 저 초월체 역시 처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주무기인 책을 들었다. 당연히 평범한 책이 아닌 신화 등급 무기. ‘라파엘의 전도서’.
“하늘에 계신 전지전능한 아버지시여, 나를 위해 번개를 불러주소서.”
기도와 함께 책이 빛나더니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졌다. 콰르릉. 단순히 번개가 떨어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새하얀 불꽃으로 불타올랐다. 꽤 멀리 떨어진 상수호에서도 눈이 부실 정도.
“역시 상수님이십니다.”
“위대한 상수님을 찬양하라!”
하지만 정상수의 표정은 별로 밝지 못했다. 검푸른 암초가 점점 붉게 물든다. 그리고 그는 곧 깨달았다. 사실 몸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저 등의 극히 일부였을 뿐이라는 걸.
‘저건···’
도망치고 말고 할 새도 없었다.
육지에 몸을 드러낸 거대한 괴물이 입을 벌리자, 그대로 상수호 전체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상수는 다급하게 책을 들고 주문을 외웠지만 의미 없었다.
상수호와 안에 있던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집어삼킨 존재는 깊이 잠수했다. 바다는 다시금 고요해졌다. 그저 정상수가 사용했던 라파엘의 전도서만이 둥둥 바다를 떠다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