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지금의 나조차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존재. 그러나 그런 이프리트가 밀리고 있다. 킹 타일런트라는 초월체에 의해서.
녀석의 주먹이 뻗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화염 거인의 몸에 구멍이 뻥뻥 뚫린다. 물론 새로운 화염이 금세 그 자리를 대신했지만, 구멍이 뚫리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이대로 간다면 이프리트가 역소환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눈 한번 깜박거릴 새에 녀석의 앞에 도착한 나는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킹 타일런트의 신체를 베어낸다.
절삭검의 효과로 인해서, 녀석의 피가 흩뿌려진다. 검의 정령, 세리아가 녀석의 상처를 더 찢어 놨다. 이에, 녀석이 주먹을 휘둘렀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뒤로 나가떨어진다.
물론 앱솔루트 배리어를 사용했기에 데미지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녀석 역시 데미지를 많이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껏 봐왔던 변이체들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괴물의 출현.
어설프게 상대했다간 오히려 이쪽이 당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성운의 가호를 사용해야 하나.’
성운의 가호를 사용한다면, ‘영령 소환’을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옐레나 같은 상급의 정령을 소환한다면 제아무리 녀석이라 하더라도 쉽게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전에···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다 해본다.’
라우라를 바라본다. 설마 이프리트가 밀릴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듯,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괴물은 처음인 듯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말한다.
“어떻게든 녀석을 묶어.”
그녀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몸은 내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이프리트의 몸이 푸른색 화염으로 변하더니, 녀석의 몸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바리케이드 벽이 녹아내릴 정도의 고온. 녀석 역시 고통스러운지, 표정이 일그러진다. 나는 주춤거리는 녀석을 향해 발도 자세를 취했다. 극한의 발도술.
체력과 마력을 90% 소모하는 대신, 다음 발도 공격을 강화하는 기술.
[체력과 마력을 90% 소모해, 다음 발도 공격을 780%만큼 강화합니다.]
체력과 마력이 한순간에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내 전신이 후들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내가 들고 있는 검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녀석이 돌아본다.
내 검이 휘둘러진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녀석은 피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발도에 의해서 몸이 이등분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거인의 몸이 허물어진다.
그것도 모자라서, 연이어 연쇄 폭발마저 일어난다. 내가 사용했지만, 경이로운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해치웠나?”
말해놓고서도 아차 했다.
전형적인 패배 플래그 아닌가. 연기를 뚫고 거인의 주먹이 솟구친다. 방금 전 발도술에 의해 상당한 데미지를 입은 모양이지만 주먹을 휘두를 힘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날아오는 녀석의 주먹을 바라보며 몸 상태를 점검한다. 체력도 바닥, 마력도 바닥. 앱솔루트 배리어를 사용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렇다고 피하기에도 너무 늦었다. 그렇다면···
‘피하지 않는다.’
녀석의 주먹이 그대로 내 몸을 때린다. 엄청난 격통(激痛)과 함께 나는 그대로 날아가 벽에 꽂히고 말았다. 벽이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녀석이 성난 짐승처럼 달려온다.
마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나를 향해 연타를 날리기 시작했다. 펑! 펑! 2급 바리케이드를 무너트렸던 그 가공할 위력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과거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죽을 때가 되면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는데 그런 맥락일까?
- 오빠는··· 우리 집을 말아먹은 거야. 그 집과 함께 우리의 꿈도, 미래도 사라진 거고.
이별 선언을 하는 전 여친의 모습에,
- 진서 형! 그러니까 형이 호구 소리를 듣는 거야. 형은 자기 의지가 없어? 내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해?
뻔뻔한 얼굴의 후배 놈 모습까지.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왜 이런 거밖에 없어?’
쓴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29년 인생 중 행복했던 기억은 없나? 인생을 헛살았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마치 내 질문에 화답이라도 하듯 진혜연이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의 교복 차림으로.
- 오빠, 오빠를 만난 건 다시 없을 행운이에요.
뒤이어 정민혁도.
- 진서 형님! 저, 정민혁은 형님을 항상 모시겠습니다!
김하나도.
- 진서 씨, 그거 알아요? 제가 진서 씨한테 항상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그밖에 강순철, 박승기, 강태윤도··· 세상이 이 지경으로 변해버리고 나서 만난 인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새삼스럽게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란 놈은···
세상이 이렇게 ‘코인 채굴기’로 변해버린 후에, 더 행복한 기억이 많구나.
[체력이 1% 이하로 떨어져 극한 상태에 돌입합니다.]
[3초 동안 무적 상태가 되고 30분 동안 체력, 마력 회복 속도가 500% 빨라집니다.]
3초.
나는 허공에 손을 뻗는다. 미미르의 샘물이 손에 잡혔다. 그리고 단숨에 들이켰다. 킹 타일런트는 그런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내 몸은 조금의 데미지도 입지 않았다.
극한의 발도술의 패시브 효과인 ‘극한’ 효과가 발동했기 때문이다.
[체력이 100%로 회복됩니다.]
[마력이 100%로 회복됩니다.]
단숨에 미미르의 샘물을 들이켜자, 그 어느 때보다, 몸에 힘이 충만한 것이 느껴졌다.
주먹을 들어 피투성이가 된 녀석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퍽! 주먹에 맞은 녀석이 뒤로 나가떨어진다. 잔해에 부딪친 녀석. 이번엔 벽면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녀석이 몸을 일으킨다. 그 상태가 되고도, 아직 체력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역시 괴물다운 모습. 그러나 승기는 이미 내 쪽으로 넘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녀석이 눈치를 살핀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점프한 녀석이 순식간에 방공호 천장을 뚫고 위에 있는 공간에 착지한다. 하지만···
블링크를 사용한 나는, 이미 킹 타일런트의 앞에 도달해있었다. 녀석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녀석을 향해 극한의 발도술을 사용한다. 녀석을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서다.
내 검은 그대로 녀석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녀석의 몸이 깨진 수박처럼 박살 나버린다. 겉으로 보기에 녀석은 완전히 죽었다. 그러나 녀석은 아직 죽지 않았다.
‘기프트 획득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기프트 획득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는 건, 내가 녀석을 ‘완전히’ 죽이는 데 실패했다는 방증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박살 난 킹 타일런트의 살점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저 상태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느릿느릿하지만 틀림없이 ‘재생’하고 있었다. 인상을 찡그린 나는 검을 휘둘렀다.
마력을 실어 휘둘렀지만, 살점은 부서지지 않았다.
‘미티어 스웜을 사용한다면 좋겠지만···’
분명 미티어 스웜을 사용한다면 저 살점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곳은 지하 수천 미터에 있는 방공호다. 미티어 스웜을 잘못 사용했다간 녀석의 재생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잔해들에 깔리는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곧 불완전하게 합쳐진 녀석이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그때였다. 내 검에서 거대한 붉은 늑대가 튀어나와 단숨에 녀석을 집어삼켜 버렸다.
‘이건···’
[검의 정령, 세리아가 흡수한 피에 만족감을 표합니다.]
[현계(顯界)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검의 정령, 세리아>
소환자 : 이진서
녀석은 울부짖었지만 세리아는 녀석에게 쉴 시간을 주지 않고 살점들을 전부 집어삼켜 버렸다. 그리고 녀석은 당연하게도 더 이상 재생하지 못했다. 그걸로 정말 끝이었다.
[10,574,455 기프트를 획득했습니다.]
예상대로, 천만 기프트가 넘는 기프트를 획득했다. 하지만 내 표정은 밝지 못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죽을 뻔했다. ‘극한’ 상태에 돌입한 것까진 계획에 있었지만···
두 번이나 극한의 발도술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을 완전히 처치하지 못한다는 건 내 계획에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검의 정령, 세리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멀쩡하게 서 있는 것은 내가 아닌, 킹 타일런트 쪽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성운의 가호를 아껴두긴 했지만···’
그동안 변이체는 내게 있어, 손쉽게 처치할 수 있는 상대에 지나지 않았다. 설령 그 어떤 초월체라 하더라도 지금의 나라면 충분히 처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프트 계약>을 통해 능력치를 올리며, 그러한 자신감은 더욱더 팽배했다. 그랬기에, 방금 상대한 킹 타일런트의 존재는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만약 이런 녀석이 둘이었다면···
‘나도 틀림없이 패배했겠지.’
더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로 따져도 이런 녀석은 몇 되지 않을 테지만, 아니 어쩌면 유일한 개체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 한정일 뿐이다.
최상급 변이체부턴 같은 최상급 변이체를 살해해, 특수 변이체로 진화할 수 있다. 특수 변이체 역시 마찬가지. 한마디로 앞으로 정확히 72일 뒤엔, 수없이 많은 초월체가 탄생할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초월체 중에 ‘녀석’은 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후.’
가볍게 심호흡을 내뱉은 나는 라우라를 바라본다. 그녀는 노인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노인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무슨 짓이야?”
“Não seja ridículo.”
S31의 번역 기능을 사용해 번역하니 나보고 다짜고짜 웃기지 말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진리의 눈, 게비샤를 사용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유라도 알기 위해서다.
- 이 노인 평범한 노인이 아닌데? 틀림없이 중국 고위 간부일 게 틀림없어. 그러면 털어먹을 것도 많겠지?
“······”
하기야, 지하 수천 미터의 방공호에 혼자 있던 노인이다. 애초에 평범한 노인이라면 방공호의 존재를 알고 있지도 못할 것이다. 노인의 신분이 고귀하다는 방증이었다.
아니, 이렇게 돼버린 세상에서 더 이상 고귀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카메라 기능을 사용해 노인의 얼굴을 촬영했다.
미국이라면 노인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미국에게 대신 전하라고 강태윤에게 전송한 나는 노인을 붙잡았다. 그가 내게 애걸복걸 사정하기 시작했다.
중국어라 뭐라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조를 보면 아마 살려달라고 말하는 듯싶다. 어차피 죽일 생각도 없었다. 나는 그를 부축하고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때였다.
[플레이어, 웨이타오가 당신에게 10,000,000 기프트를 양도했습니다.]
“??”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천만 기프트를 양도받았단다. 혹시 피싱 메시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보유 기프트를 확인한다. 2천만 기프트가량이 늘어 있었다.
‘진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