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중국 정부 역시 그들의 예상처럼 핵미사일 발사를 계획 중이었다. 재래식 전력으로는 도저히 변이체를 막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계획을 중지하고 말았다.
바로 이진서 때문이다.
그는 베이징에 도착한 후 8시간 만에 몸 상태를 정상으로 회복했다. 그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전략을 택했다.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치고 빠지기(Hit And Run)를 택한 것이다.
단순한 전략이었지만 분명히 효과적이었다.
이진서가 가진 아우리엘의 날개, 그리고 ‘빛의 신 루의 인도 세트’ 효과로 인한 블링크 능력까지. 몸 상태가 정상인 그를 따라잡을 수 있는 변이체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게 무리하지 않고 그는 조금씩, 변이체들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기프트의 양은 천문학적이었다. 고작 하루 만에 천만 기프트를 넘게 벌어들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이체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틀 뒤면 그들은 모조리 상급 변이체로 변할 터였다. 그는 거기에 대비해, 스스로를 강화하기로 했다.
기본 능력치를 전부 맥스까지 찍고, 신화 등급 장비 세트까지 맞춘 이진서가 더 강해질 방법은 ‘스킬’뿐이었다.
‘신화 등급 스킬을 맞춘다.’
스킬 카드 도박을 통해, 신화 등급 스킬을 습득할 생각이었다. 그는 무작위 전설 등급 스킬 카드를 구매했다. 무작위 전설 등급 스킬 카드의 가격은 한 장에 50만 기프트.
무작위 유일 등급 스킬 카드의 가격이 5,000기프트였던 것을 생각하면 무려 100배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그의 결정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50만 기프트짜리 스킬 카드 20장.
도합 천만 기프트짜리 플렉스(Flex)였다.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곧 하늘에서 내려오는 주홍색 카드 20장. 그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카드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카드들 중 하나가 무지갯빛으로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메시지.
[축적된 행운이 다시 없을 기적을 불러옵니다.]
[스킬 카드 - 영령 소환(G)를 획득했습니다.]
그는 얼른 스킬 정보를 확인했다.
<영령 소환>
종류 : 액티브(Active)
등급 : 신화(God)
설명 : 마력을 소모해 계약을 맺은 영령을 소환한다. 소환에 성공할 경우 영령은 생전 스킬과 능력치를 100% 사용할 수 있다. 지속 시간은 사용자의 마력에 비례한다.(재사용 대기시간 72시간)
‘이건···’
이진서는 눈을 크게 떴다.
영령 소환. 이름만 보더라도 그가 가진 영령 빙의의 상위 스킬임이 틀림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스킬 목록에서 ‘레일리의 센트리건을’ 삭제했다. 레일리의 센트리건.
말 그대로 센트리건을 소환하는 스킬로 그동안 쉘터 방어를 맡아왔던 스킬이다. 하지만 그가 한국에 있는 변이체들을 소탕한 이후엔 그 중요도는 다소 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킬 카드 - 영령 소환(G)을 소모해 스킬 - 영령 소환(G)을 습득하겠습니까?]
[스킬 - 영령 소환(G)을 습득했습니다.]
[‘초월자의 길’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초월자의 길>
등급 : 신화(God)
조건 : 플레이어 중 최초로 신화 등급 스킬 습득
보상 : 채굴량 +80%, 무작위 신화 스킬 카드 1개
채굴량을 80%나 올려줄 뿐만 아니라, 무려 ‘무작위 신화 스킬 카드’가 보상이었다. 하늘에서 팔랑거리며 내려오는 무지갯빛 카드를 보며 이진서는 쓴웃음을 흘렸다.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기쁨보다 얼떨떨함이 더 큰 그였다. 그는 이내 새로운 신화 등급 스킬의 정보를 확인했다.
<기프트 계약>
종류 : 액티브(Active)
등급 : 신화(God)
설명 : 기프트를 소모해, 상대방과 계약을 맺거나 파기할 수 있다.
이름처럼 단순한 설명. 하지만 신화 등급 스킬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습득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또다시, 그는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이젠 또 어떤 스킬을 삭제한다?’
아홉 번째 스킬 슬롯을 해금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홉 번째 스킬 슬롯을 해금하는 데 드는 비용은 무려 1억 기프트. 그에게도 지금 당장 해금하는 것은 무리였다.
***
◈보유 스킬(8/8)
<만다라바의 옷장(R)>
<미티어 스트라이크(U)>
<성운의 가호(U)>
<앱솔루트 배리어(U)>
<진리의 눈, 게비샤(L)>
<갈락시아의 도서관(L)>
<영령 빙의(L)>
<영령 소환(G)>
‘삭제한다면 만다라바의 옷장을 삭제해야겠지.’
만다라바의 옷장, 옷장에 무기와 방어구를 옷장에 보관했다가 언제든 불러올 수 있는 스킬. 과거에는 필수적인 스킬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필수적인 스킬이냐 묻는다면, 조금 애매했다.
이전처럼 장비 세트를 스위칭(Switching)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아우리엘의 날개에 달려 있는 비가시(非可視) 모드 옵션 때문이다. 장비에 마력을 불어넣어, 숨길 수 있는 옵션.
비단 날개뿐 아니라 다른 장비에도 적용되는 옵션이었기에, 아우리엘의 날개를 구매한 이후에 나는 방어구를 벗는 대신 외형을 숨기곤 했다. 생각하던 나는 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희귀 등급 스킬이다. 정 필요함을 느끼면 다시 구매해버리면 될 노릇이었다. 만다라바의 옷장을 삭제하자, 옷장 안에 있던 물건들이 우수수 아래로 떨어졌다.
호루스의 반지 등, 이전에 착용하던 액세서리들. 나는 아공간 창고에 대충 그것들을 쑤셔 박은 후, 스킬 카드를 꺼내 ‘기프트 계약’을 습득했다.
[스킬 카드 - 기프트 계약(G)을 소모해 스킬 - 기프트 계약(G)을 습득하겠습니까?]
[스킬 - 기프트 계약(G)을 습득했습니다.]
그 순간, 세상이 달라졌다. 무심코 방 한쪽에 달려 있는 거울을 바라봤다.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니, 내 얼굴을 칭칭 감고 있는 붉은색과 초록색 숫자의 나열들.
[현재 사용자에게 걸려있는 계약의 목록을 볼 수 있습니다.]
[1. 기프트 채굴기]
‘이건···’
<기프트 채굴기>
- 계약금 : 1기프트
- 갑은 을에게 ‘플레이어 시스템’을 제공한다.
- 을은 채굴량의 100%를 갑에게 지불한다.
‘채굴자와의 계약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채굴자’와 맺은 노예 계약이었다.
[계약을 파기하기 위해서는 1기프트 이상의 기프트를 지불해야 합니다.]
[하지만 계약을 파기하는 것을 추천하진 않습니다. 플레이어 시스템 제공 역시 중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채굴자가 계약 파기를 눈치챌 확률이 높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어 시스템’은 지금의 내게도 필요한 시스템이었다. 무엇보다 계약을 파기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모험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이걸 어디다 쓴다?’
이래서는 등급만 신화인 쓰레기 스킬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 방문을 열고 미란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기프트 계약?’
허공에서 튀어나온 초록색과 붉은색 숫자로 이루어진 끈이 이번에는 그녀를 속박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지만, 그럴수록 속박은 더욱더 거세졌다.
“대체 지, 지금 무슨 짓을···?”
[계약 내용을 설정해주시기 바랍니다.]
나 역시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녀는 자하오란의 딸. 자하오란은 내게 있어서는 은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런 은인의 딸을 난데없이 밧줄(?)로 칭칭 묶어놓은 격이 아닌가.
‘일단 풀어주고 나서 생각을···’
[계약 내용이 무작위로 설정됩니다.]
<무작위 계약 1>
- 계약금 : 100,000기프트
- 갑은 을에게 계약금을 제공한다.
- 을은 갑에게 능력치의 일부(1%)를 지불한다.
[근력 능력치가 0.25 상승했습니다.]
[마력 능력치가 0.35 상승했습니다.]
···
“어?”
그녀가 속박에서 풀려났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이내 나를 노려보며 중국어로 소리쳤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조를 보면 아마 욕설인 것 같다.
화내면서 방을 빠져나가는 그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능력치를 올릴 방법을 찾았네.’
무려 10만 기프트가 빠져나가는 대신, 능력치가 상승했다. 계약서의 내용대로라면 미란의 능력치의 1%인 모양이었다. 고작 1%···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다.
쉘터의 그룹원들과 모조리 계약을 맺는다 생각하면 그 수치는 결코 낮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그룹원들에게도 나쁠 것이 없었다. 그들로서는 대량의 기프트를 제공받는 셈이니 말이다.
‘계약 조건을 더 높이지는 못하나?’
[더 많은 계약금이 필요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많은 계약금을 지불하면 계약 조건(퍼센트)을 높일 수 있는 모양이다.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서울로 돌아가면, 기프트 계약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
미란은 불쾌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조금 전, 그녀의 아버지인 자하오란의 명령으로 이진서에게 차를 대접하러 갔던 그녀는 그의 ‘기프트 계약’에 의해 칭칭 묶였었다.
물론 그 정체를 알지 못하는 그녀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갈 뿐이었다.
‘혹시 내 몸을 노리고···?’
미란이 생각하기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스스로가 아름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더듬어도, 그녀는 이상한 점이나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그녀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무작위 계약 1’에 의해 능력치의 일부(1%)를 갑에게 지불합니다.]
미란은 어렵지 않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진서가 그녀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린 후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 ‘무작위 계약 1’이라는 건 바로 그 수작의 정체일 것이다.
물론 능력치의 1%라고 해봐야 그녀에게는 얼마 되지 않는 수치. 하지만 외간 남자가 ‘감히’ 그런 수작을 부렸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는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감히 나를 상대로 이런 짓을···’
붉은 입술 사이로 노기 어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란페이 그룹의 장녀다. 그녀를, 란페이 그룹을 얼마나 얕봤으면 감히 자신이 빤히 보는 앞에서 이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정식으로 항의를··· 아니, 복수를···!’
그녀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은원 관계에 철저해야 한다는 가훈을 따를 때였다.
[‘무작위 계약 1’에 의해 갑으로부터 계약금 100,000기프트가 제공됩니다.]
‘10만 기프트?’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10만 기프트. 그룹에서 꽤나 능력 있는 축에 속하는 그녀로서도 한 번도 손에 넣어본 적 없는 거금.
이내, 그녀는 보유 기프트를 확인했고 정말 10만 기프트가 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녀의 분노도 자연스레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거면 미리 말을 했으면··· 아니, 이건 항의를 해야···’
하지만 10만 기프트로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리자, 그녀는 점차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결국 그녀는 복수, 아니 항의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물질적인 것에 약한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