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잉카 제국의 잊힌 황금 도시.
인티의 고향이자, 인티가 살아생전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과 동료들을 그리워한 장소.
그 장소는 인티에게 남은 최후이자, 마지막 장소였다.
인티를 도와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에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나 또한 그 대가를 지불해야 당연한 것. 훗날 어떠한 이유로 싸우게 될지라도 앞으로도 인티가 황금 도시를 관리하게끔 도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사라진 황금 도시를 벗어난 후, 일행들과 함께 광화문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제는 각자의 사람들이 성장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김영광과 김도은 세 사람이었다.
“안이 씨. 괜찮을까요? 남은 시간이 30분도 채 되지 않습니다.”
“올 겁니다. 분명히.”
“너무 조용해서 불안하네요. 폭풍전야와 같은 이 상황이….”
걱정스러움을 못 이긴 김영광과 김도은이 먼저 입을 열었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명’은 언제나 그랬듯 계속해서 변해가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인티와의 만남과 인티가 황금 도시를 계속해서 관리할 수 있게 한 것은 나의 ‘명’을 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는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지나치게 도를 넘은 버프와 정령화를 사용했기 때문.
그 때문에 용광검과 연관이 있는 삼족오, 해와 달과의 연이 생겼다.
훗날 이들이 나의 조력자가 되어 줄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그들이 원하는 성좌를 찾아준다면 곤륜산의 손오공과 같이 나의 조력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받아온 성흔과 신기는 결코 가벼운 힘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계의 무림인들이 ‘만년 묵은’ 영약을 못 구해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명’이 변했을 뿐.
이계의 무림인들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나는 진예화와 백남광을 기다리며, 하늘 전체를 덮을 정도의 크기로 자리 잡은 그레이트 홀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을 겁니다. 언제나 그랬듯, 전 죽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도….”
안절부절 계속해서 걱정 가득한 김도은에게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나의 ‘명’은 다섯 번째 미션까지였다.
이계의 무림인들이 도움이 된다고 한들, 내가 죽는 것은 언제나 그랬듯 변함없었다.
이계의 무림인들은 나와 지구의 모든 이가 살 수 있는 확률을 조금 높일 뿐.
지금까지 갱신된 ‘명’의 결말은 여전히 죽음 그 자체였다.
아, 확실하게 바뀐 것이 있다면 다른 배후성을 선택했기 때문에 배후성의 배신으로 처절하고도 암담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뿐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러 번 바뀐 ‘명’ 덕분에 나를 포함한 모두가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여러모로 노력했고, 많은 것을 바꾸어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살아갈 것으로 생각하며 긴장되는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후웅-
걱정 가득한 김도은을 바라보던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곤 공중으로 이동해 그레이트 홀 앞에 섰다.
그들을 믿고 그들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혹시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차하면 이계의 무림으로 넘어가 그들을 죽여야만 할 테니.
좋게 생각해도 그럴 확률은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플랜A가 막힌다면 다음 플랜B를 생각해두어야만 멸망한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은 시간 얻어온 성흔을 시험해보고자, 허공에 성흔, [홍염(紅焰) LV MAX]을 아주 약하게 발동시켜보았다.
적당한 조절을 해서인지, 그다지 큰 힘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상당히 강한 성흔임을 간단히 느끼고 있었다.
“오… 좋은데? 이런 식으로도 사용이 가능한가?”
화륵!
삼족오의 성흔, 홍염을 손에 아주 조금 모은 나는 아주 어릴 적 즐겼던 게임의 한 장면을 생각하며 앞으로 뻗어냈다.
나이가 들 만큼 들었지만,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동작이었다.
예를 들면, 에네르기 파 같은 동작이라던가.
화르륵!!!
손에 모은 홍염을 공중에서 아래로 쓸어내리자, 아주 극소량의 힘이었음에도 엄청난 열기를 내뿜으며 홍염이 공중에서 휘날렸다.
파앗!
“으아아악!!! 뜨거워!!! 이거 뭐야!! 어떤 새끼야!?”
“아, 미안.”
타이밍이 좋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라는 듯.
눈앞에 화염에 휩싸인 백남광이 고통스러움에 소리를 버럭 질러대고 있었다.
재빠르게 홍염의 발동을 취소한 나는 백남광을 바라보았다.
“미안. 뜨겁지?”
“이 새끼가…?”
“믿을 진 모르겠지만, 고의는 아니었어. 나름대로 수행 중이었달까?”
검게 그을린, 백남광의 모습에 웃음이 터진 진예화였다.
“내가 백화도를 다루지 않았으면 타죽었을 거다. 망할 새끼.”
“그러니까, 미안. 진심이야. 식혀주고 싶은데 내가 물 속성은 못 다뤄서.”
“후… 됐다. 용건만 간단히 하자. 시간이 없는 건 네놈도 알고 있겠지?”
“물론. 예화 씨, 조금 늦었네요. 혹시 오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백남광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한참을 웃던 진예화가 나의 앞으로 이동해 왼 손바닥에 오른 주먹을 부딪치며 인사했다.
“미안해요. 아무래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 시간이 조금 걸렸네요.”
“그래서, 구했습니까?”
“네. 충분할지는 모르겠지만… 두 개 정도는 어떻게든 구했어요.”
진예화의 말에 기쁜 표정으로 두 가지의 ‘만년 묵은’ 영약을 받아들었다.
“충분합니다.”
영약을 받아든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지상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태양신의 화로를 꺼내 들었다.
“영광 씨. 부탁드린 것 좀.”
“아, 네!”
김영광이 ‘시드 스토어’에서 구매한 아이템.
‘헤파이스토스의 식기 세트(일회용)’을 나에게 건넸다.
“근데 이건….”
“아, 일회용이지만, 효과는 꽤 좋거든요.”
남은 시간은 10분.
이로써 모든 준비는 끝났다.
태양신의 화로, 헤파이스토스의 식기 세트, 만년화리와 빙정을 눈앞에 나열했다.
진예화와 백남광이 구해온 ‘만년 묵은’ 영약은 음과 양의 힘을 만 년 간 담아온 양의 만년화리 그리고, 음의 빙정이었다.
이들은 우연히 구해온 것이겠지만, 나는 이들이 구해온 아이템은 이 상황에 최적화된 아이템이었다.
음과 양의 힘을 다루는 두 아이템은 상극이지만 지금 사용한다면 우리들이 바라는 상황을 만들기엔 충분했다.
다음으로 헤파이스토스의 식기 세트.
입속에 들어가는 무엇을 먹든지 간에 이 아이템을 사용하면 그 효과가 몇 배는 상승하는 아이템.
예를 들면 환단이나 내가 먹은 ‘만년 묵은 하수오’ 같은 것들.
물론 성운, <올림포스>의 대장장이 성좌가 만든 아이템인 만큼 결코 싼 가격의 아이템은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 시드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아이템들은 성공할 확률을 최대한 높여야만 했다.
“그럼 시작합니다.”
긴장되는 표정으로 진예화의 손을 꼭 부여잡고 있는 백남광과 일행들을 뒤로한 채 식기 세트 중 한가지인 냄비를 태양신의 화로에 올렸다.
화륵!
화로에서 엄청난 열기가 사방의 모든 것을 잡아먹을 듯 날뛰기 시작했지만, 나는 마력을 불어넣어 불길을 잡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냄비에 만년화리와 빙정을 동시에 넣곤, 남은 마력을 모조리 사용했다.
화아악!
잡힌 불길은 냄비 하나만을 향해 불길이 집중되었고 나의 마력을 부여받은 태양신의 화로가 엄청난 빛을 내며, 만년화리와 빙정을 녹여 새로운 영약을 만들어냈다.
[히든 조합에 성공하였습니다.]
[만년화리와 빙정을 조합해 새로운 아이템, [화빙환 (EX급)]이 생성되었습니다.]
[히든 조합에 성공해 ‘태양신의 화로’가 강화됩니다.]
“됐다.”
남은 시간은 5분.
“예화 씨. 할 말 있습니까?”
“예? 저… 죽나요?”
“아…아니요.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예화 씨는 살아있음에도 죽은 사람이 될 겁니다. 앞으로의 전투에서도 큰 힘을 내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 말은….”
“저 덜떨어진 백남광을 도와 함께 싸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뭐 인마?”
“조용히 하고.”
“이 새끼가…?”
진예화는 잠시 고민하더니, 백남광을 끌어안았다.
“이번엔 내가 양보했으니, 같이 싸우지 못해도 괜찮지?”
“…….”
사실 같이 싸우지 않는 것은 백남광이 언제나 바라왔던 일이었다.
백남광은 위기를 맞이하면 진예화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반대로 진예화도 백남광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런 모습에 두 사람은 더욱 돈독해졌지만, 내심 진예화가 그런 위기를 겪는 것이 싫었던 백남광이었다.
백남광은 그런 진예화를 더욱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예화야, 고생했다. 이젠 나한테 맡겨.”
“미안해.”
더 이상 백남광의 곁에서 그를 위해 싸우지 못한다는 것이 슬프고도 마음이 쓰였지만, 살아서 그의 곁에 남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생각하는 진예화였다.
“저, 준비됐어요.”
“좋습니다. 이걸 드시면 화빙환의 힘에 시스템은 봉인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예화 씨는 죽은 사람이 될 겁니다. 그럼 이번 미션의 승자는 제가 되겠지요.”
“네! 당신을 믿어볼게요.”
“믿어주니 감사하네요. 이것으로 드시면 됩니다.”
나는 헤파이스토스의 식기 세트 중 접시와 포크를 진예화에게 건네어 화빙환을 접시에 올려주었다.
“어렵지 않습니다. 포크로 찍어서 그냥 꿀꺽하시면 됩니다.”
“되게 간단하네요.”
“거창한 거랑은 다르게 좀 그렇죠.”
“그럼….”
진예화가 포크를 들어 접시에 담긴 화빙환에 질러 넣었다.
단단해 보이는 원형의 단이었음에도 성좌의 힘이 담긴 아이템이어서인지 부드럽게 박혀 들었다.
꿀꺽.
진예화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화빙환을 삼켜 넣었다.
그리고
번쩍!
진예화가 공중으로 조금 붕 뜨더니, 그녀의 전신에서 환한 빛이 발아했다.
“예화야!”
“야. 가만히 있어.”
“……잘못되기만 해봐. 죽여 버릴 테니.”
백남광이 불안한 눈빛으로 진예화를 바라보던 중이었다.
공중으로 뜬 진예화가 이내 지상으로 내려오더니, 진예화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나의 눈앞에 시스템의 알림이 뜨기 시작했다.
[네 번째 메인 미션이 종료되었습니다.]
[승자는 ‘외부지구’입니다.]
[‘외부지구’의 생존자는 5,000만 시드와 [기본 스킬 LV MAX]을 획득하였습니다.]
[무림계 – 20131001의 모든 생명체가 ‘외부지구’로 편입됩니다.]
[다음 미션의 시작까지 24시간 남았습니다.]
“예화야!! 괜찮아!?”
“어? 응. 괜찮아 남광아.”
다시 한 번 부둥켜안은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나는 김영광과 김도은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잘됐네요.”
“그렇죠?”
“두 사람도 저렇게 끌어안으면 보기 좋을 것 같네요.”
“닥쳐요.”
“네.”
시답잖은 농담을 하던 중,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백남광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
“뭐?”
“고….”
“병신이야? 왜 말을 못 하는데?”
“고맙다 이 새끼야!!!”
피식.
“앞으로 잘해라.”
“흥!”
휙!
백남광의 말에 기쁨 가득한 미소를 지은 난, 그런 백남광을 비웃듯 장난스레 넘겼다.
그리고 백남광은 부끄러운 듯 몸을 휙 돌려 진예화의 곁으로 이동했다.
이로써 우리에게 남은 건, 다섯 번째 미션과 남은 24시간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였다.
“예화 씨의 시스템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대신. 그동안 시스템이 없이 길러온 힘은 그대로 남아 있을 거예요”
“네? 정말인가요?”
“네. 그 힘은 시스템과는 무관하게 예화 씨 본인이 얻은 힘이니까요. 하지만, 그 힘은 시스템을 이용한 인간들에게는 더없이 못 미칠 거예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자신이 살았다는 기쁨과 시스템을 잃어 약해진 진예화의 표정은 많은 것이 드러나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봉인이라는 건 어떻게든 풀 수 있는 수단이 있을 겁니다. 가능성일 뿐이지만 너무 절망하지는 마세요.”
“괜찮아요. 본래 제힘도 아닌걸요.”
“긍정적이라 보기 좋네요. 그럼,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서 말을 전하세요.”
“네? 무슨….”
“세계의 종속은 말 그대로 진행될 겁니다. 24시간이 지나, 다섯 번째 미션이 시작되면 예화 씨가 살던 그 세계는 종말을 맞이할 거예요. 그 전에 이곳으로 이주해야 합니다.”
“아….”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였음에도 자신들의 고향을 버려야 한다는 말에 진예화와 백남광이 침울해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라온 고향이자, 자신들의 집이 있는 별.
그곳을 버리라니, 나 같아도 씁쓸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아니요. 이동은 백남광 혼자 해야 합니다. 예화 씨는 시스템이 없어 그레이트 홀의 통로를 넘어서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 네! 남광아 잘 다녀올 수 있지?”
“날 뭐로 보고! 그럼 다녀오마. 망할 놈아. 다녀올게. 예화야!”
“오냐.”
“응!”
재빨리 자리를 뜨는 백남광을 바라보며, 김도은이 진예화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힘은 시스템이 없던 시절, 어느 세계의 일인자 격이라 할 정도로 강했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시스템이 사라졌음에도 인간을 넘어서는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진예화는 시스템을 잃었음에도 이대로 무너질 정도로 약한 여자가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그녀는 봉인된 시스템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 더욱 강해질 것이고, 백남광의 곁에서 싸워줄 것이다. 나는 그런 그녀를 믿고 있었다.
“24시간 동안 강해져야죠?”
“와…. 쉬지도 않아요? 무슨 변태인가 진짜?”
나는 그런 그녀가 다시 한번 적응하기를 바라며 김도은과 김영광을 향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