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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소설의 주인공이 성좌였다-75화 (75/206)

제75화

나 자신이 이안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시스템 창과 함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이겨내자, 나의 몸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너…. 넌, 누구지…!? 부인…. 부인은…?”

“설명해 줄 시간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설명 할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설명할 시간이 있다고 한들, 제 아들을 죽인 청호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30초 뒤 본래의 세계로 복귀합니다.]

“아. 아무튼 죽을래? 아니면, 맞을래?”

“무…. 무슨….”

황당함에 두 동공이 흔들리는 청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청호는 자기 부인이 온데간데없고 자신의 발아래 머리가 터져 죽어있는 아이와 나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아…. 그대는 저승사자인가? 그렇군. 죄를 지은 나를 잡으러 온 것이야….”

나는 발아래 있는 나와 청호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살려 두고 싶지 않지만, 허상이든 뭐든 평생을 뉘우치고 살아라.”

스걱.

푸확!

“끄아아아악!!!”

용광검을 빼 들어 청호의 양 팔을 베어 버렸다.

엄청난 핏줄기가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본 나는 청호를 발로 차 저 멀리 날려버렸다.

“아이야. 이것은 허상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미안하다.”

별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나는 죽은 아이의 볼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리고.

번쩍!

시간이 되자, 엄청난 빛과 함께 나의 눈앞에 모든 것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 * *

환한 빛과 함께 날려져 간 의식이 돌아오자, 눈앞에 있는 건 나를 보냈던 노인과 정령왕, 실리아나였다.

“허허, 정령왕의 부탁이 있어 그대를 돕긴 하였으나, 해낼 줄 알았지.”

“어르신…?”

“날 기억하는가? 그 속에서는 꽤 긴 세월이었을 텐데.”

“기억하지요. 여러모로 도움을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은 이유가 있었고 정령왕이 나에게 준 미션을 클리어하기 위한 조력자가 노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차정우는 아직 보이질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겁니까?”

“자네가 겪은 것은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네. 그렇다고 시간이 아예 흐르지 않은 것은 아니네.”

“하루는 지난 겁니까?”

이미 곤륜산과 현계의 시간이 다름을 느꼈고 나는 남은 두 번의 성흔으로 시간 배율을 조절할 수 있었다.

내가 받은 것은 ‘기록자’가 되기 위한 시험.

시간의 조작은 이들에게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 분명했다.

“이 시험을 통해 저는 더 강해졌습니다. 정령왕의 덕분이죠.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습니까?”

나를 향해 안쓰러운 미소를 짓는 정령왕, 실리아나는 말이 없었다.

“내가 대신 말하도록 하지. 인간에게 기본적인 일곱 가지 정인 희, 노, 애, 락, 애, 오, 욕. 이라는 감정이 있네. 자네가 인간으로서 더 강해지기 위한 수단은 이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야.”

“통제…. 그렇다면, 전 감정 없는 기계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아니네.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것과 감정을 버리는 것은 다른 방식이지. 그렇기에 자네는 ‘기록자’가 되기 위한 시험을 변형해 감정을 통제한 것이네.”

“그것이 강해지는 수단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스킬, 냉정이 발동함과 동시에 나는 차분하게 질문했다.

“음…. 이 시험을 통해 ‘기록자’가 될 방법은 일곱 가지 정을 모두 버리고 속세와의 연을 끊어야 하네. 하지만. 자네는 속세와 연을 끊을 필요가 없는 인간이지. 그렇기에 정령왕께서 시험을 변형한 것이야. 버리는 것이 아닌, 통제하는 것으로.”

“……”

“자네는 기록자가 되는 것이 아닌, 칠정안(七情眼)과 정령화를 얻어오지 않았는가?”

확실히 이상했다.

기록자들이란, 본디 곤륜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

그들의 시험을 이겨내고 감정을 버렸다면, 나는 이곳이 아닌, 곤륜산에서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한층 더 강해진 것을 제외하고는 기록자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해했습니다. 기록자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죠. 방법이 다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허허허. 그 부분도 이해하게나. 최단 시간에 모든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네. 그렇지 않았다면 자네는 허상 속에서 몇 번의 환생을 거치고 지옥에 떨어졌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허상 속에서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했다.

어떤 것은 좋았고 어떤 것은 싫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통제했고 이겨냈다.

내 자식의 죽음까지도.

“정리된 듯하니, 나는 이만 가보겠네. 정령왕이시여. 부디 무탈하기를….”

“당신. 이름 정도는 알려줘도 되지 않을까?”

노인이 공중에 떠, 사라지려는 순간 나의 말에 반응해 다가왔다.

“아아, 그렇군. 곧 다시 만날 것 같으니, 알려드리죠.”

노인의 몸이 뿌연 연기에 휘감기더니, 이내 여인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약 3, 40대 정도로 그 외형이 아주 아름답고 선녀와 같았다.

하얀 천을 풀럭이는 여인은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희미하게 웃었다.

“호호. 쉽게 알려드리죠, 전 곤륜산에 기거하는 ‘서왕모’라 합니다.”

여선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리가 멍해짐을 느꼈다.

곤륜산에 두 번의 방문이 있었음에도 천존을 제외하고 높은 등급의 신선들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등급이 높은 여선(女仙)들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그저, 나이 지긋해 보이는 강자아나 신공표 뿐.

그곳에 있는 여인들은 대부분이 하녀였다.

그런 여선들 중 최고위 신선인 서왕모가 나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서왕모.

여선(女仙)들을 총괄하는 지위에 있는 가장 높은 여신이다. 굳이 강함을 따지거나 누가 곤륜산의 주인임을 따진다면 원시천존이 가장 높은 자리임은 변함이 없었지만, 서왕모는 원시천존 다음가는 여선중에 여선이었다.

누군가는 요지금모(瑶池金母)라 불렀고 또 누군가는 왕모낭랑(王母娘娘), 그리고, 다른 이들은 구령태묘귀산금모(九靈太妙龜山金母)라고도 불렀다.

신선들도 천년에 단 한 번씩만 먹을 수 있는 복숭아인 반도원의 주인.

“하…. 하하…. 당신이었군요. 이제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나의 시험에 관여할 수 있었는지를.”

“그런가요? 저희는 곧 다시 보게 될 겁니다. 당신은 곤륜산에서 볼 일이 있지요?”

임아린….

동정심으로 구해 준 아이였지만, 지금의 나에겐 중요한 아이였다.

나는 이 아이를 곤륜산에 맡겨 놓았었다.

때가 되면 데리러 갈 생각이었지만.

“네. 조만간 갈 생각입니다.”

“당신의 사명은 생각보다 험난할 겁니다. 다만…. 이번 일을 계기로 당신은 사명을 이루기에 몇 걸음은 앞으로 내디뎠을 테죠.”

서왕모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호호. 인제 와서 인사는 무슨. 그럼, 곤륜산에서 다시 보도록 하죠. 부디 당신의 사명을 이겨내시길.”

짧은 소개와 인사를 한 서왕모가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야기는 모두 마치셨습니까?]

서왕모가 사라지자, 한참을 기다린 실리아나가 나에게 말을 건네 왔다.

“네. 덕분에요. 강해진 기분도 듭니다. 근데, 신선들 그러니까, 곤륜산의 기록자들은 현계로 못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은 알 텐데요. 어느 순간부터 ‘성좌’들의 메시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요.]

“아….”

[이곳 정령계와 당신이 들어온 게이트 속은 다른 공간입니다. 약간의 꼼수를 부리긴 했지만, 당신을 도와줄 시간을 벌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죠.]

실리아나의 말에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분명 게이트로 들어섰을 때와 차정우를 만났을 땐 성좌들이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냈었다.

하지만, 정령왕에게 오는 또 하나의 게이트가 생겨나 그곳에 들어섰을 때부터는 성좌들의 메시지는 전혀 보이질 않았다.

이 부분에서 정령계와 곤륜산은 멀지만 아주 가깝게 이어져 있고 성좌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공간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혹시, 그래서 본래의 모습이 아닌, 허름한 노인의 모습으로….”

[호호. 맞습니다.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지만, 당신이 시험을 통과할 시간만 번 것이죠. 그녀는 다시 곤륜산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렇군요.”

이유야 어찌 됐건,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서인지 자세한 것은 궁금하지 않았다.

대략적인 걸 알게 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정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놈은…. 시험이 어려워지고 있는 겁니까?”

나의 물음에 실리아나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당신과 같이 조력자를 붙여드렸더니, 금세 클리어를 하더군요.]

“……?”

[본래의 세계인 지구안의 지구로 돌아가셨죠. 당신보다 30여 분은 더 빠르게요.]

“아….”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 같이 싸우고 대화를 통해 정이라도 조금 생긴 차정우라 생각했건만….

그 새끼는 역시나 로봇 같은 새끼였다.

인사도 없이 가다니.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실리아나를 향해 물었다.

“그놈이 남긴 말은 없습니까?”

[음…. ‘다음에 만나면 봐주지 않겠다.’라고 했습니다.]

“그 새끼답네요. 뭘 봐주지 않는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스아아.

실리아나는 손을 뻗어 자그마한 구 형상을 하나 만들어냈다.

[이것은 기억을 마력으로 형상화 시킨 겁니다. 용사는 당신에게 이걸 맡겼습니다.]

“기억…?”

앞으로 걸어 나가 차정우가 맡긴 기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앗!

기억을 담은 마력의 구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지더니, 이내 나의 머릿속으로 헤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

“정우야!!!!”

“너만은 살아….”

“내가 구해줄게. 정우야…!!”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둘 다 죽는 것은 기정사실.

그렇다는 건, 한 명은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안하다. 너 혼자 두고 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싱크홀에서 떨어지기 전, 나를 잡은 두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몰랐다.

싱크홀이 이세계로 통하는 문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기다려주면 다시 찾아가겠다고.

말해주었을 텐데.

“이지은. 널 두고 가서 미안하다….”

손을 뿌리친 나는 싱크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말했다.

그리고.

내 외침이 그녀에게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싱크홀로 빨려 들어가는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모습과 입을 뻐끔거림에도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은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

차정우의 기억의 파편이 나의 기억을 헤집으며 나는 정신을 차렸다.

“개자식. 이런 걸 주고 갈 때는 부탁이라던가…. 인사라도 하는 게 맞는 거 아니야?”

냅다 기억만 던져주고 가는 차정우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찾아주기로 약속한 이상 행동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는 나와는 달리, 차정우는 찾고 싶어도 오고 싶어도 아직은 불가능 할 테니.

내가 차정우의 사람을 찾아준다면, 훗날 그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빌미가 생길 수 있었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차정우가 남긴 기억을 받아들인 내가 말없이 허공만을 바라보자 실리아나가 말을 걸어왔다.

“네.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말에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짓는 실리아나는 손을 뻗어 다른 한 구의 마력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이건…. 후에 도움이 될 겁니다. 어째서 제가 도와주었는지, 어째서 당신의 사명이 여기저기 얽혀있는지를.]

“원하던 것을 드디어 주시는군요.”

실리아나가 나에게 준 또 다른 기억에 손을 뻗었다.

화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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