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1화 - >
“축하드립니다.”
확인했다. 혹시나 싶어 두 번, 세 번 확인했고 또 다시 혹시나 싶어 다른 사람을 불러서까지 확인했다. 그러니 틀림없었다. 그녀에게서 또 하나의 마력이 느껴진 것은.
“하, 하하.”
그녀는 마법사였다. 마력이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아닌 일정 공간에 뭉쳐있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그 곳은 단 하나, 심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약하기 짝이 없는, 집중하지 않으면 놓쳐버릴 것만 같은, 결정적으로 그녀와 아주 약간 이질적인 마력은 그녀의 복부에 자리 잡아 내게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꽈악-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믿기지 않았다. 실감이 나질 않았다. 여행 이후로 마음속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벌어지자 그 동안의 준비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떠한 도움도 되어주지 못했다.
‘내가 아빠가 된다고?’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수많은 경험을 했다. 전생에서만 했던 경험도, 현생에서만 겪은 경험도, 두 번 모두 했던 경험까지. 그러나 단언컨데 그 모든 순간을 통틀어 가장 긴장되고, 초조하고 놀라우며 어벙벙하기까지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돌아가는 건 이제 완전히 단념해야 하는 건가.’
레닐이라는 이름으로 이 곳에서 태어났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돌아가야겠다는 것이었다. 현대 과학의 이기에 익숙해진 나에게 이 곳에서의 삶은 제아무리 풍족하다고 하더라도 부족함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마법을 배웠다. 돌아가기 위한 유일한 실마리라고 생각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실력으로는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포기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기대 이상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서 한 줄기 미련이 남아있었는데 오늘로서 그 미련마저도 완전히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전생의 가족을 위해 현생의 가족을 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실현될 가능성도 낮았고.
“괜찮아?”
“여보.”
그녀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사자이니만큼 최소한 예상은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로 몰랐던가, 현실로 다가오자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확실해. 한 명. 남자인지 여자아이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래요.”
우리 둘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자애로운 눈으로 아직 불러오지도 않은 배를 천천히 쓰다듬는 그녀의 모습은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그녀의 얼굴과는 2%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섣불리 건드리기 어려운, 무언가 신성함까지 느껴지는 광경임에는 부정할 수 없었다. 명화를 앞에 두고 손을 대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나 나는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명화에는 그녀 혼자만이 있어서는 아니 됐기에. 내가 그려짐으로서 마지막 방점을 찍는 명화였으니까.
“앞으로 더 잘할게. 둘이서, 아니 이제부터는 셋이서 더 행복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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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소식은 무척이나 빠르게 퍼졌다. 아버지께서는 직접 오고 싶어 하셨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사람을 보내어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셨고 매형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기에 직접 얼굴을 비췄다.
“조만간 좋은 소식 들려준다더니, 약속이 아주 칼이야. 칼!”
“크, 크흠.”
“뭘 부끄러워하나? 원래대로라면 진즉에 거쳤어야 하는 것을.”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그녀의 사랑의 결실을 축복해줬다. 지금도 이런데 몇 개월 후에는 얼마나 기쁠지.
“내후년 봄이라고 했나?”
“예. 다행이죠. 내년 봄이었으면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8~9개월. 만약 정벌의 시작이 내년 봄이었다면 한참 고생하고 있을 아내를 두고 곁을 떠나버리는 불상사가 벌어질 뻔했으니까. 물론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뒤늦게 합류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황제의 계획을 알고 있는 만큼 첫 수부터 어긋나는 상황이 달가울 리 없었다.
“뭐, 매제가 없더라도 아이가 태어나는 데는 문제가 없겠지만 평생의 약점이 잡히지 않으려면 꼭 곁에 있어야지.”
“그럼요.”
동시에 나는 최대한 그녀의 곁에 있어주려 노력했다. 세레나와의 수련에 쏟는 시간, 연구소의 전체적인 점검과 코어의 제작 등등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들을 제외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일임하거나 미루면서. 덕분에 이렇게 여유로웠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여유로운 삶을 보낼 수 있었다.
“몸은 좀 어때?”
“덕분에요. 고마워요. 당신도 바쁠 텐데 이렇게 신경써줘서.”
“고맙기는.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오히려 곁에 계속 있어주지 못해서 더 미안하지.”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당신도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오히려 최대한 저를 신경써주려고 해서 더 기쁜걸요.”
“아이는?”
“얌전해요. 엄마가 힘들까봐 투정도 안 부리고, 누구를 닮아서 이리 똑똑한지.”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녀의 배도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고 그녀의 안에서 느껴지는 마력도 점점 크기를 불려나가고 있었다.
탁탁탁탁-
손가락이 쉴 세 없이 움직였다. 이렇게 초조했던 적이 있었던가. 한시도 같은 공간에 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발을 놀렸다.
“가만히 좀 있어라. 네가 불안해하면 어쩌자는 거냐.”
“······형님은 경험자시지 않습니까.”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말해주고 있는 거지.”
그녀의 배가 불러올 때쯤 해서 거주지를 지크 영지로 옮겼다. 그 편이 그녀에게 조금 더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이 곳에서도 그녀를 보조하는 데 불편함이 있을 리는 없었지만 출산은 그녀와 나, 둘 모두에게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도 불안함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하녀들만으로 그 불안함을 지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지크 영지에는 그녀의 가족들이 있는 만큼 조금 더 편안하게 태교를 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까아아악!”
후우-
몇 시간 째 이러고 있는지, 몇 번의 비명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듣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더 이상 꿈꾸지 않는, 내가 채 성인이 되기 전 겪었던 그 끔찍한 상황에서도 이런 무력감은 느끼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타인의 손에 맡겨야했던 아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땅 꺼지겠다.”
응애-
그 때였다. 낯설기 그지없는, 그렇지만 모두가 기다리던 그 소리가 들려온 것은. 동시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의, 그런 나를 위로하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던 형님의 시선이 마주쳤다.
벌컥-
평소라면 이렇게 황급히 문을 열었다가는 기품이 없다느니, 품격이 떨어진다느니 경을 칠 일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 누구도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다급히 다가온 유모의 외침에 기다리고 있던 모두의 표정이 기쁨에 물들었다.
“공주님이세요!”
“부인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공주님과 아가씨 모두 건강하십니다.”
그제야 나도 마음속에 남아있던 일말의 불안함을 마저 털어내고 주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음껏 기쁨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뻐하고 있을 때, 주변에서 내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어서 들어가 봐. 아이도 아빠 얼굴을 봐야지.”
“하하.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떴을 텐데요.”
최대한 몸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먼지 한 톨 붙어있지 못하도록 몸을 깨끗이 한 후에야 유모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섰다. 출산을 돕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방 안에 있었지만 내 눈에는 딱 두 명의 모습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무척이나 힘겨운 사투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팔뚝만한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시그니와 얼마 전, 곧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정하면 딸의 이름으로 생각했던, 루이즈.
“왔······어요?”
“정말 고생 많았어.”
“봐요. 예쁘죠?”
“응. 누구를 닮았는지 정말 예쁘네.”
객관적인 시선에서 봤을 때, 갓 태어난 아이는 예쁠 수가 없었다. 자궁에서 갓 벗어났기에 온 몸의 피부는 쭈글쭈글했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지금껏 봐왔던 어떤 사람보다도 귀엽고 예쁘게만 보였다.
“안아 볼래요?”
“그래도 돼?”
아주 조심스럽게, 조금만 실수해도 산산 조각날 것만 같은 예술품을 받아들 듯 루이즈를 건네받았다.
“······.”
그렇게 내 딸을 안아들자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아이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내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건강하게만 자라달라고 해주고 싶은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마워.”
부디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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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났지만 딸이 태어나기 전보다 더 바빠져 가족의 곁에 있을 시간은 줄어들었다. 당장 내년 봄만 하더라도 제국의 운명이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북부 정벌의 시작이었으니 올해는 정말 바쁠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전력을 끌어올리고 테라 방벽을 중심으로 집중을 해야 했으니. 나 또한 겨울이 오기 전 테라 방벽을 향해 출발할 생각이었다.
“아아. 진짜 얼마 안 남았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원한 일이었다. 가장 앞장서 북쪽으로 올라가고 가장 마지막에 내려올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런데 요즘은 북쪽으로 올라가는 일이 망설여지곤 했다.
“마음처럼 안 되네.”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지켜야할 것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켜야만 하는 울타리에 들어온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났으니까. 갓 태어난 딸을 뒤로하고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데 망설여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간다.’
딸에게 당당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라도 가야만 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된 것뿐이었으니까. 반드시 돌아와야 할 이유 또한.
‘그리고 슬슬······. 불러 들어야겠네.’
천천히 편지 한 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외딴 지방에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이를 불러들이기 위해서. 뛰어난 마법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으니까.
사각사각-
그의 잘못이었다고는 하나 그를 내려 보낸 것은 나였다. 무슨 말로 편지를 써야할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깃펫을 놀리기 시작했다. 우리사이에 쓸데없는 미사여구는 필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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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야. 잘 지냈고?”
“덕분에. 축하한다. 그리고 미안하고.”
“고마워. 그리고 미안하기는. 이미 다 지난 일에다가 나도 신경 쓰이던 일이었어.”
오랜만에 본 조조의 얼굴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한층 무거워졌다고 해야 할까, 성장했다고 해야 할까. 쉽사리 한 마디로 평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여전히 나의 친구이자 최고의 조력자라는 것이었다.
“북쪽으로 가줘.”
“이제 시작하는 거야?”
“응. 가는 김에 이것도 장인어른께 전해드리고.”
아직 장인어른이 이름을 붙이지 않은 타이탄 - 루인 2호기 - 이 담겨있는 아티팩트를 조조에게 건넸다. 그가 또 한 번 나를 배신한다면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큰 상처를 입겠지만 두 번 배신하지는 않을 거라 믿었다.
“······믿어줘서 고마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해드릴게.”
“겨울이 오기 전에 나도 올라갈 거야. 그 때 보자.”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11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