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09화 - >
기사와 마법사.
둘의 실력이 비슷하다고 할 때, 둘이 결투를 벌인다면 대부분의 경우 기사의 손을 들어준다.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경지가 높아질수록 기사는 마법에 대한 높은 저항력을 지니게 되지만 마법사는 오러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높은 수준의 마법일수록 영창과 수인이 길어지기에 고위력의 마법을 쓰기 쉽지 않다는 것, 장소가 제한된 결투의 경우 너무나 쉽게 거리를 내어준다는 것과 마법사 대부분이 몸을 쓰는 일에 익숙지 않다는 점까지, 기사에게 유리한 점이 잔뜩 있다면 마법사에게는 불리한 점만 있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내가 지면 혀 깨물고 죽는다.’
그러나 내가 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둘의 실력이 비슷할 때나 성립하는 이야기였으니까.
“지금이라도 정중히 사과한다면 내게 루인을 선물한다는 조건으로 이번 결투는 없던 것으로 하지. 나 또한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핍박한다는 말을 듣기는 싫으니.”
“······그러니 당신이 애송이라는 거야.”
즉석에서 성립된 결투. 그런 만큼 이번 결투를 지켜보는 이들은 몇 없었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소문을 듣고 구경꾼들이 몰려들겠지. 초인끼리의 전투는 평생에 한 번 보기도 드문 희귀한 일일 테니까.
“가타부타 두말 할 필요 없이 바로 시작하자고. 진 쪽이 이긴 쪽의 말을 듣는 걸로. 한 쪽이 전투불능이 되거나 항복을 외치는 쪽이 패배한 걸로 하면 충분하겠지.”
“검에는 눈이 없으니 스스로 조심하도록. 그래도 금방 일어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보지.”
뭐, 검에는 눈이 없어? 말 하나하나가 정말 주옥같다. 자신의 검 하나 통제 못하는 놈이 어떻게 마스터가 될 수 있었는지 신기할 뿐. 그래도 거짓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의 검에서 평범한 오러와는 분위기부터 다른, 마스터의 증거가 치솟았다.
“하하. 지금이라도 졌다고 말한다면······.”
투웅-
의기양양해하는 그를 향해 쏘아진 한 발의 탄환. 그렇게까지 빠르지 않은 속도의 탄환은 정확히 상대방의 검을 향해 날아갔다. 가만히만 있어도 탄환이 알아서 검에 베여나갈 것 같은 상황. 그 상황에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도리는 없었으나 적어도 이후에 벌어질 일만큼은 알고 있었다.
터엉-
좋게 말해서 의기양양한, 나쁘게 말하면 한없이 오만한 그의 얼굴이 구겨진 종잇장처럼 찌푸려질 일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
에프람 린체스터.
그는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천재였으니까. 애초에 천재가 아니고서야 기사가 될 수 없었으며 천재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힐만한 재능을 가졌기에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문제는 그가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최고다.’
그의 앞길에 좌절은 없었다. 어느 천재라도 그렇듯 남들에게 태산과도 같은 고난이 작은 뒷산처럼 느껴질 뿐이었고 어린 나이에 엄청난 성과를 내기 시작하는 그를 향해 주변의 모든 이들이 엄지를 치켜세우기 바빴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과한 칭찬은 결국 독이 되었다. 과도한 치켜세움은 동기를 촉진시키는 수준을 넘어섰고 과한 자신감은 오만함이 되어 그를 오만하게 만들었다.
어중간한 재능이었다면 절대로 마스터의 벽을 넘지 못했을 텐데, 그의 재능은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뒤늦게나마 벽을 뛰어넘게 만들었으니 - 물론 초인의 경지는 뒤늦게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지만 - 그가 검을 처음 배울 때의 열정만 간직하고 있었다면 정말로 [제국의 미래]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으리라.
문제는 그로 인해 그의 오만함이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심각해졌다는 것. 그러던 찰나 들려온 루인의 개발 소식. 그 또한 다른 기사들처럼 타이탄에 빠져있었고 마스터가 탑승해도 문제가 없는, 일반적인 타이탄보다 훨씬 위력적이라는 루인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레닐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 기체가 있다면 그것에 최고로 어울리는 이는 본인이며 본인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 오만함이 발목을 잡아 지금 상황에까지 치닫게 되었지만 그의 시선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의 목적은 레닐과 친분을 다지는 것이 아닌 루인을 얻어내는 것이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레닐과의 결투에서 이겨야한다는 조건이 붙게 되었으나 그 또한 문제가 없으리라 믿었다. 레닐에 대한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결국 비슷한 경지이며 전통적으로 검과 마법의 일대일 전투에서는 검이 유리했으니.
‘애송이라고? 누가 애송이인지 제대로 보여주지.’
물론 레닐이 크게 다치면 루인을 만들 수 없어지니 적당히 힘 조절을 해야겠지만, 그러나 그 생각은 결투가 시작된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연기처럼 사라졌다.
투웅-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막대기. 그리고 그 막대기로부터 쏘아진 작은 금속. 제법 빠른 속도였지만 그에게는 충분히 반응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 위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지만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금속조각이 알아서 검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깔끔하게 이등분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깡-
서걱이라는 예리한 소리가 아닌 굉음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검을 타고 손으로 충격이 전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에 잘못하면 검을 손에서 놓칠 뻔했지만 검을 자신의 목숨처럼 여긴다는 기사의 자존심 덕분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손목에 주어진 충격만큼이나 그의 멘탈에 주어진 충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결투가 시작되고 공방이 오갔음에도 잠시 멍을 때릴 만큼.
‘깡?’
들릴 리 없는, 더 이상 그가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한 소리였다. 어느 한 쪽이 베이지 않고 팽팽하게 충돌했을 때, 들릴 수 있는 소리였으니까.
오러 블레이드.
오러의 상위 개념이자 마스터만의 전유물.
베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경지가 낮은 이들이 제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마스터에게 대적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니던가. 그 강력함에 그조차 매료될 정도이거늘, 고작해야 손가락만한 금속 덩어리를 베지 못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이 방심했기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력으로 베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튕겨내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고.
‘전력으로 베어주마!’
살짝 풀렸던 손의 그립을 고쳐 잡으며 느슨하던 정신을 다잡았다. 다시 한 번 날아온다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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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하냐?’
결투는 시작됐다. 내가 선공을 가했고 그는 막았다. 대놓고 들어갔으니 못 막으면 이상한 일이었지만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으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뭐하는 짓인가.
‘안 와?’
기사와 마법사의 전투에서 기사가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거리를 좁히는 거다. 근접전에서의 강력함과 다르게 거리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기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급격히 줄어드니까.
참격의 형태로 오러를 날리는 방법도 있지만 위력도, 사거리도, 마력 소모까지. 어느 것 하나 효율이 좋다고 할 순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체스터 백작은 검을 하늘에서 떨어진 동아줄인 마냥 단단히 붙잡은 채 거북이가 등껍질에 들어간 것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검에 깃든 오러는 오히려 처음보다도 강렬했지만······. 저래서야 겁먹은 개가 몸을 움츠린 채, 열심히 짖기만 하는 것 같잖은가.
‘계속 그렇게 있어라.’
오래 전, 실력을 키운다는 이유로 장인어른과 하루가 멀다 하고 대련에 임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피가 말리는 시간들, 덕분에 어지간한 기사들을 상대하더라도 근접전에서 밀리지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적당한 거리를 두었을 때,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퉁- 퉁- 퉁-
시작을 알렸던 첫 탄환은 나로서도 꽤나 고심하며 제작한 탄환이었다.
특수질량탄.
다른 목적은 생각하지 않았다. 극한의 물리력. 마법사에게 필연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는 물리력을 위해 모든 것의 희생한 탄환이었다. 속도도, 범위도, 휴대성과 가성비까지. 그러나 그 많은 것들을 포기한 만큼 돌아오는 것도 컸다. 기존에 목표로 했던 물리력만큼은 제대로 잡아낼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지금 난사하고 있는 탄환은 지금까지 사용해왔던 일반적인 탄환과 그리 다를 것은 없는 탄환이었다. 결정타를 꽂기 위한 탄환이었지, 견제용은 사용하기에는 아까웠으니까. 그럼에도 비처럼 쏟아지는 탄환의 세례 속에서 각종 원소의 폭풍이 보여주는 위세는 어마어마했다. 조금만 틈을 보이더라도 찢어발길 것 같이 난폭한 폭풍이 몰아치는 듯했으니까.
그러나 린체스터 백작 또한 마스터라는 경지를 딱지치기로 얻은 것은 아니라는 듯 쏟아지는 탄환은 검막으로, 원소의 폭풍은 몸에 마력을 둘러 버텨냈다. 이 정도는 버텨줄 것이라 충분히 예상했다.
덕분에 폭풍이 잠시 잦아들고 피어오른 연기 속에서 쏘아지는 참격을 여유롭게 피하는 것은 물론 뒤이어 눈 깜짝할 사이에 접근한 상대방에 대처할 수 있었다.
‘쉽다. 이게 경험의 차이인가.’
아무리 온갖 마법으로, 각인으로 신체 능력을 끌어올렸다고 하더라도 마스터의 신체와 비교하자면 부족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검을 피하는 일이, 허점을 찾아 반격을 꽂아 넣는 일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장인어른과 대련을 할 때는 전력을 다하지 않으셨음에도 피하기 급급했는데, 그 때와 비교해 내가 한 수, 두 수는 성장했기 때문이겠지만 그의 동작이 눈에 읽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래서야 정말 반푼이랑 다를 게 없는데.’
그는 마스터다. 검에 맺힌 오러 블레이드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러나 마스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움직임은 아래 단계의 기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래서야 오러 블레이드라는 기예만 없다면 그들과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지도 않았다.
“이익!”
요리조리 회피에 집중한 지 몇 수가 지났을까, 고작해야 마법사 한 명을 스치지 조차 못한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얼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달아올랐다. 그의 분노를 표출하듯 오러 또한 점점 크기를 키워갔지만 그럴수록 검의 속도만 느려질 뿐이었다.
‘슬슬 끝내야겠는데.’
워낙 소란을 피운 덕에 점점 구경꾼들이 많아지고 있다. 조금만 가까이 오더라도 휩쓸릴 판국이라 가까이 오는 간 큰 사람은 없지만 꾸역꾸역 몰려들면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 몰랐다. 눈앞의 미친 황소가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지도 않고.
타탕-
빠르게 거리를 뒤로 물러나며 견제의 의미가 담긴 탄환을 뿌렸다. 첫 탄환만큼은 아니더라도 견제로는 충분한 위력. 매서운 기세로 쏘아드는 탄환을 검을 휘둘러 막아내는 동안 다시 한 번 특수질량탄을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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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
물론 그 광경을 에프람도 지켜보고 있었다. 따라붙고자 했다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충분히 거리를 좁힐 수 있었지만 일부로 거리를 내어주었다. 그러함으로서 첫 격돌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정체불명의 금속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생각했기에. 과연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베어주마.’
퉁-
틀림없다.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그 육중한 소음. 기다리고 있었던 만큼 예측한 궤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야말로 두 동강 낼 것이라 의심하지 않은 채. 그러나 이번에도 그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쨍그랑-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09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