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52화 (52/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2화 - >

윌랜드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탑에 없다면 본가에 있을 테니. 마찬가지로 크라머 백작가의 저택을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크라머 백작가는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가문이다.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전대 크라머 백작 때부터, 간단히 말해 졸부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런 이들은 눈에 보이는, 손에 잡히는 제물은 풍족할지 몰라도 명성, 명예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요소는 부족하기 마련. 그런 이들의 대표적인 행동이 돈으로 유명세를 사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에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유하는 것은 그들로서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을 것이다.

휘익-

“이 정도면······. 제국의 귀족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크기겠는데.”

단순히 크기로만 따지자면 지크 후작가의 저택보다도 훨씬 거대할 듯싶었다. 물론 그 안의 역사는 비교도 할 수 없겠지만. 저택의 담장과 입구에서부터 ‘나 부자요.’ 라고 외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누구십니까?”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사의 복장조차도 심상치 않다. 저택을 찾아오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얼굴이니만큼 병사라 하더라도 아무나 쓸 리는 없었지만, 저택 주변을 배회하는 수상한 행동에도 창부터 들이밀지 않는 것은 내 복장도 한몫 했겠지만 기본적으로 교육이 잘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안에 윌랜드 있나?”

“······예?”

“여기가 크라머 백작가의 저택이 아닌가? 윌랜드가 절연 당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죄송하지만 귀하의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레닐, 마탑에서 레닐이 왔다고 하면 알아듣겠지.”

#

저택 내부로 들어갔던 병사가 황급히 뛰쳐나오는 것을 시작으로 나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저택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수도로 올라온 지 사 년이 지난 지금, 연구에만 몰두하느라 화제성은 죽었을지 몰라도 수도의 귀족들 중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게다가 크라머 백작가는 나와 악연으로 묶였었던 사이. 더 높이 날기를 원하는 크라머 백작가에서 나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확률은 한없이 영에 가까웠다.

“연락도 없이 찾아오······시는 건 둘째 치고 웬 갑옷입니까?”

“아, 이거? 좀 있으면 알게 될 거야. 그것보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제 선에서 가능한 일이라면 노력해보겠습니다.”

“아, 다른 건 아니고 연무장을 빌리고 싶은데.”

“연무장을요?”

“어. 넓은 공간이 필요하거든.”

“공간이라면 마탑 내부의 수련장을 사용하시면 되는 것을 여기까지 오셨단 말입니까?”

“조금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한 것도 있고, 웬만하면 다른 이의 눈이 없어야 하기도 하고. 너한테도 딱히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 않아?”

“······그건 그렇죠.”

내 물음에 윌랜드가 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테라 방벽에서 보낸 삼 년이라는 시간은 그의 생각을, 사상을, 시야를 뿌리째 바꿔놓았던 시간이었다. 수도에서의 안락한 삶 속에서는 절대로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눈앞의 남자에게 감사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가 계기를 마련해주지 않았다면 스물 중반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여전히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에 머물러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테라 방벽에서 보낸 삼 년의 시간이 이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성장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했지만 세력적인 성장은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아니, 경쟁자들이 세력을 넓힌 만큼 오히려 퇴보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실제로 수도로 돌아온 지 일 년 가까이 되었지만 가문 내에서의 그의 입지는 그의 어머니가 크라머 백작의 처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레닐이 직접 찾아와 그와의 친분을 보여준다면 큰 도움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될 일은 없었다.

“그래서 빌려줄 수 있겠어?”

“시간은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잠시만 기다리시면 금방 알아보겠습니다.”

#

“한 시간 동안은 그 누구라도 출입을 엄금하였으니 편하신 대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느닷없이 찾아왔는데 부탁까지 들어줘서 고맙다.”

“별 말씀을요. 대제자님 말씀처럼 제게 득이 되면 득이었지. 해가 될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한 시간 뒤에 찾아오겠습니다.”

연무장까지 안내를 맡은 윌랜드까지 사라지자 넓고 넓은 공터에 서 있는 이는 나밖에 없었고 연무장은 저택 크기에 걸맞은 크기를 자랑했기에 마음껏 활동할 수 있을 듯싶었다.

“일단 가볍게 움직여볼까.”

기본적으로 갑옷 전체에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었다.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불편함은 어쩔 수 없었지만 단순히 힘이 부족해서, 갑옷이 무거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일은 없으리라. 물론 마력이 떨어지면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툭-

“!”

단순히 경량화 마법만 걸었다면 시제품 테스트에 이런 넓은 공간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신발에 마력을 불어넣고 스텝을 밟는 것만으로 생각 이상의 추진력이 뿜어져 나온다.

이 곳까지 오는 동안 관리를 잘못했다면 그대로 건물 벽 몇 개는 부셔버렸을 정도로. 연쇄를 잇는 것이 어려워 도약(跳躍)이 아닌 도(跳-뛸 도)에 불과했지만 시제품치고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건 힘들겠지만 방향 전환 정도는 충분하겠네.”

안타깝게도 완성된 시제품은 갑옷 뿐, 발톱을 막아줄 방어구는 준비되었지만 목과 심장에 박을 칼날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덕분에 연무장에서는 예상외로 조용히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헉. 헉.”

그러나 예상했던 한 시간은커녕 삼십 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내 등은 땅에, 내 시선은 하늘로 향해 있었다. 깃털같이 가벼웠던 갑옷이 내 몸을 짓누르는 것으로 보아하니 마력과 체력이 고갈된 것이 명백했다.

‘이건 개량이 필요하겠어.’

한 단어도 아닌 한 글자에 불과한 각인들이다. 아무리 테스트를 위해 반복된 행동을 계속했다 하더라도 이런 식이라면 실전에서의 사용이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테스트였다. 원래 테스트라는 것은 완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지금까지의 길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 보완할 점과 강화할 점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쳐줄만한 결과였다.

‘아버지한테 질 좋은 마정석으로 몇 개 보내달라고 해야겠네.’

마정석 광산을 개발하기 위한 지하 거점은 성공적으로 만들어졌다. 그 결과 약 이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마정석을 채굴하기 시작했고 생각보다도 더 적은 피해만을 입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황제가 공언했던 대로 그 중 일할의 채굴량이 고향으로 보내졌고 6:4 비율로 각각 테라 방벽과 마탑으로 보내기로 했지만 그 중 일부를 빼돌리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마정석의 마력을 등에 업으면······. 효율이 얼마나 나오느냐에 다르겠군.’

오늘 발견한 가장 큰 문제점에 대한 몇 가지 보완책이 떠오르고 정리한 끝에 몸을 일으켰다. 이 생각을 잊어먹기 전에 기록한 후, 연구에 시간을 쏟고 싶었다. 그러나 마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조금 늦출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마탑 밖으로 나오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었고 이런 흔치않은 기회를 붙잡고 싶어 하는 이들은 많았으니까.

#

“하하. 내가 자네를 초대하려고 몇 번이나 사람을 보냈는지 아나? 이제라도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정말 반갑군.”

“저녁 식사에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자네를 초대할 수 있어 나야말로 영광이지. 자자, 어서 들게.”

테스트를 끝마친 뒤, 윌랜드와 짧은 대화를 마무리 짓고 마탑으로 돌아가려던 나를 크라머 백작이 붙잡았다. 지금껏 몇 십 번의 초대가 있기는 했으나 마탑 내부에 있었던 덕에 연구가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었으나 그의 저택까지 와서 초대를 거절한다는 건 너무 큰 결례였다.

“으음.”

저녁은 화려했다. 비싼 재료로 만들어진 음식들이 테이블을 가득 메웠고 음료 또한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 자리했다. 그러나 마음이 불편한데 맛이 무슨 소용일까. 어떻게든 자신의 딸과 나를 엮어보려고 하는 상황의 식사 자리는 내게 한없이 불편함만 안겨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무슨 일로 방문한 건가? 내가 그렇게 초대할 때는 요지부동이던 자네가 말이야.”

“동생을 보러 왔습니다.”

“동생?”

“예. 백작님의 둘째 아드님과 꽤나 이야기가 통했습니다.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기에 호형호제하기로 했지요.”

내가 윌랜드를 동생이라고 부르자 몇몇은 눈을 반짝이고 대부분은 인상을 구겼다. 그것만으로도 누가 누구의 편인지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하. 매번 속만 썩이던 녀석이 자네와 이야기가 통한다니 참 다행인 일이군. 앞으로도 내 아들을 잘 부탁하겠네.”

#

“그······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넌 내 부탁을 들어준 것 밖에는 한 게 없어. 그 다음부터는 네 아버지가 한 일이지. 감사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사죄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어.”

식사를 끝마치고 크라머 백작을 피해 윌랜드의 방으로 향했다. 밖에는 어둠이 세상을 뒤엎었지만 저택은 여전히 밝았다. 귀족들이 발광용으로 사용하곤 하는 저 품질의 마정석은 구하려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감사합니다. 덕분에 조금 더 움직이기 쉬워질 것 같습니다.”

“고마우면 테라 방벽에서 깨달은 마음만 계속해서 가져가도록. 그나저나······ 4서클?”

“아, 예. 테라 방벽에서의 경험 덕에 벽에 오르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느낌상으로는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정작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아서 고생 중이기는 합니다만.”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의 내게 그다지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내가 4서클의 벽을 뛰어넘었을 때가 생각났다.

‘마음가짐의 변화가 큰 몫을 했었지.’

단순히 생존을 벗어나 생존만을 갈구하게 만드는 환경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먹은 그 때, 나는 4서클의 벽을 뛰어넘었었다.

“뭐가 문제인데?”

“가르침을 주시는 겁니까?”

“가르침은 무슨. 그냥 함께 고민해보겠다는 거지.”

“사실······.”

닿을 것 같지만 닿지 않는 그 느낌. 어쩌면 윌랜드가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실력적인 문제는 아닐 수도 있었다. 테라 방벽에서 삼 년을 살아남았다는 것은 수백 번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뜻이니까. 그가 테라 방벽으로 떠날 때, 이미 3서클이었으니 이미 존재하는 서클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간단하게 생각해. 간단하게. 복잡하게 꼴 필요는 없으니까.”

“······간단하게?”

그가 심리적인 문제로 벽을 오르지 못하고 있다면 간단한 한 마디가 벽을 무너뜨리는 말이 될 수도 있었다.

“옛날이야기 중 이런 이야기가 있지. 어떤 기둥에 묶여있는 수레의 매듭을 풀고 수레를 자신에게 가져오는 자에게 큰 상금을 주겠다는 사람이 있었어. 많은 이들이 도전했지만 단 한 사람도 매듭을 풀지 못했지.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여행자가 그 소식을 듣더니 단숨에 수레를 가져가 상금을 받아갔지. 여행자는 어떻게 수레의 매듭을 풀어낼 수 있었을까?”

“······글쎄요.”

“가지고 다니던 칼로 수레의 매듭을 잘라냈거든. 문제가 아무리 복잡해보여도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는 걸 알려주는 옛 이야기지. 네 고민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

내 이야기를 듣고 고민을 이어가던 윌랜드는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생각에 잠겼고 그런 그를 위해 조용히 그를 지켜봤다. 지금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일은 또 한바탕 소란이 있겠군.’

스물넷에 4서클. 잠깐이라면 마탑 정도는 뒤흔들기 충분한 경지였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2화 -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