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1화 - >
윌랜드가 내 말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자신을 놀리기 위해 그런 말을 내뱉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며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명확한 사실 하나는 그가 정말로 삼 년 동안 테라 방벽에서 성실히 복무할 수 있다면 나는 그를 용서할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바뀌는 건지, 아니면 바뀐 사람만 살아남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테라 방벽에 윌랜드와 같은 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몇 명인데 그들 모두가 하하호호 웃으며 지낼 수 있겠는가. 워낙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곳답게 사람이 부족해 오지 않아도 되는 이가 오는 경우도 있는 만큼 초기에는 부딪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일 년이 지난 뒤에는 그런 충돌도 사라진다. 몬스터와 인간, 둘 모두를 적으로 두고 살아남을 수가 없는 곳이기에. 충돌을 일으킬 사람이 사라지기 때문에. 어떤 쪽으로라든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귀족으로서 신분을 유지하려면 성인식 때, 일 년 정도 테라 방벽에서 복무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어야 한다니까.”
이루어질리 없는 상상을 떨쳐내며 다시 책상 위에 올려있는 책에 정신을 집중했다. 안타깝고 매정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윌랜드에 관한 일은 눈앞의 책을 읽는 것보다도 우선순위가 낮았다. 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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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게 수도는 단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군.”
수도를 뒤흔든 소식은 천천히, 그러나 빈틈없이 제국 전역을 향해 퍼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몇몇 이들은 퍼지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소식을 접해들을 수 있었다. 그 안에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영지인 지크 영지가 빠질 수는 없었다.
그리고 현재 지크 영지를 책임지고 있는 시그루드는 책상을 가득 채운 서류들을 처리하며 수도의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가 보내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그 동안 시그니가 해오던 일이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수도로 돌아가지 않고 영지에 머물러 있었기에 집사가 대신하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청년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두각을 드러낼 줄이야.’
물론 그와 레닐이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을 평가하는데 반드시 얼굴을 마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단지 가장 확실한 방법일 뿐, 그를 직접 마주한 이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특히나 그의 아버지가 그렇게 칭찬하는 이는 흔치 않았다. 물론 지크 후작의 성격상 드러내놓고 칭찬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좋은 소리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흔치않은 일이라는 것을 그의 아들인 시그루드가 모를 리 없었다. 더불어 그의 동생인 시그니와의 일화를 통해서도 그가 아버지께서 괜히 그런 평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차기 마탑주 후보 1순위라······. 욕심이 나네. 욕심이 나.’
더 이상 시그루드는 한낱 귀족가의 도련님이 아니었다. 물론 오래 전부터 그의 아버지인 지크 후작을 대신해 영지를 관리해왔지만 아버지에게 직접 ‘이제부터 네가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들은 이상 더더욱 막중한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많은 권리가 주어진다는 이야기는 동시에 많은 의무를 지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수많은 이들이 그만을 바라보는 만큼 그 또한 선택 하나하나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레닐은 그에게 상당히 끌리는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손에 쥐고 있는 수단은 하나라도 많은 게 좋지.’
권력에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방패를 원할 뿐, 지크 가문은 지크 후작 덕분에 황제의 총애를 받는 가문이지만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높이 다다를수록 시기하는 적은 많아지는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레닐은 좋은 방패를 만들 수 있는 재료였다.
그의 집안은 한미하다. 영지를 가진 귀족 가문이라고는 하나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가문인 지크 가문에 비한다면 달빛 앞의 반딧불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그게 뭐가 중요한가. 보석이 담겨있는 함이 허름하다하여 보석의 빛이 바라는 것도 아닌데. 보석이 빛을 뿜어내는 이상 그 누구도 보석을 담고 있는 함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을 텐데.
‘문제는 딱히 대상이 없다는 거군.’
일등 신랑감이 있으면 뭐하나, 신붓감이 없는데. 지크 후작은 오직 후작 부인 한 사람만을 사랑했기에 자식이라고는 그와 시그니, 두 명 밖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방계를 보내자니 안 보내니만 못했다.
‘뭐, 일단 말이라도 꺼내볼까?’
여동생을 희생시킬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께서도 신신당부하지 않으셨던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라고. 그래도 좋은 기회이니 물어는 보고 아니면 그것으로 끝. 그래도 나름대로 작은 인연이 있었던 만큼 뭔가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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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가기로 했나.”
윌랜드가 찾아와 말했다. 테라 방벽으로 가겠다고. 삼 년 뒤에 찾아온다면 그 때는 지금까지의 무례를 용서하고 관계를 다시 맺어달라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정말로 삼 년 동안 살아서 돌아온다면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그와 동시에 연구에도 박차를 가했다. 요즘 연구하고 있는 주제는 각인의 연쇄. 지금까지는 한 물건에 하나의 각인밖에는 세기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두 개 이상의 각인을 세길 방법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간단히 비유해 지금까지 창이라는 개념에 각인을 새겼다면 이제는 창날과 창자루, 하나의 개념을 구성하는 구성품 각각에 각인을 새겨 그것을 연계하는 연구였다. 말만으로는 ‘창날을 창자루에 끼우기 전에 미리 각인을 새겨두면 되지 않느냐.’ 라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게 안 되니까 연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이 연쇄야말로 내가 만들 물건의 핵심 중의 핵심요소인 만큼 성과가 없어서는 안 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각자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인정을, 누군가는 복수를, 누군가는 안정을. 그렇게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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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수를 다짐한지도 오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나름대로의 계획을 갖고 수도로 올라온 지도 사 년이 훌쩍 넘었고. 그 간 많은 일이 있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는 여섯 번째 서클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복수를 위한 걸음도 많이 내딛지 못했다. 그러나 그 동안 뒤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허, 용케도 살아남았네.”
“이제는 믿어주시겠습니까?”
“믿어야지. 한 입으로 두 말 할 수는 없으니까.”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대제자님께도, 제가 섣불리 입에 올렸던 선배님들께도. 그 때의 저는 대제자님 말씀대로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에 불과했었습니다.”
윌랜드는 살아서 테라 방벽에서 돌아왔다. 그가 내 말에 의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도를 떠난 지 정확히 삼 년째 되는 겨울에. 아주 놀랍게도 사지 멀쩡하게 돌아온 것이다.
사실 나는 그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테라 방벽은 어쭙잖은 실력가지고는 버틸 수 없는 곳, 그리고 어쭙잖은 실력의 사람들이 버티는 방법은 쓰러지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주는 것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윌랜드는 누군가를 지탱해줄 수도, 지탱 받을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변했군.”
“변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으니까요. 나쁜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때, 그런 제안을 해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뭘 할 거지?”
“제 자리를 찾아야겠죠.”
윌랜드는 기억하고 있었다. 삼 년 전, 그가 테라 방벽으로 향하는 것을 두고 많은 이들이 어리석다며 손가락질 한 것을. 그러나 그 어떤 때보다 값진 시간이었다고 자부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정도로. 그러나 마법사 한 명보다는 영주 한 명이 테라 방벽에는 더 필요할 터였다.
그 뒤로도 윌랜드는 자주 나를 찾아왔다. 만약 그의 목적이 마탑주의 제자라는 이름을 빌리기 위함이었다면 단순히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이었겠지만 테라 방벽의 생존자로서 찾아왔을 뿐이니 나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이 바뀌었기 때문이겠지만.
그 간 윌랜드의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형이 결혼했다. 상대는 가문 소속 기사의 딸.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나에게도, 형에게도, 동생에게도 정략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윌랜드와의 결투 끝에 5서클이라는 것을 밝힌 직후 수많은 혼담이 밀려들어왔지만 단순히 목록을 내게 보냈을 뿐, 그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분 나쁘지 않도록 거절의 답장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꽤나 고생을 하셨을 것이다.
더불어 내 조카가 형수님의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하니 고향에 대해서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는 그런 쪽으로 좋은 소식은 없었다. 만들려면야 못 만들 것은 없다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런 쪽은 목표를 달성한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돼, 됐다.”
오히려 내 관심은 다른 쪽에 있었다. 무려 사 년 간의 연구 끝에 시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까. 아직 내 실력이 부족하기에, 연구가 부족하기에 완성품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어떤 걸음보다 거대한 한 걸음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철컥-
철컥-
철컥-
신발, 하의, 상의, 장갑, 투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비를 착용하자 그 곳에는 어엿한 한 명의 기사가 있었다. 정작 검을 휘둘러본 적은 손에 셀 수 있을 정도였지만.
절그럭- 절그럭-
움직이는 것 자체는 불편함이 없다. 어떤 곳보다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해야하는 곳인 전쟁터, 그 곳에서 입는 방어구가 오히려 움직임을 제한한다면 그게 말이 되겠는가. 그러나 단순히 기사 흉내 좀 내보자고 20kg가 넘는 갑옷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우웅-
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가 갑옷으로 흘러들어간다. 각기 다른 의미의 각인이 새겨진 장비들이 목마른 이가 물을 들이키는 것처럼 내 몸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도 잠시, 내가 생각했던 밸런스를 맞추기 시작했다.
아마 나와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지금의 내 모습을 봤다면 어느 영화 속 주인공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여기까지는 예상대로고······. 성능 실험을 하기에 여기는 너무 좁은데.”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넓은 공간이. 내가 난리를 쳐도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만큼, 아무래도 내 방은 그런 조건들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 공간을 빌릴 수 있을 만한 곳이······.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지연이라고 할 수 있나?”
태어난 곳은 다르지만 서로의 인생에 큰 굴곡을 찍은 곳은 똑같았다. 기왕이면 새옹지마라고 이왕 장소를 빌려야 한다면 제 나름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을 후배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도 좋을 터였다.
“사전에 예상한 대로만 결과가 나오면 좋을 텐데.”
시제품이기에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최소한 지금까지의 연구가 헛짓거리는 아니었다는 것만 증명해준다면 시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들어간 자금과 노력, 피와 땀이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1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