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반쪽짜리 기사 (2)
* * *
눈을 떴을 때는 나의 방 침대 위였다.
아리스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스, 있지.. 어젯밤에..”
“도망치세요, 아가씨.”
“..뭐?”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쥐었다.
“도망쳐요. 여기 남아있으면, 다른 아가씨들처럼 망가지고 말 거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아가씨들?”
“그레이스 가의 장녀로 입양 오게 된 건, 루나 아가씨가 처음이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묘하게 다양했던 치수의 의복이나 다양한 취향을 고려한 물건들이 쓸데없이 많았다.
“...나는 혹시 몇 번째 아이야?”
“네 번째 아가씨가 다섯 달 전에 도망치셨으니, 루나 아가씨는 다섯 번째네요.”
“...”
목 뒷덜미가 찌릿 거리는 것 같았다.
어젯밤의 제플린 남작의 모습이, 그의 추악한 본성이리라.
“그러니 제발 도망치세요. 아가씨가 더 이상 고통받는걸 보긴 싫어요..”
아리스는 울면서 애원하고 있었다.
그런 짓을 당하고도 몸이 가뿐해진 것을 보면, 그녀가 밤새 나를 치료한 듯 했다.
“..도망 안 갈래!”
“네?”
내 대답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아가씨, 버틸수록 더 심해질 거에요..!”
“나한텐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야! 그리고..”
지금껏 수많은 아이들이, 그의 방에서 울부짖었을 광경을 상상했다.
“아리스를 두고 어디 가진 않을 거야. 친구잖아.”
“아,아가씨..”
울먹거리는 아리스가, 나를 꼭 껴안았다.
내가 도망치면, 또 수많은 아이들이 똑같은 고통을 반복할 거다.
만약 내가 이때 도망쳤다면, 다시 입양되거나 할 수 있는 기회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사야는 수도에 가서, 령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었지.
내가 그녀를 따라잡으려면, 어떻게든 버텨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제플린의 취미 행위는 일주일에 한번, 그것도 길면 한 시간 정도로 끝이라는 것이었다.
그 시간을 제외하고는, 제플린과 마주치거나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었다.
그렇기에 평일 동안은 그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훈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특히 두각을 보였던 훈련은, 검술이었다.
3년의 시간이 흘러 10살이 되던 해, 또래 아이들과 대결해서 질 자신이 없을 정도로 실력이 차올랐다.
“하압..!”
힘을 실은 나의 목검이, 교사의 목검에 강하게 부딪혔다.
“훌륭합니다, 아가씨! 기본기에 대해선 더 이상 가르칠게 없을 정도네요.”
“감사합니다, 스승님.”
땀에 젖은 머리를 털어 넘겼다.
“그런데, 조금 걱정이 됩니다..”
“..예?”
“아가씨의 검에는, 살기가 들어있습니다. 아가씨만한 나이에 가질만한 게 아닌 무서운 살기가..”
“...그럴리가요.”
“아니요, 수많은 상대와 겨뤄본 경험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가씨가 휘두르는 검에는, 확실한 살기가 느껴집니다. 대체 무슨 이유가..”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자리를 정리했다.
‘내 검에, 살기가..?’
만약 진짜로 그런 게 느껴진다고 한다면, 그 살기가 향하는 방향은 딱 하나다.
제플린 그레이스.
그자를 향한 공포는, 내면에서부터 조금씩 분노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또 그 시간이 돌아왔다.
일주일 중, 남작이 유일하게 웃는 시간.
평소처럼 전기를 몸에 흘렸으나, 오늘의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이게 아니야.”
“...?”
“좀 더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이란 말이야..! 어째서 그렇게 담담할 수 있는 거지..!?”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전부 당신 탓이다.
3년간 반복되는 고통에, 이제는 일일이 감정을 표출하기도 지쳤다.
내가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그 짓거리는 빨리 끝나기에 어느샌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 평범한 자극으로는, 너도 이제 만족할 수 없나 보지. 루나?”
제플린의 손가락이, 내 셔츠 앞 단추를 하나씩 풀어제꼈다.
“사람은 말이야, 아무리 태연한 척한들 결국 죽음이 다가오면 속마음을 드러낼 수밖에 없단다.”
죽음? 무슨 소릴 하는 걸까.
“예를 들면, 이렇게.”
그의 손이 향한 곳은, 내 왼쪽 흉부의 윗부분.
심장이 뛰고 있는 그곳에, 파찰음과 함께 그가 무언가를 흘려보냈다.
“.....커헉..끕..”
"어때, 루나. 심장이 멈춰버린 기분이?"
"...끅…..!"
10년 동안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돌던 피가, 그의 전류 한 번에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점점 뇌에 산소가 부족해지는 것을 느끼고, 눈물을 쥐어짜 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래, 바로 그 표정이야..! 그런 표정이 어울려, 루나! 좀 더 보여줘….!"
정신을 잃기 직전에, 그가 또 한 번 가슴팍에 전류를 흘려보냈다.
"개혁…! 켁…. 카학..!"
약 1분간 멈춰있던 호흡을, 심장이 다시 뛰자마자 빠르게 몰아쉬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루나. 이 이상 흥분하면, 좀 위험할 것 같아서 말이지."
"...."
가슴을 부여잡고, 그를 노려봤다.
그러나 제플린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의 변태적 취미 행각뿐이다.
도망치듯, 집무실의 문을 쾅 닫고 나왔다.
"..아가씨…"
문 앞에서 기다리던 아리스가, 나를 부축했다.
"....괜찮아. 조금, 놀랐을 뿐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고문 기술은 나날이 발전해갔다.
이대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나고서도 점점 확신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씻어야겠어. 아리스."
"네. 아가씨.."
홀로 몸을 씻으면서, 구석구석 전기가 지나간 흔적을 더듬었다.
흉터가 남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강도인데, 전문 치료사 따위들이 들러붙어 내 몸에 일말의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 든다.
그러다 문득, 내 손등에서 무언가 빛나는 것을 확인했다.
'문장..?'
어릴 적 사야가 말해줬던 문장.
령사가 되기 위해서는, 꼭 이게 생겨나야 한다고 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내 문장을 확인했다.
"....우욱…!"
그 남자와 똑같은, 번개의 문장.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혐오감에 위액을 토해냈다.
"왜.. 하필이면…!'
손등을 볼 때마다, 제플린의 면상이 떠올랐다.
마치 그 남자와 이어진 것 같아서, 당장이라도 손목을 잘라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아가씨?"
욕실 밖에서 걱정하는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방으로 나오기 전, 장갑으로 손을 단단히 감쌌다.
내 몸에서, 그 자와 공통점이 있다는 게 증오할 정도로 싫었다.
그 후로는, 잘 때도 먹을 때도 손에서 장갑을 벗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구역질이 나와서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아리스가 이따금 나에게 이제 마법을 배울 때가 되지 않았냐며 물었지만, 그때마다 아직 문장이 발현되지 않은 것 같다고 둘러댔다.
나 역시 령사가 되려면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관련한 모든 게 혐오스러웠다.
전기.
비가 오는 날 내려치는 번개, 칼이 맞닿을 때 튀기는 스파크, 옷을 벗을 때 일어나는 정전기까지도.
13살이 되던 해, 사건은 일어났다.
평소처럼 훈련을 마치고, 제플린의 집무실에 들렸을 때였다.
“...아. 너로구나.”
그의 눈은 즐거움에 가득 차 있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 짙은 회색빛만이 느껴졌다.
“오늘은 물러가거라. 별로 흥이 나질 않아서.”
무슨 일이지?
고문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그가, 왠일인지 순순히 나를 보내주었다.
“...”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그대로 방에서 나왔다.
이제. 질렸다는 건가.
그 후로, 그는 몇 주 동안이나 나를 찾지 않았다.
우울증이라도 걸린 사람마냥,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훈련에 임할 수 있었다.
이제는 목검을 벗어나 날이 없는 가검을 든 채로, 스승님과의 연습이 한창이었다.
“스승님,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뭔가요, 아가씨?”
“마법을 쓰지 않고도, 령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가 휘두르던 칼을 멈칫했다.
“령사말입니까..?”
그는 칼을 내려두고, 내게 차분히 설명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아닌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존재하는 직업입니다. 사르카는 인간과 달리 이성이란 게 존재하지 않기에 더욱 위험하죠. 대부분의 령사들이 마법을 중시하고, 접근전을 최대한 피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그 말은..”
“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령사는, 시험을 받아주지 않을 겁니다.”
역시, 무력만으로 령사가 되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아가씨는 어째서 령사가 되시려는 겁니까? 명예를 얻는 것이 목적이라면 다른 길도 많을텐데요.”
“...친구가 있어요. 령사가 돼서 만나기로 했던 친구.”
“..그런거라면,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만.”
그가 설명해준 것은, 기사로써 령사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령사들 사이에는 항상 정해진 수의 기사를 배치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괴물이 아닌, 적대심을 품은 인간의 공격에도 대응할 수 있는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곳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가장 빠른 방법은,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 눈에 띄는 것입니다. 황실의 눈에 직접 드는 것 만큼 출세가 보장되는 길은 없습니다만..”
그는 나에게 설명하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왜 그러시죠?”
“기사들 또한 높은 자리에 있을 수록 마법을 겸용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특히나 황실 기사단 정도가 되면, 전원이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라는 말인 것 같았다.
“그리고,. 조심하십시오. 살기를 담은 칼날을 휘두르다 보면, 어떤 형태로든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입니다.”
그가 내게 늘 습관처럼 말하던, 살기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건 잘못된 건가요?”
“예?”
“그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칼날이었다면, 그래도 잘못된 건가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을 많이 죽여 나갈수록, 아가씨의 신변에 가해지는 위험은 커질 겁니다. 그 점을 우려하여 말씀 드린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물론, 베겠지요. 그 무게를 짊어지고서라도.”
“..새겨 들을게요. 스승님.”
정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원래라면 제플린의 집무실에 들러야 하는 날이지만, 이미 그가 나를 찾지 않은지 한 달이 흘렀다.
어차피 가더라도, 돌려보낼게 뻔했다.
“아리스, 목욕물은 준비됐어?”
침대에 걸터앉아, 아리스를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리스?”
방을 살피고, 복도를 살펴봐도 아리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찾으면 언제나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주변을 떠나지 않는 아리스였는데, 어디로 간 걸까.
그때, 복도를 통해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자 같은 것이 넘어지며 나는 소리.
소리의 근원지는, 제플린의 집무실이었다.
조심스럽게 발을 떼어, 그의 집무실 문 앞에 도착했다.
귀를 대고, 그 소리를 엿들었다.
“꺄아악!”
비명소리가 들리자마자, 집무실의 문을 발로 차 밀었다.
“그래, 바로 이 반응이야..! 이런 표정을 보이는 게 맞는 거라고..!”
의자 채로 눕혀진 아리스와, 손에서 전기가 흐르는 제플린.
“아…. 아가씨…”
공포감이 몸을 지배한듯한 표정의 아리스와, 시선이 맞닿았다.
그리고, 완전히 이성이 날아갔다.
순식간에 가검을 빼 들고, 엎드린 제플린의 뒤통수를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
“카학..!”.
그가 방어할 틈도 없이, 날을 세워서 또 한 번 내려찍었다.
“쓰레기 같은 자식..!”
퍽.
머리통에서 타격음이 들려올 정도로, 무서운 기세를 가지고 계속해서 내려찍었다.
온 힘을 가한 타격에, 날이 조금씩 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날이 다 구부러질 때 쯤엔, 손잡이 부분으로 계속해서 뒤통수를 찍어 눌렀다.
“죽어..죽으란 말이야….!”
“아가씨!”
아리스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제서야, 손에 흥건한 피와 제플린의 찌그러진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죽었어요…. 진작에..”
“....”
칼을 바닥에 버리고, 아리스를 끌어안았다.
그날 저녁, 나와 아리스는 양탄자로 싸맨 그의 시신을 몰래 강가에 버렸다.
며칠이 지나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하인들이 그를 찾아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지만, 그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6개월 뒤, 그는 계획 없는 여행을 떠났다가 실종됐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몇몇 하인들은 그가 실종된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알고 있는 듯 했지만, 그간 아이들에게 해왔던 짓을 알기에 굳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제외하면 일가친척도,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었던 그였기에 집과 모든 재산은 양자였던 내 소유가 되었다.
그날의 사건은, 나와 아리스만이 생생하게 기억한 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아리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리스가, 나를 보며 대답했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여기서 자랐던지라, 다른 일을 한다는 건 상상이 잘 안 가네요.”
“그럼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을까?”
“네? 어떤 부탁인가요?”
“저택의 사치품과 돈이 될만한 물건들을 모두 처분하고, 될 수 있는 만큼 아이들을 입양해 줘.”
“....네!? 진심이세요, 아가씨?”
“세상엔 나 같은 일을 겪는 아이들이 많을 거야. 남작의 더러운 돈을 가지고 있을 바에야, 아이들을 위해 쓰고 싶어.”
“...알겠어요. 그게 아가씨의 뜻이라면.”
그 후로 나는 기사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여행길에 올랐다.
이따금씩 아리스로부터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아이들의 근황과 소식을 전해 들었다.
15세가 되던 해, 상당히 어린 나이로 기사의 직위를 수여받았다.
앞으로가 어찌 될 지 몰랐지만, 있는 힘껏 정진하려고 마음먹었다.
어떻게 해서든, 사야에게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