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반쪽짜리 기사 (1)
* * *
내가 지금의 루나 그레이스가 아닌, 루덴가의 고아 루나였을 때의 이야기다.
나를 대신해 사야가 방출된 이후, 한 번의 유예가 더 주어졌다.
일렬로 늘어선 아이들 중에 서서, 여느 때와는 다르게 활짝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마 귀족들 눈에 들기 위해 행동했던 건 이게 처음 있는 일이었을 거다.
7살의 나에겐 사야가 이 세상의 전부고, 하나뿐인 친구였으니, 그녀가 없으니 싫어도 홀로 설 수밖에.
"너, 이름이 뭐지?"
귀족가의 남자가, 내게 관심을 보였다.
마르고 큰 키에, 나와 같은 금발을 지닌 사내.
나이를 가늠하긴 어렵지만, 여성에게 쉽게 호감을 살 외모라는 것은 알았다.
“..저는..”
보육원장을 포함해 모두의 관심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매번 선택될 때마다 기행을 부려 새로운 업적을 세우다시피 했던 나였기에, 이번에도 역시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루나입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내 반응에,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눈빛은 남자의 눈을 똑바로 향하고, 자세는 최대한 다소곳하게.
"눈빛이 마음에 드는구나. 이 아이로 하죠."
원장이 놀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의 선택을 반기듯, 치마 끝을 잡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보는 눈이 탁월하시군요! 그런데, 루나는 보육원 내에서도 외모가 고운 편이라..”
“돈이라면 얼마든지 내도록 하겠습니다. 이 아이가 마음에 드는군요.”
“알겠습니다, 제플린 남작님. 데려가시기 전에, 루나에게 잠깐 시간을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보육원장은 나를 데리고 복도로 나와, 특유의 쨍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루나. 한 달 새에 마음이라도 변한 거냐?”
“..그런 것 같아요.”
“세상에. 이제 너라면 진절머리가 났는데, 드디어 나갈 생각이 들었나 보구나.”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아이, 널 끔찍이도 아끼더군.”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원장과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고, 나는 곧바로 입양될 준비에 들어갔다.
보통 이름있는 귀족 가문에서 아이를 데려가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보육원 입장에서도 큰 돈을 가져다주는 나의 입양 건은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동안 고마웠어. 헬레나!”
단장을 마치고, 보육원을 나서기 전 헬레나에게 인사했다.
그녀에게 반말을 하던 건 이미 습관처럼 되어버려서,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었다.
“그 잠깐 새에 이렇게 어른스러워졌구나. 사야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좋아했을 텐데.”
“..잘 지내고 있을까, 사야도?”
“...물론.”
조금 뜸을 들인 대답이었지만, 나 역시 그녀가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고 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령사가 되어서, 다시 사야를 만날 거라고 다짐했으니까.
“준비는 끝났니, 아가?”
“네. 완벽해요.”
제플린 남작의 손을 잡고, 그가 미리 준비해둔 마차에 올라탔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보육원 바깥 세상의 풍경.
넓게 드리워진 숲길을 눈으로 좇으며,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불편하진 않니, 아가?”
“네. 마차도 신기하고, 바깥에 나온 건 처음이에요!”
“..그래. 다행이로구나.”
좀 더 이야기를 나눌 것 같았는데, 그는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다 왔다. 여기가 앞으로 네가 지내게 될 곳이란다.”
“와아..”
척 봐도 거대한 규모의 저택이었다.
정원을 관리하는 하인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먼 길 다녀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어요, 남작님.”
“아닙니다. 더운데 고생해주시니 제가 더 감사할 따름이죠.”
하인들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는 걸 보니, 그는 권위적인 느낌의 귀족은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그를 맞이하는 하인들의 모습도, 하나같이 밝았다.
“..실례되옵니다만, 그 아이는?”
그녀가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부터 그레이스 가의 장녀가 될, 루나 그레이스 양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
나에게도 밝게 인사해줄 줄 알았는데, 그들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만, 제플린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다들 처음이라 적응이 필요한 모양이구나. 금방 널 일원으로 받아들일 거야. 걱정하지 말렴.”
“..네.”
그를 따라 저택의 안쪽으로 이동했다.
거기에는, 고풍스러운 가구와 한껏 꾸며진 장식들이 달린 침대가 놓인 커다란 방이 하나 있었다.
“여기가 앞으로 네가 지낼 공간이란다. 루나.”
여럿이서 쓰기도 넓어 보이는 방을, 나 혼자서?
“이, 이런 커다란 방을 제가 써도 되나요?”
“물론이지. 너는 어엿한 그레이스 가의 장녀니까. 자긍심을 가지렴. 루나.”
방을 살펴보며 정신을 뺏긴 사이, 그가 누군가를 불러오며 말했다.
“인사하렴. 앞으로 너의 생활 전반을 보좌해줄 아리스란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아리스라고 불린 내 또래의 여자아이는, 메이드 복의 끝자락을 살짝 들고 내게 인사했다.
내가 그녀를 보고 활짝 웃어 보이자, 그녀도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기본적인 생활에 관해서는 아리스에게 듣도록 해. 나는 밀린 업무가 좀 있어서. 아리스, 부탁하마.”
“네, 남작님.”
그는 그렇게 우릴 남겨두고 떠났고, 그녀와 어색하게 방에 남아있게 되었다.
“..어, 아리스? 그렇게 부르면 될까요?”
“굳이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으셔도 돼요. 편하게 불러주셔도 된답니다.”
“그래? 반가워, 아리스!”
그녀의 손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
내 활기참에 놀란 모양인지, 그녀는 약간 몸을 움츠렸지만 이내 웃어주며 말했다.
“..저도 반가워요, 아가씨.”
밤색 머리의 양쪽을 작게 묶은 귀여운 외모의 여자아이였다.
그래도 이 커다란 저택에서 첫 친구가 생긴 것 같아, 마음이 한쪽 편해져 왔다.
“기본적인 일과를 소개해드릴게요, 루나. 우선은..”
“일과? 나중에 들려주면 안 될까? 일단 여길 탐험해 보고 싶어!”
“네? 하지만..”
“부탁이야, 아리스. 응?”
애원하는 눈빛으로 아리스를 보자, 그녀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저택의 소개부터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고마워!”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엄청나게 커다란 화장실부터, 여기 왜 있는가 싶은 사치스러운 조각품들, 아무리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기다란 복도까지 모두 비현실적이다.
“방이 다들 커다래! 귀족들은 이런 데서 사는구나, 아리스?"
"..아가씨도 이미 귀족 신분이세요. 루나."
"믿기지가 않아. 이런 곳에 오게 되다니."
복도를 신나게 거닐다 보니, 그 끝에 커다란 문이 달린 방앞에 도착했다.
“아리스, 여긴 뭐하는 곳이야?”
“아가씨, 거긴…!”
그녀가 문을 열려는 내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거긴, 남작님의 집무실이에요. 누가 함부로 들어오게 하지 않으신답니다. 그게 설령 아가씨라도요.”
“..알았어, 명심할게. 아리스.”
“슬슬 배가 고프지 않으신가요? 방에 가서 저녁을 들도록 해요.”
“응!”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어, 아리스가 가져온 식사를 즐겼다.
아직은 방에서 따로 먹기는 하지만, 보육원에서 먹은 것과는 비교하기가 미안할 수준의 고급 음식들 뿐이었다.
"천천히 드세요. 체하실라.”
“미안, 너무 맛있는걸!”
내가 복스럽게 먹는 모습을, 아리스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아까 말했던 일과에 대해서 설명해 드릴게요. 크게 어려운 일들은 없을 거랍니다.”
“일과?”
“아침에 일어나시면, 단장을 하고 예절교육을 받으실 거에요.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가 되면 승마, 궁술, 검술을 익히고….”
“잠깐 잠깐, 그렇게나 많이..?”
“그럼요. 아가씨는 다른 자녀분들에 비해 교육이 더 늦은 편이니, 그걸 따라잡을 수 있도록 일과를 조정했답니다.”
귀족의 삶이란, 마냥 놀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남들보다 여유가 있는 만큼, 죽도록 교양을 쌓고 무예를 길러 경쟁력을 차지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일과가 하나 있는데요…”
지금껏 밝기만 하던 아리스의 표정에, 처음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아리스?”
“..일주일에 한번, 남작님을 뵈러 가실 거에요. 장소는.. 아까 보았던 그 집무실이요.”
그녀가 망설이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단순히 그를 만나는 일이었다.
“난 또 뭐라고. 그런 거라면 어려울 게 없지.”
“...그런가요.”
그가 유난히 말을 아꼈기에, 나 역시 그와 조금 더 대화해보고 싶었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주무시도록 할까요?”
“그럴게. 고마워, 아리스.”
그녀의 친절한 보살핌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이게 제 일인걸요. 그럼, 안녕히 주무시길.”
방에 불이 꺼지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매일이 오늘 같다면, 참 좋으려만.
날이 밝고, 아리스가 차려준 아침을 먹은 뒤 단장을 했다.
아리스에게 빗질을 받았는데, 그녀는 내 곱슬거리는 머릿결이 익숙지 않은지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했다.
새삼, 사야의 빗질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는지 체감하게 된다.
단장을 마치고 예절 교사에게서 오전동안 교육을 받았다.
몸가짐, 화술, 인사와 앉는 방법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게 너무 많아서 머리가 아팠다.
좀처럼 교정되지 않는 나를 보며, 교사 또한 한숨을 푹 쉬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나 오후에 배우는 것들은 나와 잘 맞았던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즐거울 정도였다.
말을 타고, 활을 쏘고, 검을 휘두르는 일련의 과정들이 전부 재미있었다.
실력이 빨리 늘어가는 것도 금방 체감이 되었고,
그렇기에, 늘 지옥 같은 오전 시간을 견디며 오후만을 기다리는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일과를 마친 후 아리스가 내게 말했다.
“아가씨, 오늘 남작님을 만나는 날인 걸 잊지 않으셨죠?”
“참, 그랬었지? 까먹을 뻔했어. 고마워, 아리스.”
“...”
아리스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버린다.
이상하네. 오늘따라 왜 저러지?
나는 아리스가 알려준 대로, 이름을 대며 제플린의 집무실에 노크를 했다.
“..루나입니다.”
“아, 들어오너라.”
그는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어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거기 앉겠니?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네, 남작님.”
나는 그가 가리킨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어때, 여기서의 일과는 좀 힘들지 않았어?”
“힘들긴요. 오히려 매일이 즐거운걸요!”
“..그래, 그것참 다행이구나.”
제플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뒤로 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어깨가 이렇게나 뭉쳐선.”
“...”
“사용하지 않던 근육을 쓰게 되면, 뭉치게 되는 법이지.”
“..남작님?”
그의 손은 내 목을 타고 올라와, 목덜미가 있는 부근에서 멈췄다.
“지금까지 수많은 아이가, 몇 번 만에 망가져 버렸단다. 필시 내가 마법을 잘 조절하지 못해서였겠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
“그러나 이번에는 달라. 쉽게 망가지지 않도록, 몇십번이고 실험하며 출력을 조절했단다. 너를 위해서..”
불안한 기운이 감돌며, 그를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을 때였다.
“너는 어떤 표정을 보여주려나, 루나?”
“......!”
내 목과 맞닿은 그의 손으로부터, 찌릿 거리는 감각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전신의 혈관을 태우는 듯한 끔찍한 감각.
2초 남짓한 시간이었으나, 일곱살 여자아이가 고통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꺄아악…. 읍!”
그의 다른 한 손은, 내 입을 강하게 틀어막아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 시끄러운 소리를 내버리면, 내가 너를 학대하는 것 같잖니?”
나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그의 얼굴과 시선을 마주했다.
“소리를 내지 않는 착한 아이가 될 때까지, 다시 해야겠구나.”
“읍…. 으으읍…!”
또 한 번, 몸 전체에 격렬한 전류가 흘러들었다.
“으읍…..!”
“좋아, 그런 눈빛이 좋아. 루나. 처음부터 네가 마음에 들었다니까.”
그의 행동은, 내가 소리를 내지 않을 때까지 반복되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기절하게 되어, 소리를 내지 못하게 되었을 때까지.
“...생각보다 강한 아이구나, 루나.”
쓰러져버린 나를 보며, 제플린이 밖에 있는 누군가를 불렀다.
“아리스! 루나를 데리고 가도록!”
문이 열리고, 울먹거리는 표정의 아리스가 들어와 나를 들쳐멨다.
“상처가 남지 않도록, 꼼꼼하게 치료하거라. 귀한 몸에 흉터가 남으면 안 되잖니.”
“...네, 남작님.”
집무실 문이 닫히고, 그는 몇 개월 만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제플린 그레이스의 본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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