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제자리로 돌아가다
-놈에게 약을 먹인 후 있는 힘껏 나를 불러라.
-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와줘야 해요.
-1초 안에 달려가마. 반드시.
도란을 통해 발타드렌의 침실 위치를 전달받은 고병갑. 그는 늦은 저녁 발타드렌에 잠입했다. 최대한 기척을 숨겼음에도 마음 한 켠이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운이 따라주는지 특별히 미심쩍은 움직임은 관측되지 않았다. 종종 거리를 지나는 고블린을 발견하곤 말을 걸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으나 꿋꿋이 참아냈다.
그림자에 몸을 숨긴 지 몇 시간. 별안간 굉음이 울리며 궁정의 한쪽 벽면이 허물어졌다. 뒤이어 도란의 목소리가 발타드렌의 밤을 깨웠다.
-로드! 로드으으!!!
‘때가 됐다.’
이제 더는 기척을 감출 필요가 없다. 그는 힘을 개방하며 자욱한 먼지구름을 향해 몸을 던졌다.
벌거벗은 랜드리올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네놈은!?」
「…….」
구태여 대꾸를 할 이유가 없다. 고병갑은 다만 신속히 접근해 검을 찔렀다. 일격에 끝낼 심산으로 머리를 노린다. 랜드리올이 다급히 왼팔로 방어했다. 안면이 관통되는 것은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이… 잡것들이 감히 작당하고……!」
「하압!」
「크흑!」
고병갑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랜드리올이 벽에 등을 받았다. 하박을 관통한 칼끝이 그의 콧잔등을 건드릴락 말락 했다.
「끄으으……!」
랜드리올이 오른손에 내력을 집중시켰다. 아주 짧게 집중했을 뿐인데도 어마어마한 양이 모였다. 고병갑은 본능적인 섬뜩함을 느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랜드리올이 비틀거리자 애써 응집한 내력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제정신이 아니다!’
놈은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왼쪽 눈은 진즉 감겼고, 치켜뜬 오른쪽 눈 역시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내력 운용은커녕 팔다리를 제대로 다루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눈에 초점도 없지 않은가.
사실 저만큼 버티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여느 범인이었다면 약을 먹자마자 곯아떨어졌을 터.
‘서둘러 끝내야 해. 저놈의 심복이 몰려오기 전에!’
그가 검에 내력을 실었다. 그 뒤 뿌리듯 휘둘렀다. 랜드리올의 왼팔이 속절없이 떨어져 나가며 붉은 선혈을 흩뿌렸다.
쉬지 않고 연속 공격을 내질렀다. 이번에도 확실히 목을 겨냥했다.
「이이…! 내가 랜드리올이다!」
「컥!」
랜드리올이 사방으로 내력을 발산했다. 그 기세가 흡사 화산 같았다. 고병갑은 격류에 휩쓸린 것처럼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가 서둘러 초점을 바로 잡았다. 그 순간 하늘에서 섬광이 번쩍이더니 랜드리올이 뚝 떨어졌다. 놈의 두 다리가 충차처럼 고병갑을 때렸다.
「카햙―!」
콰쾅!
그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처박힌 지점으로부터 반경 십수 미터에 이르는 영역이 움푹 파였다.
배에 구멍이라도 뚫리는 줄 알았다. 타격 순간 육신을 보강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복부가 터져 나갔으리라.
고병갑은 끔찍한 고통을 씹어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맞은 편엔 랜드리올이 서 있다. 녀석은 꾸역꾸역 중심을 잡고 있었다.
랜드리올이 고대의 상점을 열었다. 경단을 사 먹을 심산이다. 당연히 고병갑이 내버려 둘 리 없다.
그가 벼락처럼 돌진했다. 검이 매서운 기세로 뻗어 나갔다. 베기와 찌르기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의 검은 굶주린 살모사처럼 사납고 집요했다.
약에 취한 데다 왼팔이 절단된 랜드리올은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비겁한!」
「비겁? 네 양심에 그딴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촤악! 또 한 무더기의 피가 허공을 적셨다.
「노오옴!」
「닥치고 뒤져!」
찰나. 검이 번뜩이더니 랜드리올의 상체를 가로질렀다. 살갗이 벌어지며 시뻘건 속살이 드러났다.
고병갑은 곧바로 검을 역수로 쥐고 랜드리올의 심장을 찔렀다. 놈의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후드득 떨어졌다.
「꺼… 꺼어…… 감히……!」
놈이 고병갑을 잡으려 오른팔을 뻗었다. 고병갑은 그 손길을 피하며 돌려차기를 날렸다. 랜드리올이 라켓에 맞은 공처럼 날아가 건물을 들이받았다.
주변이 어수룩해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저기다! 제왕의 거처 주변이야!」
「대체 무슨 일이냐!?」
소란을 듣고 인파가 몰려들었다. 200쯤 되는 고블린과 십수 명의 사라온 여인이다.
그들은 풍비박산 난 전투현장을 보고 1차로 놀랐다. 혼란의 틈새에서 고병갑을 발견한 뒤엔 거의 눈알을 뱉어내려 했다.
「로, 로로, 로드시여!?」
「어… 언제 돌아오신……. 아니, 살아계셨던 겁니까?」
「인간이잖아? 그런데 로드라고?」
「그럼 저 인간이 설마!?」
고블린과 사라온의 반응이 엇갈렸다. 그때 자욱한 먼지구름 사이로 격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쿨럭! 쿠억! 쿠어어얽!」
무너진 건물 잔해 아래 랜드리올이 축 늘어졌다. 그의 입에선 붉은 폭포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축 늘어진 고개와 두 어깨에선 좀전의 패기를 찾을 수 없었다.
「제, 제왕이시여!」
「어찌 이런 참혹한!」
사라온들이 다급히 달려가 그를 호위했다. 누구는 자기 옷을 벗어 랜드리올에게 둘러주기도 했다.
단 한 명의 사라온만이 얼어붙어 고병갑을 바라보았다. 메리린이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살아계신 겁니까?」
고병갑은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다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날 살린 게 너는 아닌 모양이구나.」
「…….」
「내가 살아있어서 불만인 모양이지?」
「그, 그건…….」
메리린이 입을 벙긋거렸다. 할 말은 많은데, 너무 많아서 오히려 말을 못 하는 듯했다.
「거기서 지켜봐라. 네가 벌인 일이 정확히 거꾸로 돌아가는 꼴을.」
고병갑이 검에 내력을 응집했다. 검기를 뿌려 전방의 적을 모조리 섬멸할 작정이었다. 그러자 메리린이 검을 뽑으며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가 토하듯이 말했다.
「왜……. 왜 돌아오신 겁니까? 살아계셨다면 그냥 이곳을 잊고 사시지. 왜 돌아오셨냐는 말입니다!」
「내가 내 자리를 찾아오는 게 어디가 잘못됐다는 거지?」
「아니야!」
그녀가 버럭 소리쳤다.
「당신은… 당신은 인간이잖아요! 인간은 로드일 수 없다고! 사라온의 왕은 사라온이어야 해!」
「맞는 말이다. 나는 사라온을 거느릴 생각이 없으니까.」
「무슨……?」
「나는 처음부터 고블린 로드였다.」
고병갑이 검기를 뿌리며 돌진했다. 메리린도 황급히 검기를 발산했다. 검기끼리 상충하며 큰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세상이 번쩍인 틈을 타 고병갑이 파고들었다. 그의 검이 메리린의 허점을 찔렀다.
그녀는 옆구리에 깊은 자상을 입긴 했지만, 겨우겨우 막아냈다. 고병갑과 검을 맞댄 메리린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뭘 멀뚱히 보고만 있는 거냐! 제왕께서 변을 당하셨다! 이 남자를 쳐!」
고블린들에게 한 소리였다.
하지만 고블린들은 선 자리에서 미동도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짙은 혼란이 느껴졌다.
「하, 하지만…… 로드도 우리 로드다.」
「로드가 두 명이다. 누, 누굴 따라야 하나?」
「어어…… 어어…….」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이제껏 로드께 충성한다는 아주 간단한 원리로 행동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대뜸 로드가 2명이 돼버리니 누굴 따라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이다.
「뭘 망설이는 게야! 너희는 사라온이냐 인간이냐!」
「우… 우리는…….」
「으으아아아! 비켜라!」
그때였다. 사라온 여인들의 호위를 받던 랜드리올이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꿰뚫리고 팔이 잘리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도 그 위엄은 굳건했다.
랜드리올이 타는 듯한 눈으로 사방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고블린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이 쓰레기 같은 것들!」
그가 이를 갈더니 제왕의 기개를 마구 방출하며 고함쳤다.
「내 이 땅의 유일무이한 왕으로 명하노니! 저 인간을 찢어 죽여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고블린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붉게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다. 녀석들은 고병갑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고병갑도 지지 않고 외쳤다.
「살기를 거두어라! 내가 너희 고블린의 왕이다!」
그가 일갈하자 으르렁거리던 고블린들의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랜드리올이 부들부들 떨며 재차 외쳤다.
「이 병신 같은 것들이! 어서 찢어 죽이래도!」
「귀를 막아라! 너희는 저놈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짐의 명을 거부하는 것들은 사지를 뽑아버리겠다! 어서 저 인간 놈을 죽여!」
「아무것도 하지 마라!」
랜드리올과 고병갑의 기개가 서로 충돌했다. 그사이에 낀 고블린들은 죽을 맛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사지만 덜덜 떨어댔다.
「이 쓰레기들아! 움직여! 움직이라고! 저 인간 놈을 당장 죽여버리란 말이야아아!!!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게야! 내가 네놈들의 왕이라니까!」
랜드리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분노로 판단력이 흐트러진 그는 운기를 취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제, 제왕이시여. 부디 고정하시고 상처를 가다듬―」
「집어치워!」
「꺅!」
그를 진정시키려던 메리린은 도리어 그가 휘두른 팔에 맞아 나뒹굴었다.
랜드리올이 탄식했다.
「이런 쓰레기들을 데리고 마드무트와 전쟁을 하려 했다니. 내가 어리석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랜드리올이 숨을 씩씩 몰아쉬더니 이어 말했다.
「모두 자결해라! 제 목을 졸라 죽어버리란 말이다!」
그 순간이었다. 고블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목을 졸라대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은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혼란에 못 이겨 죽음으로 안식을 얻으려는 것이다.
고병갑이 기겁하며 만류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당장 멈춰라! 그만두라고!」
「커흙… 로, 로드시여…… 죄송합니다. 그치만 너무… 너무…… 무섭습니다. 차라리 죽고 싶습니다…….」
「하지마! 이이… 쓰레기 새끼가!」
고병갑이 즉시 검을 고쳐잡았다. 이럴 때가 아니라 1초라도 빨리 랜드리올을 죽여버려야 했다.
랜드리올은 광기에 젖은 목소리로 웃어댔다.
「흐하하하하! 잘한다, 잘해! 그대로 몽땅 뒤져버리는―컭!」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랜드리올의 복부를 꿰뚫으며 새카만 손 하나가 튀어 나왔다. 누군가 등 뒤에서 찌른 것이다.
새카만 손의 주인공은 도르마였다. 그가 울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세상에 어느 왕이 제 백성에게 자결하라 명한단 말이오! 당신은 우리의 왕이 아니야!」
「이이 벌레 같은 놈이!」
「께엑!」
랜드리올이 거세게 몸을 털며 내력을 발산했다. 코앞에서 폭풍을 맞이한 도르마는 전신이 걸레짝이 되며 날아갔다.
랜드리올이 복부를 부여잡으며 비틀거렸다.
그때 우악스러운 검세가 그를 때렸다.
「랜드리오오오올!!!」
「크하앍!」
「으아아아아!!!」
고병갑은 무아지경에 빠져 검을 휘둘렀다. 회오리치는 내력이 랜드리올의 몸 곳곳을 난도질했다.
찰나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수백 번의 칼질이 랜드리올의 몸을 헤집었다.
「어윽…… 어윽!」
랜드리올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비참한 꼴로 널브러졌다. 몸의 어느 한 군데도 온전치 못했다.
고병갑은 그 위에 올라타 검을 겨누었다. 그가 피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네놈은 과거의 망령으로 남아야 했다!」
고병갑이 검을 찔렀다. 허나 내지른 칼날은 랜드리올에게 닿지 못했다.
메리린이 득달같이 달려와 고병갑을 몸으로 들이받았기 때문이다.
「끄억!」
그가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굴렀다. 그도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고병갑이 몸을 일으키려 땅을 짚었다. 메리린은 그의 팔과 가슴팍을 단단히 밟았다. 그녀가 거꾸로 잡은 검을 고병갑의 목에 겨누었다.
메리린이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당신만… 당신만 돌아오지 않았으면 됐어!」
「…….」
「나는 제왕을 지켜야 해. 제왕을 지켜야만 한다고!」
메리린이 검을 내리찍었다. 고병갑은 끝을 직감했다.
칼날이 고병갑의 코끝을 스친 순간, 그녀의 몸이 반으로 쩍 갈라졌다. 무너져내린 메리린의 뒤로 피를 뒤집어쓴 소녀가 보였다.
도란이었다.
「누구도… 누구도 로드를 헤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