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05화 (105/151)

105화 제자리로 돌아가다

「그렇게 된 겁니다.」

「흠…….」

고병갑은 고블린들의 전후 사정을, 고블린들은 그들 로드의 전후 사정을 알게 됐다.

고병갑은 꽁초를 비벼 끈 뒤 생각에 잠겼다.

‘난장판이군.’

랜드리올이 전쟁을 준비한다고 한다.

전투능력이 특출난 고블린을 모아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키고, 도중에 낙오하면 솜니움으로 보내 노역을 시킨다.

또한 암컷 고블린……. 아니, 여성 사라온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고 있다. 남는 수정으론 철광석을 사서 무기를 만든다고 했다.

‘어쩐지 수정이 이것밖에 안 남았더라.’

그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수정은 1천만을 넘겼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고작 200만 남짓이었다.

‘메리린……. 왕후 자리가 그렇게 탐났더냐?’

메리린은 정실부인이 되었다. 지금은 고블린들에게 마님 소리를 듣는 모양이다.

공격대는 랜드리올의 측근으로서 병사 교육을 전담하는 중이라고 한다.

싸움이면 도란도 한 가닥 한다. 그런데 솜니움에서 수정이나 캐고 있는 게 궁금해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 망할 자식이 저를 침실로…….

요약하자면 이랬다. 랜드리올은 몇몇 여인네를 침실로 들여 아이를 배게 했다. ‘제왕의 씨’를 퍼트려 뛰어난 인재를 뽑아내겠다는 명목으로.

도란도 모체로서 선정됐다. 메리린의 만류가 있었으나 제왕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도란이 마구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날 랜드리올은 도란을 복날 개 패듯 두들겨 팬 뒤 솜니움으로 보냈다. 차마 죽이진 못하겠으니 막일이라도 시킨 것이다.

「로드시여.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 너희가 더 고생했다. 그리고 도란.」

「네 로드.」

「미안하다. 내가 어리석은 탓에 네가 험한 꼴을 당할 뻔했구나.」

「그게 왜 로드 잘못이에요. 로드는 아무 잘못 없으세요.」

고병갑은 다만 도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로드시여.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발타드렌으로 쳐들어가실 겁니까?」

「쳐들어가요! 애들을 다 끌고 가서 그 망할 것들을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니야.」

「왜요?」

「랜드리올은 강해. 나보다 더.」

인정하긴 싫지만 랜드리올은 강하다.

고병갑은 아직도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했다. 범접할 수 없는 강함에 넋을 빼앗겼던 순간을.

「그리고 그곳엔 고블린들도 있어. 섣불리 쳐들어갔다가 동족끼리 칼을 겨누기라도 하면……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돼.」

「걔들도 로드의 말을 들을 거예요. 다들 로드를 그리워했으니까요!」

도란은 확신하는 듯했지만, 고병갑은 생각이 달랐다.

도르마.

고블린 중 누구보다 고병갑을 잘 따랐던 도르마도 랜드리올의 기개 앞에 굴복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자신도 로드의 정수를 가지고 있다만 랜드리올과 권능으로 맞붙어서 이길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어떡한담.’

타도 랜드리올. 그 과업을 위해서는 더 많은 생각과 치밀한 작전이 필요하다.

고민이 길어질수록 재떨이가 수북해졌다.

‘내가 랜드리올보다 우월한 부분이 있을까? 내가 랜드리올보다 한발 앞설 수 있는 분야가…….’

그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고붕이와 도란도 덩달아 안색이 굳었다. 그때 끼익 문이 열리더니 쪼꼬미 한 명이 들어섰다.

녀석의 품엔 소쿠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감자가 수북이 쌓인 소쿠리였다.

「로드. 이거 에아가 갖다 주래. 로드 배고플 거라고.」

「……참나.」

이제껏 쌓아온 긴장이 한순간에 풀렸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마른세수를 몇 번 했다.

「너는 배 안 고프냐?」

「별로 안 고파. 로드 먹어.」

고병갑이 감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역시 감자는 아스빌람산 감자다. 알감자 하나가 어지간한 주먹 두 개 크기는 된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 스럽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감자일 뿐이니까.

「…….」

그는 감자를 베어 무는 대신 멍하니 들여보았다. 쪼꼬미는 로드의 기행이 의문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안 먹어?」

「그래. 고전적인 방법으로 한 번 가보자.」

「엥?」

고병갑은 뭔가 결심을 굳힌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감자를 두 입 만에 먹어치운 뒤 도란을 보았다.

「도란.」

「네 로드!」

「랜드리올의 일거수일투족을 네가 아는 대로 말해.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네! 알겠어요.」

「그리고 고붕아.」

「옙!」

「애들을 끌고 가서 채굴 작업을 속행해. 저쪽에서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면 안 되니까. 그리고 경계병 숫자를 두 배로 늘려. 뭔가 발견하면 내게 즉시 고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고붕이가 얼른 뛰어나갔다.

도란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려 목을 풀고 있었다. 고병갑은 그녀를 진정시키며 몸을 일으켰다.

「잠깐 저쪽 세계에 넘어갔다 올게.」

그렇게 말하자 도란의 표정에 근심이 깔렸다. 로드가 떠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고병갑은 인자하게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까.」

「정말이죠?」

「그래. 십몇 분이면 돼.」

그가 문을 넘어 지구로 돌아갔다. 예상대로 김하나를 만났던 지리산 중턱이었다. 근 3주 만에 맡는 지구 내음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쉽게도 오래도록 정취를 느낄 여유는 없다. 그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틈틈이 태양광 충전기로 충전시키긴 했다만 배터리가 간당간당했다.

‘아슬아슬하게 기한은 맞췄네. 일이 덜 끝나긴 했지만.’

그가 정선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채 2번도 울리기 전에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야! 병갑아! 너 살아있냐!?

“응. 어찌어찌 살아있네. 그런데 어째 목소리가 좀 아쉬운 것 같네?”

-야 이 미친 새@#&*@#!&@…….

핸드폰 너머로 엄청난 육두문자가 빗발쳤다. 농담으로 건넨 말인데 정선경의 성질을 자극한 모양이다.

그는 간신히 그녀의 분노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돌아오는 거야? 얼른 와서 네가 준 것들 가지고 가! 그거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친단 말이야.

“미안. 아직 완전히 정리된 게 아니라서. 누나한테 부탁도 좀 있고.”

-부탁? ……이 망할 놈이 또 뭘 시키려고?

“다른 건 아니고…….”

고병갑이 얼마간 뜸을 들였다. 염치 무릅쓰고 하는 부탁이긴 하지만, 이게 도리에 맞나 싶었다.

“누나. 약 좀 구해줄 수 있어?”

-약? 무슨 약?

“그게…….”

-아 씨! 빨리 말해! 그래야 구해주든 볶아주든 할 거 아니야!

“엄청 독한 수면제. 전신마취할 때 쓰는 그런 거 있잖아. 아니면 정신 회까닥하는 마약 종류도 괜찮고, 맹독도 좋아. 좀 구해줄 수 있어?”

수화기 너머가 고요해졌다. 고병갑은 얼굴이 화끈거려 더 말하지 않았다. 새 지저귀는 소리만 요란했다.

그리고 몇 초 후.

-이거 순 또라이 새#^&^$#@^&…….

그는 이날 세상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은 다 먹었다.

* * *

-내가 진짜 살다 살다 너 같은 미친놈은 처음 본다. 죽으러 간다는 놈이 3주 만에 전화해서는 마약을 구해달라고? 야 이 얼빠진 자식아! 너도 내가 그딴 거에 손대는 인간으로 보였냐?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한 거야? 또 뭐랬지? 맹독? 하…… 진짜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미네. 다신 나한테 이딴 부탁 하지 마!

수술용으로 쓰는 마취제를 가지고 온 정선경이 지리산 초입에서 했던 말이다.

욕은 있는 대로 퍼부었지만, 끝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고병갑은 그녀에게 고맙다고 절을 세 번이나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구먼. 하여간 너는 진짜 서울 올라오면 보자!

그녀는 스케줄 때문에 급히 서울로 돌아갔다. 고병갑은 쓴 입맛을 다시며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벌써 캄캄한 밤이었다.

「오셨습니까!」

「어, 고붕이. 특이사항 있냐?」

「없습니다. 조용했습니다.」

「그래. 잘하고 있다.」

고병갑은 어둑한 숲을 내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약은 구했다. 이제 이걸 랜드리올에게 먹이고 취약해진 틈을 노려 허를 찌르기만 하면 된다.

이 작전이 겉보기엔 좀 허접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를 통해 검증된 암살 수법이다.

‘문제는 랜드리올한테 마취약을 어떻게 먹이냐는 건데.’

본래 계획은 밥상에 약을 타는 것이었다. 도란에게 랜드리올의 일거수일투족을 물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허나 언제나 그랬듯 일은 기대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랜드리올에게 수라상을 대접하지 않는다니.’

고병갑은 당연히 랜드리올이 상다리 부러질 듯한 진짓상을 대접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따로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가 먹는 것은 오직 ‘골드 드래곤 고기’였다. 조리도 거치지 않은 생고기를 뜯어 먹는 게 그의 유일한 식(食) 행위인 것이다.

밥에 약을 타지 못한다면 대체 어떤 경로로 약을 먹인단 말인가?

고뇌에 잠겨있던 그를 깨운 것은 도란의 목소리였다.

「로드. 여기 계셨네요.」

「음? 나를 찾았어?」

「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도란의 태도가 웬일로 진중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고병갑도 진지해졌다.

「할 말이라는 게 뭔데?」

「로드. 그거 제가 할게요.」

「뭘?」

「그놈…… 랜드리올에게 약을 먹이는 거요.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녀도 이번 작전을 전달받았기에 문제점과 고충을 알고 있었다.

고병갑이 눈살을 찌푸리자 도란이 서둘러 말했다.

「사실 그놈이 저를 발타드렌으로 다시 불러들였어요.」

「불러들였다고?」

「네. 저를 불러들인 이유는 아마…… 다시 침실로 들이기 위해서일 거예요.」

「야 너 혹시.」

고병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이어 말했다.

「한 번 들어가 봐서 알아요. 그때만큼은 놈도 무방비해요. 무기도 없고 발가벗고 있죠. 술도 진탕 먹어서 눈도 좀 풀려 있고요. 그때를 노리면 돼요. 내가 할 수 있어요.」

「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고병갑이 딱 잘라서 거절했다.

「왜요! 왜 말 같지가 않은데요?」

「몰라서 물어? 너무 위험해. 그러다 잘못 틀어지면 넌 손쓸 틈도 없이―」

「왜!」

별안간 도란이 꽥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꽥꽥대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다만, 이번만큼은 안에 담긴 감정이 달랐다.

고병갑이 흠칫 떨었다.

「너…….」

「왜… 왜 로드만 위험한 걸 하려고 하세요? 인제 와서 안 위험한 게 어딨냐고요!」

「…….」

「어차피 난 발타드렌으로 가야 해요. 놈이 불렀는데 안 가면 의심을 살 테니까요. 원래는 오늘까지 가야 했어요. 어쩌면 벌써 수상하게 여기고 있을지 모르죠.」

그녀가 고병갑의 팔에 매달렸다. 거의 애원하는 투였다.

「부탁드려요. 내가 로드를 도울 수 있게 해주세요. 네? 제발요!」

「…….」

「만약 로드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예요. 그러니 어차피 죽기로 한 목숨. 로드를 위해서 쓸 수 있게 해주세요.」

도란의 의지는 굳건했다. 철부지로 느껴지던 작은 소녀는 이제 없었다.

고병갑은 그 사실이 너무 가슴 아팠다. 그리고 고마웠다. 그가 도란을 꼭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이튿날 도란은 발타드렌으로 떠났다. 마취약이 든 보따리를 들고서.

* * *

랜드리올은 제왕이다. 한땐 그 위상이 신과 필적하여 눈짓만으로 수십만 아인을 통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다 옛날 옛적 이야기였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볼품없는 천오백 시종과 복수심, 그 둘뿐이었다.

오늘도 랜드리올은 온종일 공방에 있었다. 고대의 상점에서 사들인 철광석으로 무기와 농기구를 만드는 게 요즘 그의 일과였다.

본래 그 작업은 궁정의 연금술사들이나 하는 허드렛일이다. 결코 왕이 할 일은 아니란 뜻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연금술사는커녕 변변찮은 기술자 한 명이 없는데.

‘십 년. 딱 십 년만 기다려라, 마드무트. 내 반드시 너를 갈기갈기 찢어 씹어먹어 주마.’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내면의 분노를 일깨웠다. 그날의 치욕, 상실감, 슬픔. 기타 모든 부정적인 감정은 단 한 순간도 잊어선 안 되는 것들이었다.

-똑. 똑.

그때 누군가 침소의 문을 두들겼다.

「메리린입니다.」

「들어오라.」

문을 열고 메리린이 들어왔다. 그녀의 옆엔 작은 소녀가 얇은 비단옷을 입은 채 서 있었다.

‘바린…….’

소녀의 이름은 도란이다. 하지만 랜드리올은 도란을 보며 바린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찌 저리 똑 닮았을꼬? 그녀의 태생에 대해 듣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바린의 환생이라고 생각했으리라.

랜드리올은 지척에 놓인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말했다.

「메리린은 나가 보아라.」

「저… 제왕이시여…….」

「나가라 하였다.」

「예…….」

메리린이 슬픈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제왕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친딸이나 다름없는 도란을 두고 가려니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도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도란아. 부디 얌전히…….」

「꺼져. 네 목소리는 듣기도 싫으니까.」

도란이 거칠게 어깨를 털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제왕에게 다가갔다.

메리린은 잠시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가 침소를 빠져나갔다.

「메리린이 널 친딸처럼 키웠다고 들었는데. 말버릇이 고약한 계집애로고.」

「…….」

「그래. 듣자 하니 스스로 내 침소에 들겠다 했다고?」

랜드리올은 다시 술병을 들이켰다.

얼른 취해야 했다. 취하지라도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도란이 대답했다.

「네.」

「무슨 꿍꿍이지? 지난번엔 미친 개새끼마냥 발광을 해대더니. 무슨 연유로 마음을 바꿔먹은 게냐? 내 너를 발타드렌으로 복귀시키긴 했다마는 이러려고 부른 것은 아닌데?」

「꿍꿍이고 뭐고 없어요. 더는 곡괭이질 하고 싶지 않거든요. 제왕의 아이를 배고 편히 지내고 싶을 뿐이에요.」

「흐흐흐. 당돌한 계집애로고. 성격은 영 딴판이구나. 그 아이는 참 유순했는데.」

랜드리올이 잠깐 회상에 잠겼다. 바린은 아주 얌전하고 소심한 여인이었다. 뒤에서 깜짝 놀래키기만 해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던가? 그가 전장에 출두라도 하는 날엔 눈이 퉁퉁 부어올랐다.

도란은 눈동자를 몇 바퀴 굴리다가 물었다.

「성격은 딴판이라뇨? 누구와…….」

「입 다물라.」

「……네. 죄송합니다.」

도란이 옷 매듭을 풀었다. 얇은 비단옷이 스르륵 내려가며 그녀의 나신이 드러났다. 그녀가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랜드리올은 일부러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연신 술병만 비워댔다.

어느덧 도란이 침대에 올랐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랜드리올에 안겼다. 그러자 랜드리올이 그녀를 밀쳐냈다.

「쓸데없는 요식은 필요 없다. 똑바로 누워라.」

「…….」

그는 육욕 때문에 여인네를 침실로 들이는 게 아니었다. 번식. 오로지 번식을 위함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기계적으로 일을 해치우고 보내버릴 참이었다.

분명 그러려고 했었다.

도란이 몸을 잔뜩 웅크리며 몸의 몇몇 부위를 가렸다. 이어선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부끄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부끄러워요. 불을 꺼주시면 안 될까요?」

「…….」

랜드리올의 심장이 철렁였다.

이 소녀. 좀 전의 당돌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더욱이 쑥스러운 듯 교태를 부리는 꼴은 바린과 똑 닮았다.

그가 홀린 듯 팔을 휘적거렸다. 그러자 침실의 모든 초가 꺼졌다.

도란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간드러진 목소리를 냈다.

「폐하. 저는 폐하의 것이에요.」

「입을… 입을 다물…….」

「저를 안아주세요. 제왕의 아이를 배고 싶어요.」

도란이 스르륵 몸을 일으키며 안겨들었다. 랜드리올은 어쩐 일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 암고양이 같은 년이…….」

「으으응.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마세요.」

도란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머리카락으로 손을 가져갔다. 올려 땋은 머리카락 속에서 알약 하나를 꺼낸 후 랜드리올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것을 입에 넣었다.

그러자마자 제왕이 입술을 들이밀었다. 그는 이미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혓바닥 뒤에 교묘히 숨은 알약도 눈치채지 못했다. 랜드리올은 그저 도란의 입술을 탐했다.

「바린. 바린. 바린!」

그가 야수처럼 돌변했다. 아까의 냉소적인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가 위에서 도란을 덮쳤다. 도란에게는 지옥과 같은 순간이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고 얼른 그때가 오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으…… 으윽!?」

랜드리올이 갑자기 이마를 잡으며 비틀거렸다. 그의 눈이 당장에라도 감길 듯했다. 도란은 참지 못하고 그 몸을 밀쳐냈다.

랜드리올은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챈 듯했다.

「이 요망한 년! 무슨 짓을……!」

랜드리올이 어마어마한 살기를 방출했다. 도란은 당장이라도 요절해버릴 것 같았지만 두려움을 꾹 참고 내력을 모았다.

‘공격하려는 건가!’

랜드리올은 그녀의 내력이 자신을 향하리라 예상하고 즉시 방어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녀가 노린 것은 벽이었다.

「로드! 로드으으!!!」

도란이 목이 찢어지라 외치며 벽을 쳤다. 돌 더미가 속절없이 무너지며 바깥 공간이 드러났다.

그리고 한 사내가 들어섰다.

「욕봤다. 이제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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