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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65화 (65/151)

65. 성벽을 쌓다

그러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핏 봐도 서른은 넘는 머릿수였다.

도대체 언제? 고병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일단 검을 뽑는다.

「뭐야, 이것들! 아무런 기척도 못 느꼈는데?」

「이놈들은 기척이 없습니다!」

도르마가 잔뜩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고병갑은 인상을 확 구기며 되물었다.

「기척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분명 살아 움직이는 데도 아무런 생기가 없습니다. 마치 죽은 것들처럼 말입니다.」

「생기가 없다고?」

도르마의 말을 듣고 나니 색다른 점이 보였다. 놈들은 생명이라면 무릇 지니고 있어야 할 뜨거운 기운이 조금도 없었다.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도 그 까닭이었다.

‘확실히 괴상한 것들이군.’

외모부터 괴상했다. 흡사 매스컴에 등장하는 유령 같다.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팔과 다리가 달렸다는 것 정도.

아울러 커튼처럼 늘어진 살과 새빨간 눈, 큼직한 아가리는 무척이나 혐오스러웠다.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는 놈들입니다. 아까도 지금과 같았습니다.」

「그래, 무슨 소린지 이해했어.」

전투가 불가피했다는 말이 확 와닿았다.

모르는 틈에 코앞까지 와 있는데 어떻게 안 싸울 수 있겠는가. 뭐가 됐건 일단 이 상황을 넘겨야 했다.

「모두 전투 준비!」

고블린들이 즉각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수적으론 이쪽이 우세하다. 두 배가 넘는 차이였다.

「아으아…….」

「아으…….」

그러글들은 좀비처럼 허우적대며 느리게 걸어왔다. 딱히 위협적인 몸놀림은 아니었다.

「싹 쓸어버려!」

「옙!」

고블린들이 일제히 튀어 나갔다.

공격대와 도란이 먼저 전방의 적을 녹여냈다. 보병대도 즉각 가세해 기다란 창으로 공백을 찔렀다.

창칼에 맞은 그러글들은 비명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고병갑은 적진 한가운데 직접 침투했다.

처음 겪는 상대이기에 잔뜩 긴장했으나, 세 마리쯤 썰어 넘길 무렵엔 허무함이 더 커졌다.

‘뭐가 이렇게 약해 빠졌어?’

놈들의 방어력은 하찮았다. 구태여 내력을 실어 공격할 필요도 없었다.

움직임이라도 재빠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굼뜨기 그지없어 때리면 때리는 족족 맞았다. 그렇다고 위협적인 괴력이나 비장의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종합하자면 G급 몬스터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살벌했던 첫인상과 달리 전투는 너무도 허무하게 끝났다. 1, 2분도 지나지 않아 30마리의 그러글이 바닥과 하나가 되었다.

‘윽!’

전투가 끝나자 좀 전까지 없던 악취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정말이지 이 세상 어떤 악취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역겨운 냄새였다.

‘왜 갑자기 악취가 나는 거지?’

썩는 냄새의 원인은 곧 밝혀졌다. 죽은 그러글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부패하고 있었다.

‘…뭐야, 이것들. 피를 안 흘리잖아?’

괴이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격렬한 전투가 있었음에도 숲엔 붉은 자국 하나 없었다. 난자된 시신이 서른 구면 적어도 피 한 말은 뿌려야 정상일진대.

고병갑은 꺼림칙함을 느끼며 칼로 그러글의 시체를 까뒤집었다. 다음 순간 그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피랑 내장이 없어? …이것들 생물이 맞기는 한 건가?’

그러글은 그냥 살덩이였다.

뼈도 내장도 뭣도 없이 오롯이 살만 있었다. 어쩐지 베는 감각이 낯설더라니.

「로드, 이것들 기분 나빠요.」

「도란, 손에 든 거나 버려. 이제 필요 없으니까.」

「아, 네. 알겠어요.」

도란은 들고 있던 머리통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철퍽!

마치 농익은 홍시처럼 터져 버리는 대가리.

‘단순히 몬스터의 일종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달라. 이제껏 본적 없는 유형의 생물이야. …제길! 솜니움은 괜찮은 건가?’

불현듯 솜니움이 걱정됐다.

이따위 놈들이야 고블린들이 가볍게 압도하겠지만 그래도 노파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희, 바로 솜니움으로 복귀해.」

「음? 로드께선 함께 가지 않으십니까?」

키리얀이 물었다. 고병갑은 검을 거두어들이며 대답했다.

「나 먼저 갈 테니까 뒤따라오라고.」

고병갑은 그 말만 남기고 횡 사라져 버렸다.

가는 길, 온 신경을 눈에 집중해 숲 곳곳을 살핀다. 다행히 그러글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비로소 솜니움에 도착했을 때 그는 너저분한 그러글 시체를 볼 수 있었다.

「앗! 로드시여!」

20명가량의 고블린이 고병갑을 반겼다. 그들은 전부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바닥에는 10마리 정도의 그러글이 널브러져 있다.

「다들 무사하냐? 다친 녀석 없어?」

「옙! 전부. 멀쩡합니다.」

「이게 다야? 성벽 안으로 들어간 녀석은 없고?」

「없습니다. 그 전에 전부. 잡았습니다!」

고붕이가 자랑스레 말했다. 고병갑은 짐짓 놀랐다.

「어… 잘했다. 그런데 이놈들이 오리란 걸 어떻게 알았어?」

「몰랐습니다. 그냥…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이것들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잡았습니다.」

‘시키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경계를 서고 있었던 건가?’

그가 은근하게 미소 지으며 고붕이의 등을 두들겼다.

「좋아, 아주 잘했다! 계속 그렇게 하면 돼.」

「헤헤. 옙!」

고병갑이 칭찬하자 고붕이가 쑥스러운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고붕아, 이것들은 숲에 땅 파서 묻어 버려라.」

「알겠습니다. 묻어 버리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명령한 뒤 비교적 온전한 대가리 하나를 챙겼다.

성벽은 40% 정도 실체를 잡은 상태였다. 벽 하단에 작게 난 문을 지나 솜니움으로 들어섰다.

그는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에아를 만날 작정이었다.

대가리는 대충 바깥에 던져두고 식당으로 입장했다. 에아는 주방 안쪽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

「에아, 에아.」

「어? 당신, 돌아왔군요.」

「식사 준비 중이었어?」

「네, 슬슬 저녁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라서요. 왜요? 내게 볼일이 있나요?」

「잠깐 밖으로 나와 봐. 너한테 보여 줄 게 있어.」

「보여 줄 거요? 오오, 뭔가 기대되네요.」

기대된다는 말에 양심이 뜨끔거렸다.

고병갑은 먼저 식당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에아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비비며 따라 나왔다.

「내게 보여 주고 싶다는 게 뭐… 꺄아악!」

대가리를 발견한 에아가 기겁하며 비명 질렀다. 그녀는 잔뜩 몸을 움츠리며 그러글 대가리와 고병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 저, 저거…….」

「이게 네가 말한 그러글이 맞아?」

「아, 아으…….」

에아는 대답 대신 눈동자를 까닥이며 대답했다.

「역시 이것들이 그러글이었군. 안 좋은 거 보여 줘서 미안한데 몇 가지만 좀 물어보자.」

「괘, 괜찮아요. 오랜만에 봐서 좀 놀랐을 뿐이에요. 후우… 뭐든지 물어봐요. 내가 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답해 줄게요.」

고병갑은 끌지 않고 질문을 늘어놓았다.

그러글의 정체가 뭔지.

어째서 이놈들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는지.

살덩이뿐인 이것들이 생물체가 맞긴 한 건지 등등.

에아는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그러글의 정확한 정체는 나도 몰라요. 그저 악마가 지상계를 떠날 때 남겨 두고 간 거라는 것만 알죠. 그래서 악마의 끄나풀이라 부르는 거고요.

-맞아요, 그러글은 기척을 내지 않아요. 그네 중에는 십 척이 넘을 만큼 커다란 놈도 있는데, 그런 거구들조차 눈으로 보기 전까진 알아차리지 못해요.

-그러글은 왜 보통의 생명체와 다르냐고요? 글쎄요, 애초에 상식이 통하는 것들이 아닌지라…….

에아는 성심성의껏 답변해 주었다. 하지만 정성과 별개로 만족스러운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의문을 해소해 준다기보단 이상하게 느낀 부분을 다시 한번 되짚어 주는 것에 그쳤다.

「흠…….」

「미안해요, 내가 별 도움이 안 된 것 같네요. 사실 그러글은 존재 자체가 미지예요. 고기 맛이 더럽게 없다는 걸 빼면 알려진 게 거의 없죠.」

「아냐, 충분히 도움 됐어. 그러고 보니 너 여기 오기 전에는 이것들을 먹고 살았다고 했지?」

「맞아요. 끔찍했죠.」

정말로 끔찍했을 것 같다. 죽자마자 급속히 부패하는 썩은 고기를 먹고 지냈다니.

자신이라면 도저히 못할 듯했다.

「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자. 이놈들 원래 이렇게 약한 거야? 너무 약해서 허무할 지경이던데.」

「저번에도 말했듯이 개체마다 달라요. 약한 놈들은 약하죠. 하지만 강한 놈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대요.」

「어느 정도인데?」

「나도 실제로 본 건 아녜요. 다만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그녀가 손을 뻗더니 바위산 꼭대기를 가리켰다.

「어떤 그러글은 산 하나에 버금가는 덩치를 가졌다고 해요. 워낙 유명한 녀석이라 이름도 있죠. ‘티탄’이라고.」

「티탄?」

「네, 티탄이 지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대요. 그나마 다행인 건 놈이 너무 커서 가까이 오기 전에 알아차릴 수 있다는 거죠.」

고병갑은 에아가 가리킨 바위산 봉우리를 보았다.

‘세상에, 산만한 생명체가 있을 수가 있나?’

몬스터 중 초대형급으로 분류되는 녀석들도 고작해야 십수 미터가 전부다.

그런데 산만한 괴물이라니. 직접 보기 전까지는 실감이 안 날 것 같았다.

* * *

「내가 아까 지목한 애들은 무장 갖춰서 성벽으로 와.」

「예! 알겠습니다!」

「그래, 이상으로 저녁 점호는 끝이다. 다들 해산해.」

시계탑 앞에 모였던 고블린들이 흩어졌다. 일부는 무기 저장고로 가서 무장을 갖추고 성벽으로 향했다.

고병갑도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성벽으로 이동했다.

‘원정 가서 지긋지긋하게 불침번 섰는데 또 날밤을 지새워야 한다니, 내 팔자도 참.’

불평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렇다. 그는 오늘 야간 보초를 설 심산이었다.

아무래도 안개를 걷어 낸 첫날이고, 그러글과도 마주쳤으니 오늘만큼은 뜬 눈으로 보내야 할 것 같았다.

피곤하긴 하겠지만 불안에 밤잠 설치는 것보단 나았다.

성벽엔 내부 공간이 있었다. 꽤 넓어서 쪽잠을 잘 수도 있고, 물자를 적재해 놓기도 좋았다.

내외부에 설치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옥상에 도달할 수 있다.

옥상에는 이미 고블린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 하루 근무를 맡을 20명의 인원으로, 모두 비스트 고블린이다.

「뭘 해야 하는지는 아까 설명했지? 혹시 이해 못한 녀석 있어?」

「없습니다!」

「좋아,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사사로운 거라도 발견하면 내게 즉각 보고해라.」

「옙!」

「좋아, 그럼 각자 위치로 가.」

성벽이 꽤 넓긴 했어도 20명이면 모든 영역을 사수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비스트 고블린은 시야각이 넓었다.

고병갑은 성벽 중앙부로 가서 캄캄한 숲을 내려보았다.

‘더럽게 캄캄하구먼.’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걱정은 없다. 비스트 고블린의 밤눈은 웬만한 고양잇과 맹수들보다도 밝으니까.

‘낮에 봤던 놈들 정도라면 절대 이 성벽을 뚫지 못할 거야.’

성벽은 높이만 20미터에 이르렀다. 어지간한 운동 능력이 아니라면 짚을 곳 하나 없는 벽을 오르기가 쉽지 않으리라.

또한 매우 두껍고 견고해서 웬만한 충격은 상쇄할 수 있었다.

고병갑은 얼마간 아래를 내려보다가 옆의 고블린에게 말했다.

「특이 사항 생기면 바로 말해. 나 저쪽에서 좀 자고 있을게.」

「예! 알겠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고병갑은 적당한 벽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너무 피곤해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할 듯했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대략 2시간 후였다.

「로드시여, 로드시여.」

한 비스트 고블린이 고병갑을 깨웠다. 고병갑은 얼른 정신을 다잡았다.

어리바리 탈 겨를이 없다. 무슨 일이 생겼으니 깨웠겠지.

「놈들이 나타난 거냐? 그래, 얼른 가 보자.」

그는 비스트 고블린의 안내를 받아 끝 쪽 성벽으로 이동했다.

「저것들. 로드께서 말씀하신. 괴물이 아닙니까?」

녀석이 한 방향을 지목했다. 거기엔 낮에 마주친 그러글과 똑같은 생김새의 괴인이 있었다.

다 합해서 세 마리 정도다.

놈들은 어슬렁어슬렁 숲을 배회했다. 놀랍게도 그뿐이었다. 딱히 이쪽에 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고병갑은 한참 지켜보다가 말했다.

「일단 가만히 내버려 둬. 놈들이 성벽을 타고 오르거나 이쪽에 위해를 가할 것 같으면 다시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오냐, 고생해라.」

눈에 거슬리긴 해도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다. 솔직한 말로 마땅히 조치할 방도가 없기도 하고.

고병갑은 다시 제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는 다시 잠드는 대신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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